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파트 주민들의 결정을 보며
#아파트에 무인경비 시스템이 도입된다고 했다. 3년 전부터 나온 계획인데 이제는 그때가 됐다고 소문이 돌았다.
지난 2월 입주자 대표회의에서는 오는 6월에 무인경비 시스템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고 구체적인 얘기도 나왔다. 나를 포함한 경비원 283명의 일괄 해고도 의결됐다고 동료가 전해줬다.
무인경비 시스템이 도입되면 연간 48억 원이 절감된다고 한다. 경비원 일자리를 잃으면 재취업은 또 얼마나 걸릴까. 62세의 내 나이를 따져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날이 흐를수록 잠 못 이루는 밤도 늘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게 흘렀다. 아파트 주민들이 "경비원들의 생존권을 보호하라"라고 현수막을 곳곳에 붙이기 시작했다. 아예 몇몇 주민들은 '상생'이라고 적힌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주민들은 무인경비 시스템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의아하고 또 의아했지만 무척이나 고마웠다. 모른 척했지만 내심 '제발, 제발'이라고 외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마침내 며칠 전 입주자 대표회의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참석자 31명 중 23명이 무인경비 시스템 도입 백지화에 찬성했다. 정말로 극적이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나는 밝은 표정으로 "안건이 폐기되기까지 주민들 도움이 컸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하고 싶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는 이제 정말 이 아파트를 위해 더 능동적으로 일할 것이다.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무인경비 시스템이 대체할 수 없는 나와 인간만의 일을 아파트 주민을 위해 할 것이다.
이 일기 형식의 글은 최근 접한 경향신문기사("48억 더 들어도 경비원 내쫓지 마")를 보고 재구성한 것이다. 아침마다 신문 2부를 보는데 이 기사를 읽고선 무려 15분 이상을 생각에 잠겼다. 해당 아파트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 아파트다.
4차 산업 혁명과 로봇이 온갖 미디어를 뒤덮은 요즘이다. 그 가운데 접한 짧은 기사 한 토막은 그 어떤 두꺼운 책 이상의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글 쓰는 게 일이다 보니 취재는 필수다. 기사를 쓰든 칼럼을 쓰든 심지어 에세이를 쓰든 취재 없는 글이란 있을 수 없다. 직접 현장을 발로 뛰는 것을 포함해 모든 방식의 취재 활동이 글쓰기의 전제 조건이다. 아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다. 반대로 돌려보고 곱씹는 것도 무조건 해내야 하는 확인 작업이다.
그렇다 보니 늘 마지막으로 '본질은 무엇일까'란 물음이 나온다. 이건 취재 대상이나 취재원에게 내던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 내적 자기 질문으로 향할 때가 많다.
그 끝은 결국 '인간'으로 향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취재 활동에서 인간이 배제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스포츠도 사람이 하고 산업활동도 사람이 하며 사람이 기초 단위인 사회 현상들은 말할 것도 없다.
'저 사람은 왜?' '이 일에서 그 사람의 초점은?' '그 사람은 왜 그런 행동과 말을 했을까?'
전부 마침표는 사람에 찍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연히 사람을 탐구하고 공부하게 된다. 사람이란 뭔가 끊임없이 알아보기 위해 책을 읽는다. 주로 인문 사회 책을 보며 소설도 좋은 친구다. 아이러니하게도 취재 내내 사람을 만나고 통화하고 들으면서 부대꼈는데 또 다른 사람들이 남긴 텍스트를 접하는 거다.
앞서 재구성해 내놓은 '경비원 일기'는 그런 점에서 '요즘 사람'과 관련된 내 고민의 총체이자 답이다. 인간이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의 시작점은 분명하다. '나'라는 의식 구조 안에 '너'를 집어넣을 수 있을 때가 그때라고 난 생각한다.
요즘과 같이 면대면으로 만나는 일이 적고 어떨 때는 온종일 컴퓨터나 스마트폰만 있어도 모든 생활이 가능할 땐 더욱 그렇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명령을 입력하고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활동이 잦아질수록 '나'라는 주어가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곳엔 '너'가 내게 어떠한 커뮤니케이션을 해오는 경우가 없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가치는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재평가받아야 한다. '나'라는 주어 하나만 갖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부지기수다. 생활에 불편함을 느낄 일도 없다. 그래서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말은 과거와 다른 가치를 지닌다.
예전엔 단순히 상대방을 배려하라는 정도로 해석됐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요즘은 사람에 대한 근원적 탐구를 시작할 수 있는 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가 옳다면 결국 그 사회는 '나'뿐만 아니라 '너'로도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너'를 생각하면서 배려만 떠올릴 것이 아니라 '너' 또한 또 다른 '나'라는 걸 우리는 이 말에서도 배울 수 있다. 그 안에는 기계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반복하자면 무인경비 시스템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저 기사의 행간에서 아파트 주민들이 경비원이라는 '너'를 또 다른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48억 원이라는 큰돈을 '너'의 뒷순위로 뒀다는 것에 감동한 것이다.
페이스북에 이 기사를 공유하며 "48억 원 절감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짧게 썼다. 꽤 큰 호응을 받고 몇몇 페이스북 친구들은 자신의 타임라인에 이를 공유했다. '아직까진 살만한 것 같다'는 댓글도 달렸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너'를 인식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지 무의식 중에 알고 있는 것이다.
'너'를 인식하면서 우리는 감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