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저 녀석을 만난 건 포항이었죠. 난 새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 녀석이 들어왔어요. 아무런 말이 없이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내 앞에서 한참이나 얼굴을 들이밀었죠.
저 녀석 말투가 곱상하고 나지막한 게 척 봐도 포항이나 인근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서울에서 온 샌님이구나 하고 순식간에 생각했죠.
그때 전 조금 욕심이 났어요. 아 다들 그놈의 서울 서울 하는데 나도 거기 가서 한번 살아보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기다가 내 평생 이런저런 녀석들 많이 봤지만 서울에서 온 사람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결국 전 애교를 부리기로 했죠. 지금 당장 저 녀석과 살려면 일단은 내가 가진 최대한의 무기를 선보여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판단한 거예요. 지금이 아니면 저런 녀석이 언제 다시 포항에 나타날지 몰랐으니까요.
그때부터 저는 두 손을 위로 들어 제 작은 몸집을 최대한 커 보이게 하려 했죠. 뒤로 쓰러지는 깜찍함도 보여줬어요.
역시나 저 녀석이 얼굴에 웃음을 머금으면서 넘어오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때 전 됐다, 이제는 됐다, 나도 서울에 갈 수 있겠다, 뭐 그런 확신을 했죠.
그렇게 이 집에 오게 됐어요. 제 이름은 빵돌이가 됐고요. 창문을 쳐다보면 저 멀리 남산타워도 보이고 코앞에는 김포공항이 있죠.
가끔 비행기 소리가 나지만 문제없어요. 언젠간 저 녀석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보는 게 소원이니까요. 꼭 그렇게 만들고 말 거예요.
그동안 저는 저 녀석 차를 타고 사당동, 일산, 홍대, 합정, 잠실, 여의도, 역삼동 등등 사람 좀 있다는 곳을 많이 가봤죠. 한강 공원 정도는 이제 우스워요. 근처에 있는 아라뱃길은 그야말로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 곳이죠.
얼마 전엔 을왕리해수욕장에 가서 모래사장을 완전 내 세상으로 만들었어요. 그렇지만 바닷물에는 들어가지 않았죠.
생각해보세요. 전 포항에서 왔다고요. 깨끗한 동해를 놔두고 제가 서해에서 몸을 담글 이유는 없는 거죠.
저 녀석이 그걸 모르고 제가 신이 날 줄 알았던 모양인데 전 단호히 그 물엔 몸을 넣지 않았죠. 다행히 저 녀석이 친구랑 얘기하는 걸 보니 뒤늦게나마 그걸 깨달은 모양이더라고요. 가끔 저렇게 답답할 때가 있다니까요.
그래도 저 녀석이 생긴 것과는 다르게 마음이 약해요. 항상 제게 최고급 사료와 무척 맛있는 간식을 꾸준히 주죠. 특히 파프리카를 사 와서 줄 때가 있는 데 정말 맛있어서 자지러질 것 같아요.
저 녀석이 자기도 비싸서 자주 못 사 먹는 파프리카를 줄 때 잠깐은 슬프지만 그냥 모른 척하고 해치우죠.
대신에 저 녀석이 초코파이를 먹던가 라면 따위를 씹을 때 저도 달라는 포즈를 취하며 "네가 지금 먹고 있는 것도 충분히 내가 먹고 싶어 할 정도로 맛있는 거야"라고 세뇌하죠.
정말로 초코파이나 라면이 먹고 싶으냐 고요? 설마요. 지구 반 바퀴를 뛰어야 없어진다는 마시멜로와 기름에 튀겨 트랜스지방 덩어리인 그런 것들을 전 싫어한다고요. 다 그냥 보여주기인 셈이죠.
어쨌든 저는 이 집에 온 이후로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산책했어요. 저 녀석 여동생이 제 보모로 일하기도 했죠. 보모는 제가 아무 데나 싸는 똥과 오줌을 열심히 치우고 저 녀석에게 돈을 받았어요.
원래 저 녀석이 계속 치우고 다녔다면 8개월까지는 계속 그럴 생각이었지만 군소리 않고 치우는 보모가 불쌍하기도 하고 측은해 보여서 예의상 7개월부터 화장실에 가서 조금씩 가려줬죠.
물론 처음부터 완벽하게 가려준 건 아니에요. 적당히 두어 번 화장실에 가서 응가를 하면 한 번 정도는 거실 한가운데에 오줌을 갈겨줬죠.
그랬더니 이제는 화장실에서 응가나 쉬야를 했을 때 치킨이 붙은 껌을 줘요. 완벽한 훈련의 효과죠.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되죠. '밀당'은 계속돼야 해요.
