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조만간 나는 그녀에게 가서 전화번호를 물어볼 예정이다.
내 앞에는 친구 두 녀석이 있는데 모두 내게 헌팅 강의를 들은 직후다.
"마, 자신감이 첫째 인기라. 니들 손아습이 모르나? 3할 치면 잘했다 앙카나? 맞다. 헌팅도 3할 치면 잘하는 기다. 그랄라믄 우예야 하노? 일단 타석에 서야 치든 말든 할끼 아이가. 무조건 실패를 두려워해선 안 되는 기라."
그리하여 이 둘은 집중해서 나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사실 난 수많은 연애 경험이 있지만 정작 헌팅을 해 본 적이 없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진정한 연애 고수는 헌팅의 달인이라는 소리가 나왔는데 난 술과 그 개소리에 모두 넘어갔다.
"마, 딱 가꼬마. 번호즘예? 하면 넘어온다 앙카나? 그리 자신감이 없으니 허구한 날 피시방에서 롤이나 하면서 부모님 안부나 묻고 있는 기다."
아마도 술 취한 날 나는 이렇게 말했을 거다.
수없이 조각난 기억을 더듬으며 재구성해보니 속이 쓰리다 못해 어이없는 웃음보가 터졌다. 허세를 잔뜩 부린 뒤 술이 깬 날 아침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갈증을 버티며 사이다를 들이켰는데 머리가 띵하면서 목구멍까지 타들어가는 그런 따가움이었다.
"자, 기다리라. 내 간다."
약속은 약속이었기에 크게 한 번 심호흡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로 밀려오는 녀석들의 기대감만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여자의 전화번호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속으로 예상했다. 일단은 시도가 중요하다고 잔뜩 늘어놓은 허풍만 수습하기로 결정했다.
"저기요. 잠깐이면 되는 데요."
최대한 공손하고 표준어에 가깝게 말을 걸었다. 공책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전지현에 가까운 청순함이 내 뺨을 스쳤다. 긴 생머리 안에 있는 또렷한 눈과 그 안에 담긴 맑은 눈빛이 희고 투명한 피부와 손을 맞잡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대예?"
거부감 없이 사투리 짙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나지막한 안도감을 느꼈다.
"아까부터 봐 왔십니더. 너무 예뻐가 전화번호라도 알고 싶은데예. 쪼까 알 수 있습니까? 뒤에 제 친구들도 있고 그래가, 꼭 좀 알고 싶습니데이."
지금 다시 돌아봐도 말도 안 되게 중언부언하는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그녀는 선뜻 번호를 알려줬다. 평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온 덕분이라고 속으로 환호했다. 무표정의 그녀는 무슨 일이었는지 공책 한쪽을 찢어 휙휙 번호를 적었다.
나는 기세 등등하게 개선장군처럼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내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날 이후 친구들은 전지현과 비슷하게 생긴 초미녀의 번호를 얻었다며 나를 '헤드헌터'라고 비유적으로 불렀다.
나는 '전지현'씨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그녀의 이름은 '현지현'이었다. 이름마저 전지현과 비슷했다. 난 그녀의 이름을 부르거나 적을 때마다 처음 전화번호를 얻을 때 받았던 전지현스러운 그 느낌을 잊지 않았다.
현지현은 나와 동갑이었다. 나는 정식으로 그녀와 사귀진 않았지만 그 이전 단계인 요즘 흔한 말로 일종의 '썸'과 같은 사이를 유지했다.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던 중 신기한 점을 알게 됐다. 그녀가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이었다.
집에 돌아와 졸업 앨범을 뒤져보니 6학년 7반에 그녀의 사진이 있었다. 당시 나는 6학년 3반이었는데 7반 여학생까지 알 정도로 이성에 일찍 눈을 뜨진 않았다.
