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 선수가 17일 제72회 US여자오픈 골프대회에서 우승했다. 마지막 날 4라운드에서 버디 6개와 보기 1개를 더해 최종 합계 11언더파 277타로 정상에 올랐다. 내 기억으로는 작년 11월에 박성현 선수가 미국 진출을 선언했다. 이번에 14번째 대회 출전만의 우승이라고 하는데 굉장히 잘한 일이다.
그와 별개로 재차 눈에 띄는 게 한국 선수들의 선전이다. 이 대회 상위 10명 중 8명이 한국 선수다. 박성현 선수를 시작으로 2위 최혜진, 공동 3위 허미정 유소연, 공동 5위 이정은, 공동 8위 김세영 이미림 양희영 선수가 톱 10안에 이름을 올렸다. 게다가 US여자오픈은 1998년 박세리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우리 여자 골프계에선 이른바 '세리 키즈'라고 불리는 선수들이 탄생한 추억의 대회다.
여기서 하나 재밌는 건 이 대회가 뉴저지주 베드민스턴에 있는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열렸단 거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를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소유 골프클럽에서 치른 대회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사흘 연속 경기장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빨간색 모자가 있었다.
그런데 미국 선수 중 마리나 알렉스가 4언더파 284타로 공동 11위에 오른 것이 이번 대회 최고 성적이다. 안 그래도 외신에서 트럼프의 '입'을 주목했는데 결과적으로 지금 그의 심정이 궁금하다.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얘기까지 나오는데 자기 앞마당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으며 심지어 공동 5위도 중국인 펑산산 선수가 했다.
'트럼프 혹사' 재미를 뒤로하고 생각할 거리를 찾아보면서 나는 또다시 왜 우리 여자 골프가 강한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간략하게 역사부터 훑어보자면 예전에 구옥희라는 원조 선수가 일본에서 활동하며 우승한 바 있다. 이후 고우순 선수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골프 열풍의 시초로는 1998년 박세리 선수로 꼽는 게 옳다.
원조는 구옥희지만 지금과 같은 기틀의 초석이 된 건 아무래도 세리키즈를 낳은 박세리 선수의 역할이 컸다. 이후 슈퍼땅콩 김미현과 외모에 실력이 가려졌던 박지은 선수가 있었고 박희정 선수도 있었다. 김주연과 장정 같은 선수들도 빠질 수 없다. 그다음이 박인비, 신지애, 최나연, 유소연 등 요즘 선수들이다.
흥미로운 건 외신에서도 이제는 왜 한국 여자 골프가 강한가? 하는 질문을 단골 주제로 내놓는다는 거다. 실제로 한국 선수들이 외신한테서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어디서 주워듣기론 박인비 선수 할머니가 한국엔 바느질과 젓가락질 문화 같은 섬세한 손가락 움직임이 많아서 그렇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 요즘은 좀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한국 여자 골프의 국가대표 시스템이 잘 돼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래도 역시 '골프 대디'가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들린다. 박세리 선수만 보더라도 예전에 엄청난 훈련을 시킨 게 그의 아버지였다. 이번에 우승한 박성현 선수도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으며 박인비 선수나 다른 선수들도 가족의 뒷바라지가 상승세의 원동력으로 꼽힌다. 다만 당장의 성적을 만끽하는 도중에도 이게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혹은 이게 제일 나은 방법인가? 하는 건 조금 생각해 볼 문제라고 본다.
최근 몇몇 골프 대디들이 세금을 제때 내지 않거나 여기저기서 갑질 논란을 일으켜서 문제가 됐다. 하인리히 법칙이라고 어떤 큰 위험이 나오기 전에는 작은 위험들이 불거지기 마련이다. 요즘 이런 일들이 불거지는 걸 볼 때마다 이러다 뭔가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우려한다. 실제로 미국을 포함한 여타 국가에서 골프 대디 등 한국 부모의 뒷바라지가 극성스럽다면서 시기 어린 불만을 나타낸 경우도 있었다.
가만히 돌아보면 종목만 바뀐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 우리가 복싱 등의 종목에서 하던 행위를 그대로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못 살던 시절 온 가족이 운동하는 자녀의 성공을 바라던 세태 말이다. 그러다 올림픽 메달이라도 하나 따면 바로 당분간은 신분 상승이 됐던 게 과거다. "엄마, 나 금메달 먹었어"라는 수사가 지금은 "엄마 나 LPGA에서 우승했어"가 된 건 아닐까. 그들의 성공담 소재가 복싱에서 골프로 바뀌었다고 보는 건데 그나마 골프는 돈이 많이 들어가고 진입장벽이 다른 종목보다 높은 편이다.
실제로 골프는 그 진입장벽 때문에 프로 선수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프로타이틀만 달면 여기저기 강습할 곳이 많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최소한 예전 못 살던 시절에 다른 운동을 하다가 성공하지 못해서 굶어 죽고 하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여자 선수들은 외모 덕을 보는 선수들도 많고 그와 반대로 잘하는데도 외모가 뒷받침되지 않아서 스폰서가 붙지 않는 등의 일도 있다. 시장의 성격이 여자 골프에서도 엿보이는 셈이다.
한국 스포츠의 '성공 신화' 혹은 '한방 주의'가 이제는 과거 다른 종목에서 골프로 옮겨왔고 그 때문에 온 가족이 골프 선수 하나 뒷바라지에 매달리는 현상이 생겼다고 본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비교적 여유가 있는 집에서 가르칠 수 있는 종목으로 골프가 됐다는 전환 논리를 생각해 보는 거다. 성공하면 곧바로 대박 신화를 쓰는 한 편의 스포츠 드라마와 같다.
다만 영원한 건 없다. 그래서 최근 몇몇 골프 선수 부모들의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언젠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고 본다. 골프 인기나 시장이 계속 호황일 것이란 보장도 없다. 지금처럼 온 가족이 매달려 골프 선수 하나를 키워내는 구조도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힐 것이란 게 내 예측이다. 박세리 선수 성공 이후 오늘날 20년 가까이 가족들의 가내수공업과 같은 육성 시스템으로 성과를 내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건 그 당시 세리키즈들이 막 성장해 선수생활을 하고 있기에 20년이나 이어진 것처럼 보이는 허수일 수 있다. 언젠간 한국 여자 골프가 예전 같지 않을 때를 대비해 이러한 선수 육성 시스템이나 과거와 같은 행보가 최선인가 하는 부분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잠재 위험이란 건 저 밑에서 모르는 사이에 싹튼다. 여기저기서 이상 신호가 조금씩 들려올 때 그걸 감지하고 미리 개선할 점은 없는지 따져보는 것도 건강한 비판과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골프 성적이 골프계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형편이 되어서 자식을 골프 선수로 키우기 위해 생업도 던지고 따라가겠다는 건 사실 개인의 선택이다. 밖에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게 그릇된 자식 사랑이나 지나친 가족중심주의로 흐를 경우 나중에 된서리를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인식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