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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Feb 11. 2018

김일성 가면을 보고 싶은 사람들

'응원단'이랍시고 오와 열을 맞춰 온 저들 한 명 한 명이 애잔하지 않은가. 북한에 태어났다는 이유 딱 그거 하나다. 그 때문에 2018년이나 된 올림픽에 동원돼 마치 70년대처럼 촌스러운 차림으로 체제 선전의 도구가 됐다. 안타깝지 않은가.


가정해보자. 자기들보다 훨씬 못산다고 배운 남한에 어느 날 갑자기 가라고 명령이 왔다. 자기들 딴에는 가장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고 멋지게 각 잡고 우리가 이렇게 기품 있고 고급스럽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남한에 왔다. 그런데 이게 영 분위기가 이상하다. 서울도 아니고 심지어 북한에도 존재하는 강원도인데 생각 이상으로 휘황찬란하다. 게다가 모두가 자유롭게 마구마구 행동한다. 여기저기선 대통령이랑 정부 욕도 한다. 옷차림은 오히려 너무들 편안하다. 입고 싶은 대로 입어서 제각각이다. 남이 뭘 입고 어떻게 다니는지 크게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 일부 취재진은 화장실에 있는 모습까지 찍어 나른다. 전 세계가 마치 콜럼버스 시절 인디언 보듯 신기하게 바라본다. 그래도 놀랍거나 예상하지 못했다는 식의 티를 내선 안 된다.


이런 시선 속에 놓여 있을 저 개인들이 딱하지 않은가. 그나마 저들은 체제 선전이라도 대표해 나름대로 다채로운 경험을 하는 이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저 위에 피해자를 생각하면 아련하지 않은가. 상상이 안 되면 북한 사람들은 모두 이마에 뿔 달고 다니는 줄 알았다는 반공 교육 시절 얘기를 들어보자.


이게 더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 첫째 이유다. 통일이 경제나 사회 모두 이득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한반도 전체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밑거름이라는 건 종편에서도 요즘 강조하는 메시지다. 이 모든 걸 뒤로 하고 한 줌 앞의 이익만 챙기자고 지엽적인 것에 쏠려 대화를 포기하는 건 다음 세대를 배척한 무책임한 행동 아닌가.


북한 응원단이 쓴 가면을 두고 '김일성 가면'이라는 문제 제기가 일었다. 그러자 사실이 아니라는 정부 확인이 나왔다. 상식적으로 '최고 존엄' 운운하는 사회에서 그들 존엄의 얼굴을 저렇게 활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해명과 설명이 납득이 안 된다면 왜 그게 그렇지 않으냐고 떼쓰기에 앞서 김일성 가면으로 추정되는 더 확실한 논리 제시를 하는 게 타당한 것 아닌가.


하도 말이 말을 낳아서 이리 튀고 저리 튀어 진짜 저 가면이 김일성 가면이었으면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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