심지어 그 정도로 현지현이 예뻤다면 어렸을 때부터 한 미모 했던 걸로 유명했을 텐데 아쉽게도 기억 속에 현지현은 없었다. 사진 속 현지현은 지금의 얼굴과 크게 달랐으며 사실 못생긴 쪽에 가까운 사진이었다.
"정말 초등학교 때 몰랐다 마, 그래가 앨범 보니까 못 알아보겠든데?"
"사실 싹 뜯어 고칬다."
현지현은 성격마저 전지현처럼 시원시원했다. 속 시원한 대화로 궁금증이 풀리면서 '오 마이 전지현'에 가까운 기억도 그렇게 스러져갔다.
그때부터 진짜 '헤드헌터'의 활동이 시작됐다. 서면을 주 활동 무대로 삼았다. 나는 헌팅에 열을 올렸다. 심심하면 친구들과 서면에 나가 예쁜 여자의 번호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전지현에게 통했던 똑같은 대사를 수많은 여자들 앞에서 반복했다.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성공률이 높아 정말 3할 정도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쭉쭉빵빵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자의 번호를 얻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득달같이 달려갔고 의외로 너무도 쉽게 전화번호를 받았다.
그날부터 나는 헤드헌팅의 삶을 잠시 멈추고 그녀와 연락을 이어가는데 집중했다. 서울에서 일 때문에 부산으로 왔다는 그녀는 나보다 5살 어린 24살이었다.
"오빠, 내일 저녁에 시간 돼? 저녁에 맥주 한 잔 하자."
그녀를 안지 딱 일주일 흐른 날 밤에 그녀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허름한 술집이 하나 있는데 직접 제조한 하우스 맥주를 파는 곳이라서 자주 간다고 설명했다. 부산에 오기 전 서울에서 자주 가던 술집과 분위기가 비슷해 포근하다고 했다. 조용하고 은은한 곳에서 재밌게 놀자는 애교도 섞여 있었다.
혹시 내가 먼저 도착하면 '은우 씨 손님'이라고 말하면 된다고 했다. 김은우가 그녀의 이름이었다.
다음날 난 약속 장소로 갔다. 술집은 허름하다는 정말 딱 어울렸다. 'RIM'이라는 간판이 하나 붙어있었는데 전혀 그것만으로는 뭘 하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가게 입구부터 어두운 조명이 나를 감쌌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죠?"
은우 씨만큼 예쁘고 섹시한 바텐더가 나를 맞이해 기분이 좋았는데 가게 안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은우 씨 손님이라면 안 다고 하던데예."
"아, 조금 일찍 오셨군요."
"일찍 온 게 아니고 마, 5분 늦었는데도 내가 먼저 온 긴데예"라고 중얼거렸다. 바텐더는 슬쩍 웃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바 뒤에 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매우 어두웠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바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TV 화면에서는 뉴스가 소리 없이 화면만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은우 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했음. 기다리고 있음."
그사이에 바텐더는 통화를 마치고 나왔다.
"하우스 맥주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한 잔 주세요."
상대가 표준어를 쓰면 나도 그렇게 하려고 어설프게 맞장구치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하우스 맥주를 천천히 음미하는데 고소한 맛이 분명 일반 맥주와 달랐다. 갑자기 그녀의 취향이 매우 멋있으며 역시 서울에서 온 사람이라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니 살짝 긴장이 풀렸다.
그때 마침 손님 둘이 들어왔다. 덩치 좋은 남자 두 명이 들어오면서 "여기 2잔"이라고 외쳤다. 그 둘은 바에 앉지 않고 내 뒤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손님들이 막 들어올 시간인가 보죠?"
"네, 원래 이 시간쯤 돼야 한두 분씩 오죠."
아쉬운 대로 바텐더와 어설픈 표준어를 섞어 시시콜콜한 얘기를 했다. 은우 씨한테 답장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번엔 남자 세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세 잔을 시켰다. 그다음엔 또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
"남자 손님들만 오나예?"
