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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May 15. 2019

광주 5·18 가는 길

죽음의 표식 앞에서

2017년 5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았다.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부친을 잃은 유가족 김 씨가 추모사를 읽고 내려오자 문 대통령은 그에게 다가가 포옹다. 김 씨의 추모사를 듣는 내내 벌겋게 충혈된 대통령의 눈과 상기된 표정은 고스란히 생중계되었다.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역설했다. 왜곡된 사실을 바로 잡아 오직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의 연설을 힘주어 말했다. 그 연설 속에서 사라진 목숨의 평범한 시민성을 얘기했고 인권과 자유가 있는 나라를 강조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태어난 김 씨는 자기보다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기억하며 눈물을 훔쳤다. 전남 완도에서 근무하던 김 씨의 아버지는 그날 딸의 출생 소식을 듣고 광주를 찾았다가 계엄군의 폭력으로 목숨을 잃었다.


김 씨는 추모사에서 “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서야”라는 말을 할 때 끝을 또렷이 발음하지 못했다. 도도히 흘러버린 세월은 아버지를 그날의 시간에 가두어 딸보다 어린 청년으로 박제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수많은 시민이 김 씨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산화했다. 산화 이후에도 그들의 죽음 원인은 번번이 의문으로 인식되어 37년이 지난 2017년 그날이나 39년이 흐른 2019년 지금까지 여론 위에서 갈라졌다. 광주 5·18은 그렇게 양지에 올라섰다가 음지로 내려서기를 반복하며 목숨과 함께 그곳에 갇혀서 저마다의 시선으로 발효됐다. 발효된 것을 어떻게 꺼내 어디부터 들여다보아야 하는 문제만이 남았는데 현장에서 사라진 목숨은 말없이 땅에 잠들었다.


때로는 5·18이란 단어 자체가 금기어로 파묻힌 시기를 지나기도 했다. 때로는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표상으로 추대되어 시작점을 표식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때로는 개인의 정치성을 논박하는 수사로 작용했고 때로는 역사의 슬픔과 비극을 원점으로 하는 출발지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이라는 숫자로 한정하기 모호한 기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수많은 목숨이 자리한 그곳에서 오늘도 이쪽과 저쪽으로 고 있다. 엄정한 사실은 어딘가에 사실로 존재하는 데 정치성을 교묘히 위장한 수사들이 그것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날라버려서 도대체 어디가 이곳의 진원지인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됐다.


나는 언젠가 그 기록물들을 차근차근 읽으면서 사실과 의견을 발라나갔다. 그렇게 행간에 물음표를 붙인 뒤 이를 낳은 앞선 기록과 연결 지어가며 나름의 추적을 시도했지만 결국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이쪽저쪽을 갈팡질팡하는 사이 흐른 세월은 기록 자체마저도 각각의 위치를 추적해야 하는 수고가 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정치적 재단에서 벗어나려면 엄정하고 정밀하게 검증해야 하는데 이것은 노고이자 어떤 면에선 오욕이 되고 말았다. 사실 앞에서 끝을 모른 채 추적을 이어가야 하는 중노동은 사실을 사실 자체로 설명해야 하는 숙제를 필연적으로 떠안게 되었다. 그때 이만한 고생 감당할 수 있는 재간이 나는 없다고 결론 지어버렸다. 그것은 수많은 역사학자마저 공격받은 사례에 비춰볼 때 애초 얕은 지식의 내가 통과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정의했다. 그것을 내 시각으로 꿰어 광주 5·18의 실상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설파하기엔 휘말림을 돌파할 전투력과 사실 입증 능력이 나는 부족했고 지금도 그렇다.


더 깊게 들어가 고백하자면 그러한 정치적 공방과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 앞에서 여전히 머뭇거리게 된다. 스스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말과 글로 묶어낼 때 생길 수밖에 없는 틈은 역공의 대상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익히 안다. 그러므로 광주 5·18에 대해 나는 한 줄도 주장할 수 없으며 겉도는 수준의 현장 감상밖에 쓸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은 광주 5·18에 앞서 부당하게 정권을 끌어안아 진실을 감춘 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도 “왜 이래”라고 호통 치는 박탈된 전직 대통령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저 사람의 목숨이 부당하게 빼앗겼고 그것의 원인 또한 투명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을 다만 나는 지적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관계 입증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노력이 어느 시 누군가의 정치 공학 뒤로 밀려버려 바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쯤은 다.


며칠 전 점심에 나는 서울역 앞을 지나다가 ‘광주 5·18 망언’을 했다는 야당과 그들 대표를 마주했다. 야당 대표의 대중 연설은 시종일관 자신감에 넘쳤고 길거리 인파는 그 수를 막론하고 눈길을 거둬들일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빨간 점퍼의 야당 대표와 그들 당직자와 그들 지지자 사이에서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도 그들 입에서 정치적으로 반대 격인 여당이 우선 가치로 두는 ‘자유’가 흘러나왔고 ‘민주주의’가 역설되었다. 다른 점은 태극기와 함께 미국 성조기가 휘날렸다는 것인데 이것은 몇 해 전 겨울 광장에서 본 장면이었다.


그때도 나는 가만히 그들 사이에서 관찰하며 귀를 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풍경과 말들은 거의 같았다. 나는 지금도 어찌하여 그처럼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얘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어떻게 다르며 ‘자유’라는 단어가 그 앞에 붙어 무엇을 수식하는지 답을 얻지 못했다. 프레임을 이미 짜둔 뒤 언어를 욱여넣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만 날로 커지고 있는데 이를 사실로 검증하기란 아득하다.


마침 서울역 그 일이 있고 나서 직접 광주 5·18 민주묘지를 방문다. 말 없는 묘역에서 무슨 소리라도 날까 싶어 내심 기대했지만 고요한 그곳에서 비과학적인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묘역에 들어가기 전 리본에 글을 써 내걸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있었는데 건네진 굵은 펜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얼마간 생각하다가 리본에 ‘사실만은 모두에게 수식 없는 사실이길’이라고 적었는데 산들거리는 바람 사이에서 그까짓 글 몇 자는 유독 나약해 보여 다시 돌아보지는 않았다.


둘러본 묘역엔 출생일과 사망일이 적혀 있었는데 1920년대 생도 있었고 1970년대 생도 있었다. 1920년대 생이면 한반도 전쟁 틈바구니에서 기어코 살아남아 또 전쟁 같은 일을 고향 땅에서 겪은 뒤 말년에 망하게 죽었을 터였다.


1970년대 생이었으면 이제 막 교복을 벗어던졌다가 예상 못한 묘지에 묻혔을 것이었다. 그 앞에서 ‘사실’을 얘기하고 ‘수식 없는’ 따위의 엄중함을 내지 건 묘역이 말을 걸지나 않을까 귀를 갖다 댄 것만큼 상식적이었다.


땅에 묻힌 목숨은 당연하게도 말이 없었다. 그들의 사망은 출생과 달리 전부 1980년 5월 18일 불리는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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