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희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고만고만한 시골집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동희네 집 벽은 일 년 내내 신문지가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바람을 막기 위해서였다. 지푸라기로 대충 얹은 동희네 집 지붕 또한 그저 햇빛을 가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어린 동희는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흥부와 놀부> 얘기가 가장 싫었다. 놀부네로 밥 얻으러 갔다가 뺨을 맞는 흥부 얘기를 읽고 있으면 꼭 자기네 집을 보는 것 같았다. 부모와 8남매가 뒤엉켜 사는 모양새가 흥부네와 다를 바 없다고 동희는 생각했다.
동희는 다섯째였는데 막내 여동생만 빼고는 전부가 남자 형제였다.
동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읍내 오락실에 가서 테트리스를 했다. 도형으로 가로세로 네모 칸을 채우며 동희는 밤마다 단칸방에서 이리저리 끼워 맞춰 자는 식구들 생각을 했다. 좁은 방에서 동희네 식구 열 명이 자려면 나란히 자는 게 불가능했다.
동희의 교우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짓궂은 몇몇은 "거지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동희와 동희네 식구들을 놀렸다.
동네 어른들은 가끔 동희의 뒷모습과 늘어진 책가방을 보며 "돈도 없는 집이 새끼는 왜 이리 많이 낳았느냐"고 수군대기도 했다.
동희 위로 네 명의 형들은 모두 공부를 못했다. 동희를 제외한 동생들도 모두 공부엔 소질이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동희네 집에선 교육조차 사치였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동희 아버지는 공사장 막노동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어머니는 남의 집 농사를 지었다. 둘이 벌어오는 푼돈과 받아오는 음식들이 식구들의 주린 배를 겨우 틀어막았다.
남매 중 동희만 유독 총명했다. 동희는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공부는 산수와 자연에 흥미를 보였다.
동희가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담임은 동희네 집에 찾아와 "동희만큼은 꼭 좋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보내야 한다"고 부모를 설득했다. 그러나 동희 아버지는 "없습니다. 돈도 나아질 형편도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며 머리만 조아렸다.
결국 동희의 사연이 전교에 알려지면서 선생들이 힘을 합쳤다. 담임선생을 주축으로 학교 선생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 선생들은 중학교 3년 내내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동희를 농어촌 지역 인재로 관할 교육청에 추천했다. 그와 동시에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까지는 보장해주자고 외쳤다. 대학이야 학자금 대출을 포함해 장학금이나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수 있으니 우선 그 길목을 닦아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사이 동희 어머니는 몸에 암이 퍼져 세상을 떠났다. 제때 수술만 받았으면 완치할 수 있었다고 의사는 동희 아버지를 나무랐다. 아버지는 의사 앞에서 "없었습니다. 돈이 없었습니다"라며 다시 한 번 눈물만 흘렸다. 그 모습을 본 동희는 '어떻게든 의대에 가서 환자를 돌보고 돈도 벌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동희는 원하던 의사가 됐다. 모든 과정을 거쳐 결국은 내과 전문의가 됐다. 의대 성적이 좋았던 동희는 얼마든지 돈 많이 버는 피부과나 성형외과를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동희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내과를 선택했다.
동희가 의대에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을엔 동희의 전문의 취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크게 걸렸다.
서울에서 몇 년간 의사생활을 하던 동희는 50대가 됐을 때 자신의 고향 마을 인근에 병원을 개원했다.
동희는 병원을 개원하며 신문지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던 자기네 집터를 바라봤다. 거지라며 놀림받던 기억과 <흥부와 놀부>를 읽으며 얼굴이 시뻘게졌던 과거가 떠올랐다. 테트리스처럼 자던 형제들과의 부대낌과 어머니가 떠나던 날 밤의 날 선 차가움도 몸서리치게 생생했다.
돌아보니 다 아름다운 추억이었다는 어느 문장이 떠오르자 동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기능할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먹고 삶이 해결됐을 때 가능한 얘기라고 동희는 생각했다.
늙은 아버지는 과거의 막노동이 몰고 온 골병 때문에 앓아누웠다. 동희는 아버지에게 간병인을 붙이고 매달 돈을 부쳤으나 자주 찾아뵙지는 않았다.
동희의 형제들은 모두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며 그럭저럭 사느라 바빴다. 그래서 더욱 동희는 가족의 자랑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동희는 모든 것에 신물을 느꼈다. 어릴 적 선생들이 건네준 교사용 문제집으로 공부했던 기억부터 장학금이라도 놓칠까 제대로 발 한번 못 뻗고 자던 시절까지 기억을 되돌릴수록 쓴웃음이 났다.
"의사 선생님"이라며 자신을 찾아오는 동네 어른들도 귀찮았다. 동희는 어릴 때 자신의 책가방 뒤에서 수군거리던 그들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했다.
동희는 이제 고소득자라며 나라에서 꼬박꼬박 가져가는 세금고지서마저 꼴 보기 싫었다. 어려울 때는 외면하더니 이제 좀 살아보겠다고 하니까 뺏어가는 거라고 동희는 생각했다.
어느덧 동희는 세금 혜택에 혈안이 됐다. 주변에 물어물어 탈세도 저지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동네 어른과 인근 지역 사람을 상대로 동희는 진료비를 올렸다.
주변 약국이나 제약사와 약값 뻥튀기를 도모해 차액을 돌려받기도 했다. 어차피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제대로 된 병원이라곤 동희네 병원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선택은 뻔했다. 동희가 환자 한 명 한 명을 정성껏 상대하는 시간도 갈수록 짧아졌다.
흔히 가난했던 사람들이 진보적이거나 개혁적인 성향을 갖기 쉽다고 사회는 떠들어댔다. 사회적 약자를 생각하거나 베풀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동희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동희에게 의사로서의 성공은 스스로 미친 듯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이자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보상이었다.
개인이 이뤄 축적한 것을 왜 다른 사람들에게 쓰일 세금으로 내야 하느냐고 동의는 항상 자문했다.
동희네 진료비는 꾸준히 올랐다. 약값 뻥튀기도 지속했다. 동희의 탈세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그럴수록 동희의 통장 잔액도 깊고 넓게 채워졌다. 이제 동희의 목표는 보수 정당에 들어가 지역 의원이 되는 것이었다.
밥 얻으러 놀부 집에 갔다가 주걱으로 뺨을 맞는 흥부를 읽으며 동희는 더 이상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