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혁명은 실패했고 네덜란드인은 죽었다
1.
막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였다.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말만 '자율'인 타율학습에 신입생들 불만이 많았다. 반마다 도망가는 애들이 나왔다. 급기야 학생부 선생이 "싫은 사람들은 오늘도 집에 가고 앞으로도 매일 가라"고 방송했다. 저녁 급식을 먹으려던 찰나였다. 우리 반은 얼음장이 됐다. 매일 몽둥이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의 으름장이었다. 오늘 도망가면 작살난다는 메시지였다. 그렇지만 나는 위기를 기회로 돌릴 때라고 생각했다. 제일 먼저 교실을 나갔다. 무려 저녁 급식으로 나온 제육볶음을 포기한 강수였다. 보통 밥은 먹고 도망갔는데 그날은 그게 더 멋있어 보였다. 학생부 선생의 '최후통첩' 속에서 일단 총대 메고 나가면 고만고만한 딴따라들 몇 명이 뒤따를 줄 알았다. 사춘기 시절 힙해 보이고 싶은 충동이 꿈틀댔다. 학생부 선생 덕분에 그런 판이 깔린 참이었다. 교실 뒷문을 나가는데 수많은 망설임들이 등 뒤에 꽂혔다. 내 생각에 나는 주관 뚜렷한 힙스터였다. 망설임들은 겁쟁이였다. 그땐 그랬다. 그렇게 다음날 등교했더니 교문에서 학생부 선생이 나를 잡았다. 지각도 아니었는데 이쪽으로 오라고 손가락을 까딱했다. 알고 보니 전날 도망친 빠삐용은 전교에서 나 혼자였다. 마침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억수로 왔다. 이하 생략한다. 4교시가 돼서야 교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게'라는 말 아직도 싫어한다. 다음날부터 나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열심히 소설 태백산맥과 한강을 읽었다. 학생부 선생은 "공부하기 싫으면 이렇게 책이라도 읽어"라고 반 애들이 보는 앞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날 메고 나갔던 총대는 가장 먼저 나를 쐈고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쇼생크 탈출은 쇼크사했다. 태맥산맥 결말도 슬픔이었다.
2.
막 자대 배치받고 불침번 근무 투입된 때였다. 그날은 말번초 근무였다. 직전 근무자인 일병 선임이 와서 깨웠다. 그날 유독 빨리 튀어나와서 교대하라고 재촉했다. 한겨울이었는데 활동복(츄리닝) 위에 그대로 전투복(군복)을 입어도 티가 안 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매번 행동이 꿈 뜨다고 그 일병한테 지적받던 터였다. 대충 그렇게 활동복 위에 전투복을 입고 나갔다. 정말로 티가 안 났는지 일병 선임도 딱히 말이 없었다. 문제는 이등병의 임무였다. 이등병은 전 인원이 모이는 아침 점호에서 제일 앞에 서야 했다. 선임들은 나중에 슬슬 나와서 계급 순으로 뒤를 채웠다. 나는 그날도 매뉴얼을 충실히 따라 아침 점호 제일 앞줄에 섰다. 그런데 갑자기 당직 사관이 "전원 상의 탈의"라고 외쳤다. 혹한기 훈련을 대비한 준비라는 개소리를 지껄였다. 300여 명의 인원이 전부 맨살로 연병장을 뛸 참이었다. 그랬다. 나는 이등병이었고 제일 앞줄이었으며 안에 활동복을 입은 상태라서 상의를 벗으면 칙칙한 군복들 사이에서 주황색으로 온 부대를 환히 비출 태세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 했다. 군복과 활동복을 동시에 벗어볼까도 했지만 계산이 안 나왔다. 군복은 단추 달린 셔츠였고 활동복은 목을 빼서 벗어야 하는 티셔츠였다. 방법이 없었다. 맨살들 사이에서 네덜란드 축구대표팀 '오렌지 군단'의 일원이 등장하는 순간 등 뒤에 수많은 독사들의 눈총이 꽂혔다. 나는 17세기 조선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이었다. 맨 앞에서 연병장을 뛰며 저승으로 달렸다. 그렇게 저승 구경하고 생활관에 복귀했는데 그곳은 폼페이 최후의 날이었다. 나를 깨운 일병 선임은 생활관 한가운데에서 '원산폭격' 얼차려를 했다. 이하 생략한다. 그날도 마침 눈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