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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Sep 01. 2019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말이 말을 만드는 세상’이란 지적도 진부한 표현이 되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뉴스 발화자들의 이슈몰이를 보면 남들이 맛있다는 잔칫상에 억지로 끌려 앉은 기분이다.


감을 수 없는 눈과 닫을 수 없는 귀를 가진 인간이므로 그 앞에서 멈칫거리면 본성의 배고픔을 어떻게 채우느냐는 물음이 날아든다. 억지로 앉아 숟가락이라도 드는 시늉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 겨우 핀잔을 면하는 수준이다. 게걸스레 먹는 척을 해야 그나마 정상인으로 치부되는 실정에서 도망갈 곳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렁이는 뉴스의 원본도 이제는 출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묻히는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원본을 오롯이 찾아 숙독하고 판단하는 것도 자와 독자의 몫으로 남았지만 속도감을 슬로건으로 내건 세상에 그 시간도 사치로 포장되었다.


여러 매체를 떠나 소셜미디어로 퉁 치는 각 개인의 확증편향적인 해석들도 쓰레기 더미처럼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비켜 세우는 이들의 주장을 우연히 보고 있노라면 이런 시대에도 땀 흘려 쌀을 키우는 농부의 땀방울이 더욱 진귀하고 고결다. 말을 참지 못하는 그들 새로운 엘리트주의는 가리키는 것만 보라는 또 다른 착취일 뿐이다.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명명된 가짜 뉴스란 말도 자주 맞은 진통제처럼 만성이 생겨 정치적 수사처럼 발판 아래 깔렸다. 판에 박히면 박힌 대로 그것은 가짜 뉴스가 되었고 판에 박히지 않으면 박히지 않은 대로 그것도 가짜 뉴스로 취급되어 버리니 이제는 이 말도 생명을 다하여 대체어를 찾아야 하는 운명에 놓였다.


그런 뉴스와 반박과 재반박은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쏟아져 또 눈과 귀를 분탕질하는가. 한 사람이 하루에 듣고 읽는 말과 글은 저 옛날과 비교해 얼마나 많이 늘었는가. 활자와 영상이 춤추는 시대에서 과학자들이 내놓은 관련 연구를 접하기도 했는데 이런 결과물은 최근의 증가세를 따라잡지 못해 매 순간 최신화가 필요한 통계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라디오를 듣고 신문 몇 종에 인터넷 뉴스까지 접해야 하는 처지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이 되면 전날 마신 술기운에 게걸스레 아침밥을 해치운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가 아둔해진다.


이것은 세상의 서비스인가 아니면 주입인가. 이것은 나와 내 주변에 얼마나 가치 기능하여 정보라는 그럴듯한 말로 작동하는가. 매일매일 그들 시각에서 놀랄만한 것들이 연속고 그에 따라 반복 위기를 서두에 내건 뉴스를 듣고 나면 그저 그런 두통약은 듣지도 않는 만성 두통 환자가 된 것처럼 무감각해지고 만다.


상황이 이러하니 읽는 이가 1명이든 100명이든 1000명이든 보이지 않는 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어떨 때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무섭다. 사람 1명이 우주라는 데 그 아득한 우주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내보이는 글은 얼마나 아득하고 조악한가.


궁극적으로 그런 일에 종사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을 접하게 되는데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표정까지 굳게 되는 것은 전부 이런 자문에서 온 공포와 배경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풀어낸 내면의 잡문 제목도 김훈 작가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서 따왔다. 여기에 덧붙일 게 없어서이기도 했거니와 말을 더하고 싶지 않다.


이 책 속 밑줄 그어 놓은 몇몇 대목과 함께 조지 오웰의 저 옛날 글을 인용해 대체하려 한다. 이 이상의 것을 풀어놓을 재간도 없고 말을 더 보태고 싶지도 않다.


이를 테면 언뜻언뜻 들었던 질문에 대한 자기 고백이자 책임 회피다. 그래도 쓰는 것은 반복 질문을 향한 핑계다.








오직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날짐승들의 시대에 당대를 향하여 말을 거는 일은 가능한가, 당대를 향하여 할 말이 나에게 있는 것인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언어와 신호는 아직도 소통력이 있는 것인가. (중략)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자는 정치구호는 왠지 처음부터 수상했다. 그것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낭만적인 슬로건으로 보였다. 한국 현대사는 사회적 고통을 분담해본 역사적 경험이 없다. 농업을 세계무역시장 앞에 개방하는 것이 국가 전체의 이득이며, 그 종합적 이득이 수많은 농민들을 고루 이롭게 하리라는 학설과 정책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일수록 공허하게 들린다. 그러한 위기극복 정책이 공허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논리가 개별적 인간 삶의 구체성 위에 바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개별적 삶의 구체성을 배반하거나 천대하거나 또는 그것을 추상화해버리는 모든 이론과 정책은 모두 사기극이라고 믿는다. 도덕은 인간의 개별성과 개별적 존재의 구체성 위에서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 무너진 공가 속을 기웃거리며 떠난 사람들이 버린 가재도구를 뒤적거릴 때 분노와 슬픔으로 치가 떨었다. 공가에 살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나.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고통은 어떻게 분담되었나. 도대체 누가 그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졌다는 말인가. 경제발전의 학설과 위기극복의 정책들은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을 개별적 존재로 이해한 적이 있었던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더 이상 가짜 희망을 말하지 말라. 민주주의와 위기극복의 이름으로 인간의 구체성을 추상화하지 말라. 추상화된 언어의 합리성은 뻔뻔스럽다. 그 추상성이 권력의 힘이고, 그 뻔뻔스러움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질서를 완성해가고 있다.(중략)


