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by 꼼지

딸의 백일이 다가온다. 태어나고 처음 맞는 기념일이다. 양가 어른들이 백일을 축하해주고 싶어하셨다. 날짜에 맞춰 가족들이 모이기로 했으니 뭔가를 준비해야 했다.


문제가 있었다. 모든 걸 준비해야 하는 사람은 나인데 내가 백일잔치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랑 둘이 케이크나 사다놓고 불이나 껐으면 싶었다. 하지만 내 딸의 백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날이 아니다. 일단 남편부터 나와 마음이 달랐다. 남편은 백일상도 차려주고 사진도 예쁘게 찍어주고 싶다고 했다.

내가 영 의욕없어 했더니 남편이 백일상을 차려주는 식당을 찾아냈다. 차려주는 상 앞에서 사진 찍고 밥이나 먹고 오잔다. 그것도 싫었다.


백일잔치만 하기 싫은 게 아니었다. 밖에 나가자고 해도 싫고, 여행을 가자고 해도 싫었다. 집 안에서만 맴돌며 아기를 돌보는 건 분명 답답하고 지루하다. 그런데도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혹시 산후우울증일까? 자가진단리스트를 찾아보았다. 아이에게 정이 안 가는지, 아이 낳은 게 후회되지는 않는지, 나만 힘든 것 같거나 인생이 끝난 것 같은지, 남편이 원망스럽지는 않은지 등등을 묻는 모든 질문에서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왔다.


딸은 너무 예쁘고, 딸을 낳은 건 분명 잘한 일이다. 육아가 힘들긴 하지만 그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남편에 관한 질문에서는 살짝 고민이 되긴 했다. 아이를 낳은 후 부부 사이가 예전 같지는 않으므로. 하지만 원망의 감정은 아니었다. 남편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체크리스트에 따르면 산후우울증은 아니었다.




아기를 낳기 전에도 이랬던 적이 종종 있었다. 연애가 잘 안 풀리거나,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염증을 느낄 때 주로 그랬다. 그럴 때면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억지로 소개팅을 하면 이상한 사람만 나오고, 친구들을 만나도 돈과 시간이 쌍으로 아깝게 느껴질 확률이 높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보면 어느날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그 때의 마음에 따라 요가를 등록하거나, 비행기 티켓을 끊거나,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뭔가를 배우는 것도 무기력증에서 빠져나오는 데 좋다. 새로운 걸 배우다보면 사는 게 슬금슬금 재미있어진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은 그런 데서 얻을 수 있는 덤이다.


그런데 그 중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아기를 두고 운동을 다닐 수도 없고, 뭘 배우러 갈 수도 없다. 남편은 여행이라도 가자는데 내가 싫다. 젖병과 분유, 기저귀 짐을 바리바리 싸서 100일도 안 된 아기를 안고 돌아다닐 기운이 없다. 세시간 텀으로 먹고, 자는 아기를 데리고 억지로 여행을 떠났다가는 몸도, 마음도 고생만 하고 돌아올 게 뻔했다.


기분전환이 될까 싶어 백화점에 가 본 적도 있다. 계절에 어울리는 립스틱을 사거나, 예쁜 원피스를 한 벌 사면 기분이 훅 좋아졌던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쇼핑도 아니었다. 아기 낳기 전보다 9kg나 불어있는 몸에 어울리는 옷이 없었다. 립스틱도, 가방도, 신발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꾸미고 나갈 데가 없다. 방 안에서 립스틱 바르고, 가방 메고, 신발 신고 애를 볼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사봤자 쳐박혀있을 게 뻔한 물건들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내가 좋아하던 일들 중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책 볼 시간도 없고, 맘 편히 친구를 만날 수도 없고, 훌쩍 여행을 떠나 맛있는 걸 먹고 올 수도 없다. 뭔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진 거다.


억지로 마음의 기운을 끌어올리려 애쓰고 싶지 않다. 딸을 먹이고, 돌보며 엄마의 역할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다. 시간이 흐르고, 딸이 자라고, 내가 엄마의 자리에 익숙해지면 그 때 분명 하고 싶은 일이 생기겠지. 그 때까지는 그냥 지금처럼, 하루하루를 버텨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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