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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메디아 Aug 25. 2021

3차 금융위기

여전히 2018년 11월의 나

이 시리즈는 여전히 2018년 11월의 나에 머물러 있다. 그만큼 2018년 11월은 나에게 길고도 험한 시기였고, 고로 지금 와서는 할 얘기도 많은 때가 되었다.


덜컹거리며 험한 산길을 내딛던 버스는 어느새 면접 장소에 도착했고, 그 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기대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그 때의 내가 대견하기도, 가엾기도, 그러다 짠하기도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특정한 능력치가 그 때 현저히 덜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전반적으로 미래의 나를 기대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여유도 능력이라면, 나는 능력이 없었다.


나의 눈은 미래의 나가 아니라, 당장의 기관 보도자료에 머물러 있었다. 미시적 기초를 기반으로 하루하루 활발하게 돌아가는 거시경제의 동향에 대해 진지하게 심사숙고해보기보다는, 달달 외웠다.




Bloom의 교육목표 분류 (오리지널은 아니고 개정된 버전이다)


물론 달달 외우는 것도 중요하다. 위대한 교육심리학자인 블룸(B. S. Bloom)은 교육목표를 분류하며 인지적 영역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로 '지식'(Remembering)을 제시하지 않았는가. 지식이 있어야 이해(Understanding)를 할 수 있고, 이해를 할 수 있어야 구체적 상황에 적용(Applying)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나는 경제를 인지하는 데 있어 상당히 초등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1차 면접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앞으로 내가 지원했던 이 금융 공공기관을 단순히 '기관'으로 칭하도록 하겠다)


기관의 면접은 크게 다음 3가지로 이루어졌다.



1. 인성검사 (오전/오후)



개인적으로는 면접에서 인성검사를, 심지어 오전/오후 나누어 두 번이나 실시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인성검사는 필기시험을 볼 때 꼽사리로 껴서 같이 봐줘야 제맛 아닌가. 입을 열어 내가 살아온 경험들을 토해내려 갔는데, 펜을 잡고 불을 두려워하는지 체크해야 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기관은 이를 통해 두 가지의 시그널을 지원자들에게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인성이 중요하다. 지원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사실 필기 시험을 통과할 정도면 지식적인 측면은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실한 사람을 뽑고 싶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 열심히 다니고 공부 열심히 한 사람을 우대할 생각이 없다'는 식의 발언을 관계자로부터 들은 적이 있으니, 틀린 추론은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진정성이 중요하다. 성실한 것만큼, 이 지원자가 우리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와야 기관은 제대로 인재를 선별할 수가 있다. 모로 가든,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하고자 하는 기관의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2. 그룹면접



원래 기관은 토론면접을 봤었는데, 그것이 그다지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나때 갑자기 그룹면접으로 형식을 바꾸었다. 전에는 팀을 나눠 토론을 하는 형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주제를 하나 주고 그것에 관해 A4 1쪽 분량으로 그룹이 협동하여 보고서를 써내는 면접이었다. 3명의 면접관은 1시간 동안 우리의 협의 과정을 지켜보며 지원자 개개인을 평가한다. 보고서 내용 자체도 물론 평가 대상이다.


이 때 특이점은, 지원자들이 정말 보도자료를 낱낱이 읽고 외워 온 티가 났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다들 보도자료를 매일 같이 읽고 중요한 키워드들을 다 외워왔다, 그러다보니 협의가 창의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기관의 히스토리를 답습하는 방식으로 되게 안전하게 진행되었다. 기관의 보수성에 발맞춘 효율적인 대응이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소름돋았다. 누가누가 더 잘 외우나, 를 자랑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나도 꽤 외웠으므로, 어찌저찌 잘 넘어갔다.



3. 개인면접



4명의 면접관이 나에게 자기소개서 기반의 질문을 던지는 통상적인 방식의 면접이었다. 4명의 면접관은 각각 하나의 주제를 기반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그 중 1명은 전공 담당이었다. 즉, 나는 경제직렬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경제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 : 10년 주기설이라고 들어봤나요?


� : 네, 들어봤습니다. '98년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10년 후, '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또 10년 후인 올해 '18년 또 다른 위기가 발생할 수 있음을 가리키는 용어로 알고 있습니다.


�‍� : 맞습니다. 그렇다면 3차 금융위기가 올 것이라 생각하나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떤 종류의 위기가 올 것 같나요?


� : ....


막혔다. 그러다 나는 가까스로 말했다.


� :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후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둘러댔지만, 이 대답은 지금 생각해봐도 큰 실수였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얘기해버리면, 뒤에 할 얘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3차 금융위기에 대한 질문은, 정말 그런 위기가 올 것 같은지를 떠나서 전공에 대한 나의 이해도를 평가하기 위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3차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여러 변수를 경제 지식을 기반으로 설명하고, 이중 어떤 변수가 요즘 들어 금융안정을 위협하고 있는지 이야기해야 했다. 그런데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 그 이후에는 그럴 듯한 말이 이어지기 어렵다.



물론, 나는 그때 겨우겨우 '우리나라 유수의 금융 공공기관들이 이러이러한 조치를 통해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므로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경제학에 대한 이해도를 기반으로 한 대답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나는 이 지점에서 나의 개인적 '위기'를 경험했다. 책에 나오는 경제 지식과 기관의 보도자료를 매일 같이 들여다보던 나에게는 분명 지식과 이해는 있었지만, 3차 금융위기와 같은 새로운 상황에 그러한 지식을 적용하여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기관의 1차 면접에 합격했다. 그러나 나는 분명 부족했다. 여유가 부족했고, 여력이 부족했던 위기 상황에 나는 놓여 있었다. 나는 어설프게 서서 최종 면접을 준비했다. 기쁨에 젖은 채로 내가 했던 것은 결국 또 다시 책과 보도자료를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 그동안 세상은 어제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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