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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Mar 01. 2019

'달'을 본 날

달을 본 첫날은 고등학교 신입생 때였다. 나는 할머니와 아파트 복도에서 하늘을 봤다. 마침 복도식으로 지어진 아파트 끝 세대가 우리 집이었다. 경제성을 앞세운 현대 서민 거처 끄트머리에서 나름의 호사가 주어진 셈이었다. 복도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할머니와 두런두런 대화하며 달을 응시했다. 뉴스에서 ‘개기일식’이라고 했던 날이었다. 달이 태양을 삼킨다는 그 모습을 보겠다고 서늘한 날 점퍼 차림으로 뚫어져라 맨눈을 부릅떴다.


졸음이 쏟아진 탓에 뚜렷이 그 장면을 보진 못했다. 다만 그 시간이 만들어준 잔상과 기억만은 명료했다. 그때가 사춘기인지도 모르고 지나간 그 시절 나는 풀어놓을 수 없는 말들을 할머니 앞에서 해제했다. 달이 태양을 가린다는 그 순간에 내 사춘기 시절 속마음이 시나브로 움터 겉마음을 가려버린 나름의 개기일식이었다.


달을 두 번째 본 날은 군대 훈련소 시절이었다. 훈련병 마지막 4주 차 야간 행군 도중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 사병 대열은 지친 몸뚱이를 10분간 깔아 내릴 기회를 얻었다. 군장을 바닥에 내리꽂고 그 위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그마저도 총기는 가슴에 품으라는 불호령과 함께 머리를 옥죈 헬멧은 옆구리에 낀 채였다. 하늘은 통속적이게도 칠흑 같이 어두웠다. 그 가운데 달은 단연 영롱했고 한없이 밝았다.


마침 보급받은 빵이 꿀맛이었는데 그 또한 달에 집중한 시선에 비하면 찰나였다. 군인에게 가장 간절한 먹는 행위마저 달은 아름다움으로 집어삼켰다. 그때 달은 두런두런 할머니와 대화했을 때처럼 내게 말을 걸듯 생각을 몰고 왔다. 지금 내 친구들은 뭘 하고 있을까. 내 가족은 내 빈자리를 느끼고 있을까. 나는 그럭저럭 잘살고 있는데 누군가는 나를 걱정하고 있진 않을까. 입대 전 본 그 헐렁헐렁하던 복학생 형들은 전부 이런 고난을 거쳐 저 까마득한 전역까지 관통한 위대한 인물이었던가.


모든 것이 위대해 보였다. 그리고 달 아래 지친 수많은 사병 대열에서 나 홀로 있는 것 같은 적막함이 싹텄다. 그 순간 군장 위 바로 그 지점은 어떤 독서실보다 사색하기 좋은 장소였다. 비로소 달은 어두운 밤하늘에서 생각의 길을 비추는 명확한 책상 스탠드로 기능했다. 나는 달을 보았고 달은 새초롬히 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달에 능동적으로 관념을 이입했고 달은 수동적으로 제 역할만 했다.


달을 본 세 번째 날은 작년 여름 병원에 있을 때였다. 막 무릎 수술을 마치고 나흘 밤을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나온 여름밤이었다. 휠체어에 앉아 저 멀리 횡단보도 너머 달을 보며 군침이 돌았다. 건너편 주스 집에 주스가 마시고 싶었다. 피우지 못했던 전자 담배가 간절했다. 사람과 대화가 필요했고 그러면서도 혼자만의 사색이 간절했다.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기에는 그 모든 것이 사치이자 인생의 온기가 사라진 시간으로 남았으므로 그것에서의 탈출과 금단 현상이 달빛에서 솟구쳤다. 밝게 빛나는 달빛 아래서 나는 혼자 처량하기도 했고 숙연하기도 했으며 꽤 희망적이기도 했다.


첫 번째 달이나 두 번째 달과 달리 10대와 20대를 지나 마침 30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세상에서 묻은 때들이 땟국물처럼 달빛에 씻기길 바랐다. 마침 할머니는 그 첫 번째 달을 본 아파트에서 몸이 불편해져 우리가 나눈 달을 잊었다. 두 번째 달을 본 ‘군장 휴식’ 지점은 어느 야산으로써 돌아갈 수도 어디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지구 한쪽 편 머릿속 상념으로만 존재했다. 그 모든 것이 세 번째 달을 더욱 현실의 구석을 비추는 곳으로 인지하게끔 구별하고 추켜세웠다.


달을 본 것이 아니라 달을 통한 나를 돌아보게 되어서 결국은 첫 번째 또는 두 번째와 달리 달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우연히 10대와 20대에 이어 30대에 약속된 것처럼 본 달이 벌써 저만큼 달랐다. 내가 달을 보는 것 같은 그 느낌에서 벌써 저만치 떨어져 달이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달은 이제 능동적이었고 나는 이제 수동적이었다. 그렇다면 부끄럽고 가리고 싶은 구석까지 달은 비추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생각 파편들이 얽히고설켜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결국 내가 본 달은 그때의 ‘가만한’ 달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때의 달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조심스러움이 땅에서부터 휠체어로 조여왔고 퇴원 후에도 유효했다. 그날 이후론 아직 달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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