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허상을 보기 시작한 건 3주 전이었다. 하루는 꿈자리가 뒤숭숭해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때부터 일이 터졌다.
한창 원하던 대학교와 과에 합격해 들떠있던 시기라 답답한 꿈자리가 의아했다. 그날 밤 꿈에서 나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봤다.
3달 전에 돌아가셔서 나는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마냥 슬퍼 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인생을 가르는 대학 입학시험을 코앞에 두고 하루하루가 소중한 시기였다.
이 때문에 할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 게 무의식에서 번져 꿈에 나타난 것으로 그날의 꿈을 해석했다.
꿈에서 할아버지는 내게 "강우야, 사랑하는 우리 3대 독자 강우야"라고만 말씀하셨다. 흰 저고리를 입으시고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 말만 하셨다. 다른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장면만 생생했다.
돌아가신 분이 꿈자리에 나타나면 뭔가 불편한 것이 있는 거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이 사실을 얘기할까 했다. 하지만 아침상에 앉는 순간부터 나는 소스라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침상과 함께 마주한 엄마 곁에 처음 보는 할머니가 계셨다.
"어? 할머니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장난치지 말고 육개장 막 끓인 거니까 떠봐."
"무슨 장난? 아는 할머니 모셔온 거 아니야?"
"아침부터 이상한 장난 치지 마. 엄마 어제 늦게 퇴근해서 피곤해. 이제 술 그만 먹고 다니고 대학 입학식 전까지 네 용돈은 오늘부터 직접 벌어. 너도 이제 스무 살이야."
이런 식의 대화가 그날 아침 오갔다. 내가 본 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난 공포감에 질렸다. 입시 긴장감이 단번에 풀리면서 갑자기 내가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사회복지관에서 근무하는 엄마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 할머니를 모셔온 거로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미친 게 아니었다. 엄마의 할머니 손님이 방문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였다.
"야, 나와 PC방 가자."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마쳤는데 곧장 진우한테 메시지가 왔다. 어제도 그제도 간 PC방에 안 갈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가지 말았어야 했다.
매번 만나던 편의점 앞에서 진우를 봤을 때 난 어릴 때 용돈 모아 샀던 무선 자동차가 지나가던 덤프트럭에 깔렸을 때보다 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허리가 꼿꼿한 할아버지가 진우 옆에 있었다. 아침에 만났던 할머니의 얼굴이 등 뒤에 꽂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나는 "아는 분이시니?" 따위의 말을 진우에게 하지 않았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 또한 모두 내 눈엔 커플로 보였다.
남자에겐 할아버지가 따라다녔고 여자에겐 할머니가 마찬가지로 걸어 다녔다. 그날 게임은 망쳤고 "너 오늘 왜 그렇게 못해?"라는 핀잔만 받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저녁에 아빠가 퇴근하고 "다녀오셨어요"란 말을 함과 동시에 또 다른 할아버지를 보면서 그때 나는 내가 미친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날부터 나는 사람 한 명과 그 옆에 붙어있는 나만 보이는 노인에 대해 포기했다.
모든 현상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사실도 알아냈다. 사람들 전부 옆에 있는 노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 옆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으며 진우 옆에 꼭 붙어 다니는 할아버지도 진우와 똑 닮았다. '아마도 그 사람 미래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게 믿을 수 없었지만 더 미치지 않으려면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했다.
이런 내 결론이 확실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매우 끔찍하고도 처절하게 난 내 가설을 피부로 느꼈다.
하루는 지하철 난간에 서 있는데 옆에 있는 젊은 여자가 이상했다. 분명 할머니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그 젊은 여자와 똑같이 생긴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 의아해 그 젊은 여자 둘이 똑같은 검은색 원피스에 굽이 낮은 흰색 운동화를 신은 쌍둥이가 아닐까 추측했다.
그런데 열차가 들어오는 순간 젊은 여자는 지하철 선로로 뛰어내렸다. 내가 본 그 여자와 똑같이 생긴 또 다른 여자는 그와 동시에 사라졌다. 허상이었던 것이다. 최초 목격자가 된 나는 경찰에게 수박 겉핥기 식의 진술을 했다.