이미 맥주 맛에 흠뻑 빠진 나는 약간의 알딸딸함을 느꼈다.
"남자 손님만 받는 곳이니까요."
뭔가에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뭐라꼬요? 그럼 은우 씨는 뭡니꺼?"
나도 모르게 놀라 살짝 소리를 높였다. 바텐더는 입을 삐쭉 내밀며 억지로 웃었다. 난 급히 은우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다가 끊겼다.
"미끼네요."
바텐더가 무표정하게 말을 뱉었다. 미끼란 말이 튀어나오자 등 뒤 의자 여러 개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 아마도 앉아 있던 남자 손님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손님인지 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서로 알고 있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머리를 스쳤다.
"한 잔 더 드세요."
바텐더는 웃으며 내게 하우스 맥주를 더 권했다.
"제가 지금 이걸 먹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데이."
일어나려 하는데 한 남자의 손이 내 어깨를 눌렀다.
"급하네. 급해."
그리하여 이번에 나는 남자들이 우글우글 거리며 예쁜 여자 바텐더가 한 명 있는 가게 안에서 모든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날 가게 한가운데에 앉히고 빙 둘러 앉았다. 여전히 어두운 조명과 클래식 음악과 소리 없는 된 뉴스 화면이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친구, 자네 별명 있어? 별명? 재밌는 별명 말이야."
"헤드헌터 인데예."
정말 재밌어야 한다는 생각에 솔직하게 말했다. 그들은 박장대소했다. 나는 열심히 직업적인 헤드헌터가 아닌 내 별명으로서의 헤드헌터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자 한 남자는 "이 친구 이거 제대로 된 미끼네"하며 껄껄거렸다.
또 다른 남자는 "인마, 듣고보니 진짜 헤드헌터는 우리인데? 대가리 한 번 핑 날려줘?"라며 또 웃었다.
"그러니까 우린 지금 자네의 장기를 얻으려 해. 네가 헤드헌터 뜻 이상하게 썼듯이 우리도 네 장기자랑 말고 진짜 장기자랑을 보고 싶다고. 어때 명확하지? 담배 피우나? 술은 좀 하고? 있는 그대로 말해."
그 남자 자식은 이렇게 말하곤 깍지를 낀 채 내 얼굴 앞에 몸을 바싹 붙였다. 하우스 맥주 덕분에 빌어먹게 어지러웠으나 눈물은 흔들림 없이 정확하게 두 뺨을 미끄러졌다.
지난날 헤드헌터라며 까불면서 서면 바닥을 누빈 걸 후회했다. 전지현 아니, 현지현에서 멈췄어야 했으며 그깟 성형이 뭐가 대수냐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난 분명 어설픈 헤드헌터 놀이를 멈췄어야 했으며 지금 돌아보니 그건 어설픈 바다수영을 배워 해운대에서 허우적거린 것과 다르지 않았다.
"죄송합니데이."
"뭐가 죄송한데? 담배 하고 술을 해서? 아님 하나만 해서? 뭐가 죄송하냔 말이야 이놈 새끼야."
"헤드헌터라꼬 꺼부적거려서예."
그게 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뱉자마자 누군가 나를 인정사정없이 때렸다.
정신을 차려 눈을 떴을 때 난 병실에 있었다. 사물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병원 특유의 냄새 때문에 내가 누워있는 곳이 어딘지 알았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을 느끼기엔 무언가 감각이 없는 느낌이었다.
"정신 드세요? 다행히 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
의사의 말이 들렸다.
"손가락 움직여보세요. 눈 한번 깜빡거려보시고요."
쉽지 않았다. 의사는 간호사와 뭐라고 뭐라고 말을 주고받았다.
내 옆에는 서면에서 한창 내 뒤를 따라다니던 자랑스러운 헤드헌터의 친구들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났다.
"빌어먹을 헤드헌터."
난 겨우 입을 떼 첫 마디를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