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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May 25. 2018

너를 맞이할 준비

  예정일까지 한 달을 앞두고 출산휴가가 시작됐다.

  휴가가 시작된 첫날. 일찍 일어날 필요가 전혀 없는데 눈이 번쩍 떠졌다. 따님의 야간 태동 덕분에 밤잠을 설쳐 늦게까지 자고 싶었건만 휴가의 설렘이 더 컸던 모양이다. 혼자서만 출근하려니 회사에 가기 싫다는 신랑에게 현모양처 코스프레를 하며 아침밥을 차려주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월요일 아침의 늦잠이라니. 행복해서 웃음이 슬슬 새어나왔다.

  아기를 낳기 전 내게 주어진 한 달의 휴가가 꿈만 같았다. 뭘 하고 놀아야 할까. 임신 선배들에게 출산휴가 기간에 뭘 하면 좋을까 물었더니 열이면 열, 모두 무조건 많이 자란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다시는 없을 혼자만의 시간을 자면서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밖에 나갈 스케줄을 만들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요가 수업, 한 번은 동네 도서관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러 갔다가 근처를 슬슬 돌아보니 예쁜 카페들이 모여있는 골목이 있었다. 완벽했다. 도서관에 갔다가 그냥 들어오기 아쉬운 날이면 카페에 들러 사람구경도 하고, 책도 몇 장 읽고 들어오는 거다. 햇살이 잘 드는 카페 창가에 앉아 여유롭게 음악도 듣고, 커피 냄새도 맡고 할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설렜다.     

  

  하지만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은 내가 혼자인 듯 혼자 아닌 둘이라는 점이었다. 막달에 들어서면서 어마무시하게 존재감을 뿜어대는 따님 덕분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단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왜 하필 폭풍태동은 새벽 서너 시에 찾아오는가. 태동과 배뭉침이 번갈아 찾아오면 새벽까지 뒤척이다 아침에야 잠이 들었다. 그러고 요가에 가려면 두세 시간 자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건 만삭의 산모가 할 짓이 아니다. 무슨 부귀영화를 보자고 만삭의 임산부가 잠까지 줄여가며 운동을 가나.

  어쩌다 잘 자서 밖에 좀 나가볼까 싶은 날엔 봄날의 날씨가 말썽이었다. 맑은 날은 미세먼지가 난리고, 공기가 깨끗한가 싶으면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미세먼지가 나쁜 날에 돌아다니지 말아야 할 노약자, 임산부, 어린이 카테고리에 속해 있으니 그 날은 외출 금지. 비 오는 날엔 배불뚝이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또 외출 금지. 미세먼지와 비의 콜라보가 환상을 이루던 주에는 어찌나 밖에 못 나갔던지, 빨래에서 남편 양말이 다섯 켤레 나올 동안 내 양말은 달랑 한 켤레가 나왔다. 신나게 놀면서 보낼 줄 알았던 나의 출산휴가는 예상치 못한 집순이 놀이로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심심한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남편과 나, 두 사람이 함께 하던 생활에서 세 사람이 되려고 하니 준비해야 할 게 꽤나 많았다.

  먼저 부부 두 사람 맞춤으로 살았던 집 구조부터 바꿔야했다. 이미 두 사람의 물건으로 꽉 차 있는 집에 아기의 옷과 물건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려니 어른들 짐부터 정리해야 했다. 그런데 배불뚝이 상태로 온 집안 물건을 들어내고 다시 정리한다는 게 쉽지가 않다. 출근할 때에는 그렇게 입을 옷이 없더니 막상 정리하려고 보니까 옷장에 옷이 가득이다.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남편과 나의 사계절 옷을 버리고, 정리하고, 재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청소할 곳도 천지였다. 평소에 자주 손대지 못 하던 베란다, 세탁실 같은 곳을 찬찬히 살펴보니 어찌 이러고 살았나 싶게 지저분했다. 살림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이 모양이다. 냉장고 속은 더 가관이었다. 장 볼 때는 비싸서 벌벌 떨면서 집어왔던 온갖 식재료들이 유통기한을 넘긴 채 상해가고 있었다. 하루는 냉장실, 하루는 냉동실 이런 식으로 상한 식재료들을 버리고, 먹을 수 있는 건 용기에 정리하고 하다보면 시간은 금방 흘렀다. 그 때 깨달았다. 출산휴가는 아기 낳기 전에 신나게 놀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아기를 맞이할 준비를 위한 시간이었다.    

 


  

  청소를 하고, 아기옷 빨래를 하고, 집안 정리를 하다가 햇살 좋은 날 산책을 나갔다. 임산부라고 꽁꽁 싸매고 지냈던 겨울이 어느새 떠나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비록 혼자이긴 했지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벚꽃 구경을 하다보니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거기에서 생각이 멈췄을 것이다. 아, 행복하다.

  그런데 그 날은 한 가지 생각이 더 떠올랐다. 내년 봄에는 우리 아기와 함께 벚꽃을 볼 수 있겠구나.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을 아기와 함께 벚꽃을 보며 산책할 생각을 하니 봄이 주는 설렘보다 백 배는 큰 설렘이 가슴을 채웠다. 똘망아, 저게 벚꽃이라는 거야.

  봄에 나오는 딸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달콤하고 시원한지 처음으로 알아갈 우리 딸을 상상해보았다. 나에게는 일상인 것들인데도 아기가 처음 맞이할 순간들을 상상하니 마치 내가 처음인 것처럼 설렌다. 부모가 되는 일이 많이 힘들고 지치겠지만, 그 덕에 일상이 다시 설레게 다가온다. 남편과 나, 둘이었던 시간들이 셋이 되면서 얼마나 많이 행복할까. 얼른 아기를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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