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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Feb 15. 2019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물음에

좋은 기회를 마다했다. 꾸역꾸역 스포츠 기자를 고집했다. 겨우 한 곳에 안착했다. 출근 한 달이 막 안 됐을 때 바로 위 선배가 호출했다. 1시간 뒤에 기사 쓴 거 뽑아서 오라는 지시였다. 드디어 나도 뭔가를 쓰는구나 싶었다. 지긋지긋한 제목 바꾸기 연습이나 리라이팅 따위 그만할 생각에 신났다. 곧장 키보드 두들겨 회의실로 갔다. 그랬더니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으니까 짐 싸서 집에 가라는 돌연사할 법한 얘기가 날아왔다. 인쇄해 간 원고는 빨간 줄로 난도질이 됐다. 선배가 펜으로 조금만 더 긁으면 종이가 뚫릴 것 같았다. 말이 하나도 안 들렸다. 뭣 같았다. 열 받았다. 집에 돈만 있었어도 그 길로 박차고 나왔을 텐데 이놈의 연희동 몰락 구석탱이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푼돈이라도 벌어야 했다.


그날부터 퇴근하면 필사하고 블로그에 습작했다. 내세울 것도 없으니 이제라도 해보자는 승부욕이 생겼다. 1년쯤 그렇게 살다 보니 파워블로거가 됐다. 자기네 회사에 합류해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는 이직 제의도 왔다. 고심 끝에 응했고 ‘프리롤’로 일했다. 경기 기사 제쳐두스포츠사회·스포츠경제·스포츠시사 같이 쓰고 싶은 주제로 기획하고 생산했다. 연구단체에서도 오라고 해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분들과 함께 책도 썼다. 짧게나마 라디오 고정 출연도 경험했다. 팟캐스트도 했다. 그렇게 달리다가 가끔 정신 차려보면 월급날은 서점에서 책을 사고 매일 밤 인터넷으론 논문을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될 것 같던 1막이 어느 날 갑자기 끝났다. 쉼표 이후 2막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운 좋게 시작돼 나아다.


어쩌다 네가 이쪽에 있어. 그렇게 사라지더니 여기서 만나는구나. 너는 계속일 줄 알았는데.


이런 소리를 듣곤 한다.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그때를 돌아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다.


누구나 삶에 원칙이란 게 있을 거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홀로 세운 원칙 하나만 지키고 있다. 벅찰 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지금은 긍정적이다. 오히려 감사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 그만 물어보시라.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다. 달라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에 적은 ‘1막’이 자랑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랑 맞다. 내숭 떨며 거짓말할 생각 없다. 자랑할 것도 별로 없고 잘난 것도 원체 없어 그때처럼 하나만 보고 달렸던 시절이 스스로 떳떳하다. 그 시류와 지금 사이에서 최소한 버티는 법은 배웠다. 버틴다는 건 곧 뒷걸음치지 않는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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