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메디아 Apr 04. 2021

공감의 힘 : 나 같아도 죽여

「나의 아저씨」 리뷰 (2)

지난 연재글을 읽고 어떤 사람이 내가 받은 리액션 중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


'「나의 아저씨」와 교육이 대체 무슨 상관인가요?'


물론, 「나의 아저씨」가 EBS에서 틀어주는 교육 다큐멘터리를 표방하지는 않는다. 「나의 아저씨」에는 교사도, 학생도, 없다. 하지만 교육은 꼭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고, 학생이 교사에게 배워야 일어나는 일련의 행위라고 볼 수만은 없다. 한 명의 사람이 숨을 쉬고, 또 다른 사람이 옆에서 숨을 쉬는 가운데도 잠재적으로 교육은 이들의 생활 전반에 흐른다. 이 대전제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러한 대전제를 대중문화를 통해 그리기 위하여 글을 쓸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니까 말이다.


이번 에세이의 제목은 '공감의 힘'이다. 양산형 자기계발 에세이에서 정말 쉽게 볼 수 있는 문구 아닌가. 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공감은 교육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안은 살면서 제대로 된 공감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다. 특히 사채업자에게 가족이 맥없이 쥐어터지는 가혹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흉기로 찔러죽인 경험을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참혹한 경험이 깃든 지안의 실상을 알고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안을 경멸한다. 처음에는 지안의 표면을 보고 웃음짓던 이들도, 살인으로 점철된 지안의 이면을 파악하고 난 후에는 지안을 소외시킨다. 사회적으로 공감을 받지 못함은 달리 말하면 사회적으로 소외됨을 나타낸다.


이러한 소외는 결국 지안이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면서 더욱 악화된다. 사람들이 웃으면서 다가와도 지안은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이는 지안이 나쁜 사람으로 교육된 결과가 아니라, 사회가 지안을 소외시킨 결과다.




사람들은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상대방의 표면을 우선적으로 본다. 그리고 그 사람을 판단해버리고, 그 판단을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이후 언젠가 상대방의 이면을 파악하고 나면, 그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상대방의 일부인 표면만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행동한 본인이 존재했다. 이를 직감하고 사람을 바라보는 색안경을 벗어던지면 좋은데, 보통은 그러지 '않는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지 않는다.


왜? 힘드니까. 색안경을 벗고 사람을 보는 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일을 손쉽게 해낸다. 그리고 그 구별을 통해 차별을 하는 것조차 자연스레 한다. 피부색이 다르면 그 사람은 손쉽게 틀린 사람이 되고, 팔다리에 장애가 있어도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틀린 사람이 되는 건 한 순간이다. 그런 약자들을 우리와 '동일한' 개체라고 인식하고 그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주는 것에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안을 바라보는 눈도 마찬가지다. 본래 지안의 작고 귀여운 생김새를 통해 기대했던 것들이 무너지니, 소외와 외면으로 자신의 판단 미스를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지안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무표정과 째려봄 등으로 방어기제를 형성한다. 그래도 살인은 너무나 경악스러운 일인지, 사실을 알게되면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온다.


아이, 진짜 죽였대? 사람을? 와, 소름돋는다. 걔 사람을 죽였대요, 사람을. 와, 어쩐지 진짜 같이 있을 때마다 너무 춥고 막 살기가 어쩐지 막 느껴지더라, 진짜. 이런 사람이 진짜 우리 주변에 있을 줄은 몰랐다니까요.

- 「나의 아저씨」 14화


'어쩐지'라는 말은 참 잔혹한 것이다. 본인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본인의 선입견을 사실과 짜맞추어 스스로의 판단력을 높이 세우는 단어 아닌가. 이 단어 하나만으로 누군가는 쉽게 소외되어 버린다.


이렇게 소외에 익숙한 지안과 사람들 사이서, 동훈의 등장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물론, 동훈 역시 지안의 표면을 먼저 겪고, 그 다음에 이면을 알게 되었지만, 일반적으로 사회가 대우하는 것처럼 지안을 대우하지 않는다.


지안은 동훈과 적대적인 관계인 회사 대표 도준영에게 돈을 받는 대가로, 동훈을 도청하기 시작한다. 도청은 물론 범죄지만, 동훈의 진심을 지안이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는 매개로 작용한다.


드라마 초반, 동훈은 자기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킨 지안의 표면을 경험하며, 이를 비난하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걔 안 불쌍하니?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다 말해주잖아.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걔 지난 날들을 알기가 겁난다.

- 「나의 아저씨」 2화


동양 교육철학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맹자가 제창한 사단설에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가리키는 4가지의 형태가 담겨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인간이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보면, 인간은 선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니, 누구를 불쌍히 여길지조차 편가르기를 통해 구분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느낀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사회의 악한 본성이 잡아먹는 건지도 모르겠다.


동훈은 다르다. 맹자가 말하는 사단을 보여주는 천사의 모습이 결코 아니지만,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보일 수 있는 측은지심의 모습을 보일 뿐인데, 그것마저도 지안에게는 특별하다.


동훈은 냉담한 지안의 표면을 통해 지안을 소외하기보다는, 지안의 표면이 왜 냉담해졌는지를 먼저 고민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것이 공감의 시작이며, 교육이 필요로 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교사가 학생을 대할 때는 학생의 표면만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표면이 어떠한 잠재적 특성에 기인한 것인지 먼저 고민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이 십분 전달되기만 해도, 학생은 교육될 수 있다. 지안은 도청을 통해 동훈의 이러한 진심을 들으며, 동훈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형성한다.


이후 드라마가 중반에 들어서며, 동훈은 지안의 이면, 즉 과거와 현재를 알게된다. 과거에 지안은 사채업자를 죽였고, 이는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로 인정받아 무죄로 판결되었다. 이후 그 사채업자의 아들인 광일은 지안을 따라다니며, 원금/이자 상환 협박과 함께 지안을 주기적으로 폭행해왔다.


동훈은 이 사실을 알고 광일을 찾아간다.


왜 애를 패, 이 새끼야. 불쌍한 애를, 왜! ...... 나 같아도 죽여. 내 식구 팬 새끼들 다 죽여.

- 「나의 아저씨」 9화


이후에도 동훈이 지안에게 행사하는 공감의 힘은 여러 장면에서 드러나지만, 나는 이 대사가 공감의 본질과 동시에 공감의 절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지안이 이를 고스란히 도청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은, 본인을 사회로부터 가둘 수밖에 없었던 모든 표면과 이면을 동훈이 이해하고 공감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 같아도 죽여'라는 6글자 안에 담긴 공감의 힘이 곧,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인다는 것'은 그 누구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타동사이지만,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자연스레, 당연스레 가까이 하겠다는 말은, 되게 강력한 것이다.


이 자체만으로도 교육은 제공되었고, 동훈이 의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안은 변화의 싹을 틔운 것이다. 인간 행동이 비록 계획적으로 변화하지 않더라도, 동훈이 지안을 가르친 셈이다.


(다음)




이전 01화 교육은 삶 : 교육이란 무엇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