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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Mar 25. 2019

'솔직히 쓰라'는 그 무거운 말

보도문을 제외하면 어떤 글을 쓰더라도 그 끝은 이름이 된다. 어떤 제목으로 글이 시작하든 마지막은 글쓴이로 방점이 찍힌다. 시작은 자유롭되 끝은 정해져 있다. 이것은 하나의 벗어날 수 없는 프레임이다. 어떨 때는 덫이다. 그래서 작가라는 직위가 존재한다.


가명으로 쓰든 글쓴이를 드러내지 않은 글을 쓰든 시작점일 뿐이다. 결국 특정 누군가가 그 글을 썼다는 것은 변치 않는다. 글쓴이가 쓴 글은 빙빙 둘러 나아갔다가 다시 해당 글쓴이로 귀결한다. 던진 그물은 거두어지는 법이다. 날린 연은 지상으로 내려오기 마련이다. 생산되어 밖으로 나아간 글들은 결국 글쓴이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메시지'는 '메신저'에 귀속된다.


주장하는 글쓰기일수록 이러한 과정은 선명해진다. "메시지 대신 메신저를 공격한다"는 얘기가 부정적으로 종종 인용되는데 이는 무턱대고 배척할 수 없는 엄연한 인식이기도 하다. 모든 비평은 여기서 자유로울 순 없다. 같은 텍스트도 누구 또는 어디서 생산했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이의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 끝은 메신저다.


하루에도 수많은 종류의 글을 읽다 보면 그 안에서 어떤 정치성과 이해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정치인들과 신문지상을 차지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가 아니다. 인간 사회 알력과 개개인 이해 조정이 가미된 넓은 의미의 정치말이다. 그럴 테면 은연중에 왜 썼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궁극적인 의도는 무엇일까? 그에 따라 글쓴이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혹은 아직은 아니더라도 글쓴이가 장차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등등 의문이 해당 글쓴이로 향하게 된다.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데 자꾸만 메신저가 읽힌다.


매체의 다양화와 SNS 발달은 바야흐로 ‘텍스트’ 시대를 만들었다. 읽고자 하는 인구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적어도 쓰고자 하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체득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오고 가는 카카오톡 메시지 또한 분명한 텍스트다. 영상 시대라는 데 유튜브도 결국은 말하고자 하는 텍스트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십여 년 전 스마트폰 등장 이전의 보편 인구보다 몇 배 이상은 하루에 더 많이 텍스트를 접하고 해석할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싹튼다. 과연 단순 텍스트 인식 이상의 정확한 해석을 하는 이가 몇 퍼센트일까. '오독'이라고 할 수 있는 잘못된 받아들임은 '문맹'과 비슷한 텍스트 해석 능력 부족자를 넝쿨처럼 낳고 있지는 않을까. 거기에 또 얼마나 많은 텍스트들이 덧붙여져 퍼부어질까. 그런 틈바구니에서 내가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꽉 차 넘칠 것 같은 뒷간에 똥을 더하는 것은 아닐까. 잡념을 끼워 넣자면 무수히도 많다.


요즘 자주 듣는 소리가 카톡 하나라도 잘못 보내면 큰일 난다는 푸념이다. 수많은 사회 불합리한 이슈가 '카톡 유출'로 시작하니 그도 그럴 것이다. 이유는 충분히 이해된다. 개인의 동선이 CCTV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곳에 잡히는 만큼 개인의 발화도 어딘가 흔적이 남기 쉬워졌다. 그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폭발성이 강한 흔적으로 남는 게 카톡이 되었다. 반대급부로 카톡 회사 관련 부서는 수사 요청이 하도 많이 들어와서 곤란한 지경이라고 들리던데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생활 영역은 점점 희미해지고 '자기 홍보'와 '범죄 노출'의 아찔한 줄타기도 한 끗 차이다. 그럴수록 메시지와 메신저 사이에서 자꾸만 '메신저'가 은연중에 주목받는 흐름이 되는 건 당연지사다. 그 가운데 무언가를 불특정 다수를 향해 텍스트로 꿰어 발화한다는 건 고도한 계산이 빠질 수 없는 영역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또 제대로 된 '해석'을 받지 못해 오해를 불러일으켜 언젠간 화살이 되어 돌아오지는 않을까? 이러한 불안이 솔직한 심정으로 우려를 낳는다.


유명한 사람들이 하는 말은 가끔 미화되게 마련이다.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에서 저 오래전 사진으로만 본 이미 죽은 인간의 말도 그렇다. 그가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대충 퉁쳐서 인용하는 것은 웃기다. 그렇지만 조지 오웰이 "모든 글은 정치적"이라고 말한 것만은 유독 뇌리에 남아 기억력이 별로인 나도 가끔 상기한다. 결국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한 줄도 자유롭게 써내려 갈 수 없다. 설령 써내려 갔다는 것은 어디선가 꾸몄거나 또 다른 자아로 '그러한 척'을 했을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돌아보면 지워내야 하는 글이 '나'라는 메신저 꼬리표를 달고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도무지 '메신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메시지'라는 원점에 다시 마침표가 찍힌다. 달을 가리키겠다고 나서지만 손가락마저 내보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무결한 '메신저'로서 올바른 정치성이 담보된 '메시지'를 글로 전달할 수 있는가? 그래 왔는가? 앞으로도 그럴 수 있는가? 아니면 앞으로는 그럴 수 있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자꾸만 웅크리는 데 자연히 글은 더 솔직하지 못하게 된다. 당연히 정치적인지 않은 '척하는 글'만 생산할까 우려하는 셈이다. 그럴수록 더 '픽션'이라는 영역에 숨고자 하는 욕망도 싹튼다.


요즘 같은 심정으론 무언가 글을 써도 걱정이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걱정이다. 쓰고는 싶은데 턱턱 자기 검열이 차려진다. 이 대답을 찾기 위해 '나답게 살겠다'라고 했던 아주 오래전 다짐을 상기해보지만 그건 또다시 날아간 내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온전히 될 것인가에서 멈칫한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위험성과 불안이 밀려오는 의식의 흐름이다.


그래서 또 나오는 질문은 하나다. 도대체 왜 쓰는가. 왜 키보드 앞에 있는가. 개인이 글을 쓸 때의 메신저인 내가 아는 수준에서 그럴듯한 '자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공개되어야 하는가. 최소한 어떻게 꾸며지거나 드러내야 하는가. 정치적이지 않은 글은 없다는 수준에서 딱 멈춘 자문자답이다.


지금 여기 내 브런치와 다른 이의 브런치가 모두 한 편의 '쇼'는 아닐는지? '소영웅주의'에 기반하고 올바름으로 무장한 가면을 쓴 뒤 거기에 글까지 쓴 것은 아닐는지? 인생의 모든 순간 중 그나마 행복한 순간만 편집해 길어 올린 또 다른 인스타그램은 아닐는지? 갑자기 영화 <트루먼 쇼>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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