가끔 화장실에서 정상적으로 볼일을 보고 왔는데도 껌을 주지 않으면 전 바로 저 녀석의 안방으로 쳐들어가 바닥에 일을 저질러버리죠. 그럼 저 녀석이 뭔가를 깨닫고는 다음부터 다시 치킨껌을 잘 줘요. 완벽하게 훈련한 결과라니까요.
이런 모든 결과물이 지금의 제 모습이에요. 이제 막 태어난 지 1년 7개월을 지나고 있는 저는 이 동네 집에서 크는 강아지 중에 두 번째로 크죠.
첫 번째는 누구냐고요? 말도 마세요. 시골 마당에서나 살 것 같은 놈이 버젓이 옆 동네 집안에서 크고 있더라고요. 완전히 사기죠. 그래서 전 '현실적인 범위에서는 내가 가장 키가 크다'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하루는 저 녀석이 저를 애견 수영장에 데려가서는 멀리서 어떤 아이를 보며 "와, 빵돌이보다 크네"라고 하는 거예요. 정말로 웃겼죠. 속으로 마구 코웃음을 쳤어요. 저는 제가 더 크다는 걸 보자마자 알았거든요.
그래서 얼른 그 아이 옆으로 가 저 녀석에게 내 머리가 더 위에 있다고 눈으로 보여줬죠. 그때 놀라던 저 녀석의 눈빛을 잊을 수 없어요. 아직도 저를 정확히 보지 못하고 있다니까요.
그래도 전 저 녀석과 사는 것에 만족하고 있어요. 플레이스테이션을 할 때와 노트북 앞에서 뭔가를 두들길 때만 아니면 언제든 건드려도 되거든요. 가만 보니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해요.
얘기하고 보니깐 뭐 막 슬프고 그렇진 않은데 안타까워 보이긴 하네요. 예전엔 달리기도 엄청나게 빨랐고 축구랑 농구를 그렇게 잘했다고 친구랑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제가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이미 저보다 훨씬 느리다는 게 입증됐으니까요.
저 녀석은 싸움도 싫어해요. 제가 조금만 강하게 나가면 그냥 양보하고 딴짓을 해버리죠.
가장 최근엔 잠자리 때문에 많이 다퉜어요. 저 녀석이 침대에서 혼자 잘 때 제가 자기 발밑에 있으면 괴로운지 저를 자꾸 바닥에 내려놓더라고요.
그렇지만 저는 아무 바닥에서나 막자고 그러는 시골 쥐가 아니죠.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가요. 전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계속 침대에 올라갔고 결국은 졸린 놈이 눈 감고 자 버리면서 제가 이겼죠. 그 이후로 침대의 3분의 1은 정정당당한 제 몫이 됐어요.
그런데 이렇게 저한테 약하던 녀석이 의외의 모습을 보인 적도 있어요.
예전에 저 녀석이 쓴 글이 무슨 파급력을 일으켰는지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오더라고요. 전화기로 "그렇게 칼럼 쓰시면 고소할 겁니다"라는 변호사의 협박이 쩌렁쩌렁 들렸는데도 저 녀석 표정 변화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오히려 저 녀석이 "고소할 거면 저한테 전화하지 마시고 법원에 전화하세요"라며 초코파이 가장자리의 마시멜로를 씹었는데 "와, 니 쥑있다, 마. 가오 장난 아니래이"라고 저도 모르게 예전 사투리가 튀어나올 뻔했죠.
그래도 저 녀석과 살면서 가장 좋은 건 제 발바닥의 경험을 존중해 준다는 거예요. 저 녀석이 노는 거 좋아하고 한량처럼 살지만 책이랑 신문은 꽤 보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가끔 그럴싸한 말을 해요.
언젠가 저한테 와서는 제가 발로 뛰어 경험한 것들과 제 발바닥에 있는 굳은살이 가진 의미를 인정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제 코가 맡은 후각의 기억력도 믿는다고 하고요.
저 녀석은 제가 자기 말을 다 알아듣는지 모르는지 확신 없이 말했겠지만 전 분명 저 녀석의 말을 알아듣죠.
저 녀석은 언젠간 술이 떡이 돼 들어와서는 연신 제 발바닥을 만지며 그 말을 또 하더라고요.
그날부터 함께 산책하러 나가면 저 녀석은 제가 무언가 냄새를 맡을 때 조급해하지 않아요. 제가 모든 것들의 냄새를 코로 맡아 머리에 넣을 때까지 기다려주죠.
주변에서 저 녀석의 귀찮아하는 성격을 알고선 산책할 때 제게 신발을 신기라고 해도 제 발바닥 느낌을 지켜줘야 한다면서 그런 소리를 단번에 잠 재우죠.
그래서 저는 산책 후 저 녀석이 제 발을 씻겨줄 때 요령 피우지 않고 발을 하나하나씩 들어주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어때요. 이 정도면 저랑 저 녀석이랑 그럭저럭 좀 살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