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집회를 보며

관점의 차이는 언제나 존재할까?

by 반동희

조금은 고민했다. 이런 사회 이슈를 이 공간에 쓰는 게 맞나 따졌다. 이곳은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나를 표현하는 곳이라 정의했기에 그랬다.


하지만 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건 정치 문제가 아닌 국재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라고 결론 내려서다. 이념에 앞서 시스템과 삶의 생태에 대한 문제라고 다시금 원론을 굳혔다.


지난 토요일 광장에 갔다. 촛불이 혁명이 되려 한다는 그 한가운데에 다시 섰다. 다만 이번엔 다른 길을 택했다. 이른바 맞불 집회이자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라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참고로 부연하자면 나는 이들을 보수 단체라 부르지 않는다. 보수란 결국 법과 원칙을 최우선으로 두고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조가 이들 지지하는 인물한테선 엿보이진 않다.


현장의 온도를 느끼고 싶었다. 기자 생활을 한 경험인 것 같은데 어떤 경우든 반대의 사유나 주장을 접하는 게 내 관찰을 다듬어준다는 지론이 있어서다. 현장 접촉에 앞서 모든 편견과 따로 떼어 낸 생각을 저리 치우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시청역에 내려 7번 출구로 향했다. 태극기를 든 60대 이상 이들이 많았다. 초반 촛불 집회 현장을 찾았을 때와는 분명 달랐다. 그들 대다수는 등산복 차림이었다.


계엄령 운운하는 피켓을 볼 때는 요즘 읽고 있는 소설 <태백산맥>을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다시고 있어서 씁쓸했다. 광복 72주년을 견뎌낸 이 나라는 그때보다 얼마나 달라졌는가. 전쟁을 관통한 시대 유산은 어디로 가거나 혹은 왔나. 이 시국 이후엔 다시 어디로 어떻게 노를 저을까. 눈앞의 현상보다는 많은 상념에 집중될 정도로 이질적인 풍경을 만났다.



“YTN도 왔네? 저것들 와도 방송도 안 해.”

“사람 하나를 궁지로 몰아도 유분수지”

“언론은 다 거짓말이야”

“애미 애비도 없냐”

“빨갱이 놈들”


2시간 정도 조용히 보고 들었다. 그들 사이 이쪽에서 저쪽을 걸으며 관점의 차이가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집중했다. 최대한 현장에서의 팩트를 길어 올려 나중에 곱씹고 해석하기로 결정했다. 판단과 이해는 뒤로 미뤘다.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데 주력했다. 그런데 한 마디가 귓가를 때리면서 접고 돌아섰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정도껏 해 먹어야지. 세월호 때도 10억씩 줬다 더만.”


이 황망함 앞에서 관점의 차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100명 중 99명이 옳다고 하는 현상에서조차 오히려 1의 관점이 옳을 수도 있다고 보는 내 생각은 여기서도 대입되는가. 현상을 기계처럼 채워 넣던 머리가 한순간에 정지했다.


이 말이 저들 집회를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한 존재 언어였다. 이 의견은 그러니까 곧 저들 속에 내재된 또 하나의 다양성 중 하나였다. 저들 중 누군가는 동의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으나 확실한 건 그 안에 담긴 구성원의 시각 중 하나라는 점이었다.


팩트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따져볼 문제다. 그런데 현장에서 튀어나온 저급한 말이 그 공간에 머문 팩트라는 점은 틀림없었다.


사람의 목숨과 돈을 등치 시키는 사고란 무엇일까. 백번 양보해 세월호 유족이 10억 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게 곧 국가 시스템의 전복으로 무너진 생명을 치환할 수 있을까. 도대체 저들이 생각하는 국가란 무엇인가. 세금은 왜 내는 것이며 국가는 곧 일렬종대로 세워진 어떠한 기틀 안에서의 1번이란 말인가. 휘날리고 있는 태극기는 무엇을 뜻하나. 역사 자료로 접하던 3.1 운동과 8.15 광복절 사진 속 태극기가 이 태극기가 맞나.



군대 2년 채우고 그 안에서 1년은 GOP 근무한 경험이 있다. 20대 초반인 그때가 떠오르며 태극기가 이토록 달라 보이긴 처음이었다. 철책선에서 보던 그 태극기는 광장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 지하철 역 한구석에선 또 한바탕 소란이 났다. TBS 뉴스를 틀어주는 큰 TV 앞에서 태극기를 손에 쥔 이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TV 위에는 작은 종이로 ‘시민의 방송’이라고 적혀있었다.


“이거 다 조작이라니까. 시민의 방송은 무슨. 이렇게 조작들을 해대니까 젊은 애들이 선동되고 세뇌되는 거 아냐.”


선동과 세뇌라는 단어가 주는 뭔가 뱉어선 안 될 것 같은 그 적막함이 그들과 내 앞에 그어졌다. 국민 누구나 스마트폰이 있는 기록의 시대 안에서 누가 누구를 선동하고 세뇌한다는 것의 어려움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굵어졌다.


진짜 선동과 세뇌에 빠진 이들은 누구인가.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 앞에서 당분간 이 주제엔 입을 닫기로 했다. 그게 내가 보고 배운 태극기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며 한 줌의 품격이라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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