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푸리 푸들 '빵돌이'와 애증

코와 발바닥으로 사는 강아지들의 언어

by 반동희

강아지를 키우며 '애증'이란 단어를 배우고 있다. 정말 예쁜 녀석인데 가끔은 한없이 귀찮게 군다. 무척 보고 싶다가도 10분이면 한 생명체의 무거움이 내 어깨를 짓누를 때도 있다. 즐겨 드는 가수 양동근의 노래 제목을 인용하자면 난 '개 키워'다.


지난해 4월에 수컷 푸들을 데려왔다. 이름은 정확히 두 글자 '빵돌'이다. 당시 2개월 됐다고 분양받은 곳에서 말했으니 지금 꽤 컸다. 그렇지만 곧이곧대로 이 녀석의 출생일을 믿진 않는다. 원래 그런 곳은 출생일을 속이기 마련이다. 조금이라도 더 작아야 강아지의 '상품성'이 올라간다고 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 1개월밖에 안 됐어도 2개월이라고 곧잘 속이는 곳이 그런 곳이다.


그곳의 비윤리적인 산업시스템을 안 것은 분양받고 난 뒤였다. 아마 알았으면 내가 그 산업에 일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요가 있기 때문에 그런 산업이 발전하는 것이다. 지금도 빵돌이 녀석을 만난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그 과정의 잘못은 인정하고 또 인정한다.


그런 답답한 이면을 알고부터 난 이 녀석에게 더 많은 정을 쏟았다. 강아지라는 이유로 말만 하지 못할 뿐이다. 생각과 감정이 있는 녀석이다. 어쩌면 빵돌이를 포함해 강아지와 개들이 하는 말을 우리 인간만 알아듣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최소한의 소통만 가능한 빵돌이를 안고 동물병원을 들락날락했지만 그 속에서 배운 것도 참 많다. 예방 접종부터 중성화 수술까지 팔자에도 없던 날들이었다. 덧붙이자면 중성화 수술은 강아지를 무척 사랑하는 동물 병원 원장님이 "그래도 해야 강아지가 편하다"고 해서 했다. 이건 그 산업에 일조한 내가 내놓은 최소한의 정당한 해명이다.

어쨌든 이 빵돌이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녀석이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보일 때다. 이를테면 내가 하는 새로운 말이나 내가 데려가는 새로운 장소다. "산책갈래?" "껌 줄까?" 등은 잘 알아듣지만 "고기 좋아해?" "너도 여자친구 만나고 싶어?"와 같은 말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푸들 강아지의 원래 고향이 프랑스라고 들어서 "봉주르" 따위의 말도 안 되는 프랑스 말을 가끔 해봤는데 그냥 오른쪽으로 돌리던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게 없었다. 이 녀석을 내가 포항에서 데리고 왔기 때문에 경상도 사투리를 어설프게 섞어도 봤는데 그냥 무시하고 화장실 가서 '쉬야'나 해버리곤 했다.


새로운 장소를 데려가면 더 흥미롭다. 마치 탐지견이 된 것처럼 주변을 샅샅이 냄새 맡는다. 자기 몸을 중심으로 코를 킁킁거리며 크게 원을 그린다. 이런 모습을 보면 내가 주장하는 '경험론'이 크게 묻혀버리곤 한다. 나는 뭐든 경험하지 않은 이상 말하거나 쓰기 어렵다는 고지식한 생각을 갖고 있다. 지금 한창 쓰고 있는 단편 소설들도 결국은 시작점은 경험이나 간접 접촉에서 왔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녀석이 코를 바닥과 사물에 대고 그 기록과 향을 음미하는 것을 보면 '참 보잘것없는 개똥철학이 내 경험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 그렇다고 내가 코를 가져다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빵돌이 같은 강아지와 개들만 느낄 수 있는 그 체험에 존경을 표한다. 언젠간 아무도 없을 때 따라해 보리라는 다짐만 하고 있다.


신체 중에는 발바닥이 가장 중독성 있는 스킨십 대상이다. 빵돌이의 발바닥을 만지면 의외로 푹신하다. 꼭 포도주에 젖은 코르크 마개를 만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발바닥이란 게 이들의 유전적 결과물의 상징이다. 또 가장 세상과 맞닿은 부분이기도 하다. 이들은 푹신한 스펀지 같은 발바닥으로 몸을 지탱하면서도 그 속으로는 자신이 밟은 세상의 딱딱함과 비릿함을 기록할 것이다. 한 번 가본 곳과 밟은 땅을 코로 먼저 감지하면 그들의 발바닥 속에 응축된 느낌이 기억을 되살린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 이 빵돌이 녀석에게 멀리 뛰기를 시키면 거의 같은 부분을 밟고 소파로 뛰어오른다. 물론 빵돌이도 지치면 혀를 내빼고 헉헉거리며 기록이 점차 단축되곤 한다.

코와 발바닥으로 사는 강아지들의 언어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 의사를 이해하려 한다. 최소한의 소통을 하려는 이런 빵돌이의 모습을 볼 때면 귀를 닫고 눈을 감은 현실 속 저기 어딘가 높은 곳의 서늘함도 같이 떠오른다. 나를 포함한 여럿의 '갸우뚱'이 부족한가 싶다가도 최소한 알아들을 수 있는 "산책갈래?" "껌줄까?"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에 답답함이 오르기도 한다. 오늘도 빵돌이는 큰 원을 그리며 자신의 경험으로 세상을 산다. 저 껌뻑거리는 눈에서 녀석의 체험과 앞으로 체험해야 할 것들의 순수함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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