"아무런 이상함도 없었어요. 솔직히 정말 예뻐서 흘끗흘끗 쳐다봤는데 갑자기 뛰어내리는 거예요. 저도 놀랐어요."
난 내가 확인한 가설과 소름 돋는 증명을 쏙 빼고 정신없이 경찰에게 주절거렸다.
증명된 추측이 확인사살을 일으키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친구들과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 기념 여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만난 날이었다. 그날 내 예측은 더욱 단단해졌다.
모임에 참석한 친구 중 현우만 할아버지가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이 옆에 있었다. 난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현우는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오토바이 사고로 즉사했다.
현우는 선생님 몰래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를 대학 입학시험 이후 한창 호기롭게 즐기던 중이었는데 맞은편에서 중앙선을 넘어 달려오던 승합차를 피할 순 없었다.
더 최악이었던 건 현우가 자기 오토바이 같이 타고 집에 가자고 했는데 내가 거절한 거였다. 현우 옆에 있는 그 형체를 보고도 그 오토바이를 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현우를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난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고 그렇게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그저 '제발 집에까지는 무사히 가라'라고 속으로 빌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내게 올 수도 있었던 불행을 피했다는 것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나를 괴롭혔다.
현우 옆에 할아버지가 아닌 현우와 똑같은 모습이 있었을 때 나는 "넌 당장 내일 죽는다면 뭘 갖고 싶어?"라고 물었다. 현우는 그때 "조던6 한정판을 갖고 싶지"라고 했다.
신발 모으기가 취미였던 현우를 위해 나는 그 신발을 구해 장례식장에 가져갔다. 내가 너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으면 믿지 않았겠지만 말이라도 해야 했다는 후회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내가 함께 오토바이를 탔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상대의 미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죽음까지 예측할 수 있다는 내 슬픔이 다른 모든 슬픔을 압도했다.
당연히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이런 비극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계획은커녕 엄두조차 못 냈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이들 앞에서 내 양심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고심했다. 불행한 미래를 본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불현듯 물꼬가 내게 왔다. 정말로 현우의 오토바이를 탔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게 시작점이었다. 그때 난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내 모습을 진지하게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샤워하고 세수를 해도 늘 이런 비현실적인 일이 왜 나한테 일어났는지 골몰하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한 번도 내 옆에 누가 있는지 따져보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보다 키가 조금 작은할아버지를 거울에서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또 길거리에서 본 할아버지를 그저 겹쳐서 봤던 것 같기도 했다. 제정신이 아닌 나는 분명 자세히 내 옆을 본 적이 없었다.
내 방에서 나와 화장실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방문을 열면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먼 훗날 내 모습을 보기에 앞서 원하던 내 외모가 아니면 어떨까 상상했다.
심지어 '그 젊은 여자나 현우처럼 지금의 내 모습이 옆에 있으면 어떡하지'라고 최악의 수도 따져봤다. 불길함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렇게 되면 할 일은 하나였다. 엄마와 아빠가 "명문대 다니는 아들 생겼어"라며 친척들에게 자랑한 입학 예정 대학교 강의실에 무작정 가서 앉아보기라도 하겠다고 다짐했다. 입시를 위해 잠도 못 자고 공부했던 그 시절이 마구 떠올랐다.
그렇게 모든 불안함에 대비한 뒤 화장실 문을 열었다.
"끼익."
다시 심장이 빨리 뛰었다. 쉽게 거울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30초를 30분처럼 보냈다.
겨우 용기를 내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봤다. 놀라움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딱딱한 돌덩이로 변해 날아오는 것 같았다. 난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거울 속 내 옆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돌덩이는 계속 내 가슴팍을 때렸다. 그때 안방에서 엄마의 통화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형님, 제사 준비는 무슨요. 전 아직도 강우 사진 보면 서 있을 수가 없어요. 그냥 애 아빠랑 보낸 곳이나 다녀와야죠. 그러게요. 2년이 다 됐는데 어디 그런가요. 20년이 흐르면 뭐가 달라질까요. 그때 졸업여행 계획 세운다고 어쩐다 했을 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엊그제 현우 엄마랑 현우가 또 찾아와서는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현우가 그날 오토바이 뒤에 강우 태우지만 않았어도 어쩌고 하는데 용서가 되다가도 갑갑해서 괜찮다고만 하고 돌려보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