다들 격렬한 언설을 한바탕씩 토해낸 다음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라는 협박을 후렴으로 달고 있다. 이 말은 내 편이 더 많다는 전략적 선전에 불과하다.


이때의 국민은 허수아비와 똑같다. 사실의 기초가 없는 상황에서 ‘국민’이 무엇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 사실관계를 국민이 판단해야 한다면 검찰은 왜 있고 국회는 왜 있으며 언론은 왜 있는가.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라는 협박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파시즘에 불과하다. 이 파시즘은 사실을 사실로서 정립시키지 않고 사실을 대중의 정서 속에 은폐시킴으로써 권력에 접근하려는 기만술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기만술은 대중을 끝없이 무지몽매 속에 처박아놓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는 협박은 이른바 국민을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존중하는 척하면서 바보로 만들어가고 있다. 바벨탑을 쌓던 시절처럼 언어는 무너져 내리고 있다. 언어가 무너지면 그 사회의 모든 구조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김훈 에세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2003년)






중산층인 사람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다고 하자. 그래서 달라지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그는 계속해서 돈벌이를 해야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그가 부르주아로서의 경제적 지위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취향이나 습관, 거동, 상상력의 배경은 공산주의 용어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는 변할까? 이제는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그가 여전히 습관적으로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와 뜻이 같을 노동 계급 사람보다는 그를 위험한 ‘과격분자’라 여기는 같은 계급 사람과 있는 게 훨씬 더 편하다. 음식, 와인, 의상, 독서, 그림, 음악, 발레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현저하게 부르주아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 어느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를 봐도 그렇다. 이를테면 영국 공산당의 아무개 동지나 ‘유아를 위한 맑시즘’의 저자를 보라. 공교롭게도 아무개 동지는 이튼 출신이다. 그는 이론상으로는 바리케이드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아직도 양복 조끼 맨 아래 단추는 채우지 않는다. 그는 프롤레타리아를 이상시 하지만 그의 습성이 그들과는 너무 무관한 게 놀랍다. 어쩌다 한번 순전히 허세로 상표를 떼지 않고 시가를 피운 적은 있어도, 치즈를 칼끝으로 찍어 입에 넣는다거나 모자를 쓰고 실내에 앉아 있다거나 접시에 고인 차를 마신다거나 하는 일은 그로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식탁에서의 예절은 그의 진정성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한 시간이 넘도록 자기 계급을 비판하는 장광설을 들어본 적은 여러 번 있어도, 프롤레타리아의 식탁 예절을 익힌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왜 그럴까? 모든 미덕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왜 아직도 수프를 소리 내지 않고 마시려는 용을 쓰는 것일까? 이유는 속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몸가짐을 역겨워한다는 것밖에 없다. 노동 계급을 혐오하고 두려워하고 무시하도록 배운 어린 시절의 교육에 아직도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눅눅하고 설익은 위선은 모든 ‘진보’적 견해에서 발견된다. 제국주의를 예로 들어보자. 좌파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반제국주의자다. 그는 계급적 특권의 밖에 있다고 주장하는 만큼 자동적이고 독선적으로 제국의 특권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영국의 제국주의가 딱히 싫지 않은 우파 ‘지식인’도 적당히 거리를 둔 척한다. 대영 제국에 대해 재기 넘치는 태도를 취하기는 너무나 쉽다. (중략)


그러나 영국인치고 대영 제국이 해체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특히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 연대장에 대해 재기 넘치는 조롱을 보이는 유의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다른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영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높은 생활수준은 우리가 제국을, 그중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열대 지역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영국인이 상대적으로 안락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인도인 500만 명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한다. 그것은 참으로 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택시에 발을 들여놓거나 딸기 곁들인 크림 한 접시를 먹을 때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대안은 제국을 뒤집어엎고 영국을 축소시켜 우리 모두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고 청어와 감자를 주로 먹어야 하는 춥고 시시하고 작은 섬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좌파 사람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도덕적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태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한다.


(조지 오웰, 위건부두로 가는 길, 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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