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번호 끝자리가 518이다. 학교 다닐 때 맨날 잤어도 5월 18일 역사는 열심히 들었다. 참 유치한 이유였다. '오일팔, 오일팔' 속삭이면서 이런 역사가 내 주민등록번호 일부라는 게 그때는 참 신기했다.
그런데 본적을 떼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으로 나온다. 맞다. 그분이 사는 곳이다. 어디에선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한다. 어디에선 그냥 전두환 씨라고 칭한다. 아무렴 상관없다. 그토록 커다란 역사와 후세의 평가 앞에서 해당 인물의 호칭쯤은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호칭은 때론 엄정하고 굳건할 수 있지만 때론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다.
내 동생은 '연희동 518'이라고 나를 놀리는데 참 오묘하면서도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비유다. 어쨌든 개인 서류 낼 일 있으면 거의 매번 그분 얘길 듣는다. 잘 살다가 쫄딱 망한 집안인데 본적이 그렇게 남아 있어 내가 겪어야 할 소동이다. 서류와 함께 "아니요" "몰라요" 등등 꼭 설명을 곁들여 왔다.
며칠 전 5.18 행사 보면서 솔직히 조금 울컥했다. 금지된 곡을 부르고 평범한 시민들을 초대하고 역사를 역사 그대로 추모하는 데 지난 9년을 포함해 너무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날 행사에서 1980년 5월 18일에 태어난 김소형 씨는 '슬픈 생일'이라는 제목으로 추모사를 겸해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김 씨의 아버지는 '바로 그날' 역사의 비극 앞에서 29세의 나이로 희생당했다. 37세의 김 씨는 아버지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 넘기고서도 여전히 아버지를 목 놓아 불렀다.
문재인 대통령은 눈시울이 붉어져 돌아서는 김 씨를 불러 포옹한 뒤 위로했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준비되지 않은 행동이었다며 연출이 아닌 진심이 담긴 행동이었음을 추후 전했다. 문 대통령은 김 씨를 안아준 뒤 "같이 아버지 묘소에 가자"라고 했으며 행사가 끝난 후 실제로 약속을 실천했다.
이날 오후가 되자 SNS와 각종 인터넷 기사 댓글이 폭증했다. 역사를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을 넘어 치유가 됐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숭고히 여겨 희생을 기리고 슬픔을 나누는 데엔 좌우 정치 이념이 낄 틈이 없음을 모두가 저마다의 언어로 표출했다. 각자의 말로 기쁨을 표했다.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 평범한 시민들에겐 아무 말 없이 잠시 안아주는 것이 필요했음을 이날의 행사가 증명했다. 무엇을 해결해 주길 바라기에 앞서 그저 귀를 열고 들어주고 작게나마 공감해 주는 게 시민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라고 하기에 앞서 "그렇구나, 힘들구나"하고 들어주는 따스한 행위 혹은 그저 조용히 안아주는 게 지난겨울 광장에서 추위에 떨었던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겐 필요했다.
5·18 행사에 나온 포옹은 비단 문재인 대통령 개인이 김소형 씨 개인을 안아준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울타리가 시민에게 '이 울타리 아직 튼튼하다'고 던지는 메시지로 확대 가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을 기점으로 매일 아침 청와대 발 '인사 뉴스'가 나오는데 하루하루가 신선하다는 평가다. 대한민국 고작 대통령 하나 바꿔 놓고 자꾸만 '찌질한' 시민 하나 들었다 놨다 한다. 낭중지추라는 말이 얼마 전 화제가 됐는데 한문 잘 모르는 나도 요즘은 '외유내강'과 '사필귀정'이 떠오른다.
모든 이슈를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이 빨아들이는 요즘인데 그럴수록 시민에서 촉발된 권력을 향한 비판의 촉수는 더욱 날카로워질 전망이다.
광장의 엄정함에서 시민 의식은 한 단계 높아졌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인 응집력으로 실체화됐다.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만난다'는 말이 과거 언젠간 치욕적인 표현이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