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하 씨는 1970년 중국 연변에서 태어났다. 조선족 자치주로 불리는 곳이다. 김은하 씨와 처음 마주 앉았을 때 그는 "거기서 왔어요"라고 불렀다. 대개 누구와 처음 만나면 이런 식으로 말한다고 했다.
답을 들은 상대가 "연변이요?"라고 되물으면 그나마 웃어넘긴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딘데요?"라는 추가 질문이 돌아오면 짐짓 속으로 멈칫했다. 이때 김은하 씨는 편견을 대충 넘기고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현실과 거기서 태어난 것이 주홍글씨처럼 비치는 게 씁쓸하다는 학습된 무력감이 뒤엉킨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일단은 정확히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죠. 갈수록 그게 어디냐는 질문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요. 요즘 어린 친구들은 아예 연변이 어딘지 묻더라고요. 그만큼 많이 변했다는 걸 느껴요."
한국에서 연변이란 단어는 온갖 편견에 시달렸고 지금도 그러하다. 김은하 씨도 일찍이 그것을 알았다. 김은하 씨가 주변에 한국행을 얘기했을 때 모두의 표정은 비행기에서 한참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겨우 중간 정도 지난 것을 알았을 때 짓는 표정 같았다. 그 찌뿌둥함과 체념이 혼재된 반응에서 김은하 씨는 애초 기대하지 않은 반응이 나온 것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그럼 이 많은 나라에 모두가 미국이나 일본에서만 태어나면 다른 나라는 다 멸망하게요? 그래도 중국에서 태어난 것은 행운이죠. 누군가는 태어나야 했기에 연변에서 제가 태어난 거예요. 그것이 저라는 것에 실망과 자괴감을 느낀 적은 사실 거의 없어요. 썩 나쁜 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역사를 배울 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죠.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단 걸 조금은 알았고 실제로 접하니 그 이상이었어요."
김은하 씨의 이 말은 적당히 한국 생활에 적응된 모습을 보여주는 함축적인 답변으로 설명 가능하다.
우선 그가 든 다른 나라 예시는 '미국'과 '일본'이다. 이 나라들은 한국에서 이제까지 선진국으로 취급된다. 1970년대생인 김은하 씨 나이를 고려하면 당시 한국에선 지금보다 더 미국과 일본이라면 한 수 위로 놓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다. 실제로 미국 동포와 일본 동포는 취업이나 한국 생활에서 조선족과 비교해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김은하 씨 세대 연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이 두 나라는 한국이 지나치게 선망하는 곳으로 분류됐다. 오히려 조선족 내에선 특별히 좋은 감정이 있을 리 만무한 곳으로 꼽혔다. 그런데 김은하 씨는 내게 이 나라를 예시로 설명해 결국 나 또한 한국인임을 자각시켜준 것이다. 일종의 빠른 이해를 위한 적절한 예를 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추가로 '중국에서 태어난 것은 행운'이란 말은 자신의 국적인 '중국인'을 확실히 되짚은 것이다. 그것이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사실은 변함없다. 이것은 국적 자체가 민족인 한국인에게 추가 이해가 필요한 대목이다. 조선족은 분명히 중국인이며 그 안의 소수민족이다. 이때의 '중국인'이란 표현은 민족을 뜻하는 것이 아닌 '국적'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한족을 중심으로 55개 소수 민족이 모인 중국 특성상 신분증엔 '조선족'이란 명시가 있다. 그들에게 민족은 일종의 계통을 뜻하며 국적은 거주하는 곳이자 법과 질서로 이뤄진 장소로 보는 게 마땅하다.
"한국에서 미국 국적 동포나 일본 국적 동포한테는 부러움이 섞여 있죠. 특히 한국에서 미국 국적 동포는 아직도 꽤 많은 혜택이 있는 것 같아요. 어째서죠? 우리는 끝까지 한국어를 배우고 사는데 그런 자부심 같은 건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분위기를 느낄 때가 많아요."
김은하 씨 말마따나 조선족은 중국 내 대우가 좋은 편으로 알려진 소수 민족이다. 생활수준은 상위권이고 애초 조선족 자치주 자체가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자치주다. 조선족은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연변 대학교는 조선족을 대표하는 종합대학교다.
"저희 때 대다수가 그랬지만 제가 대학교를 나오진 않았어요. 저도 그렇게 공부에 흥미가 있진 않았지만 집이 어려웠죠. 아마 제가 4년제 대학교를 나왔다면 어떻게든 연봉 오천만 원 이상을 넘겨 아예 한국 귀화도 고려했겠죠. 4년제 대학교 출신에 연봉이 높으면 귀화가 쉽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이 더 좋다는 거 그런 거 때문이 아니에요. 어쨌든 연변 자체보다 지금 한국이 이혼에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인 건 사실이니까요."
김은하 씨가 걸어온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집에서 뜯어말리는 '한족'과 결혼한 끝에 자식도 없이 일찍 이혼했다. 이는 연변에서 계속 살려면 여러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걸 뜻했다. 지금은 크게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이혼하고 여자 혼자 사는 건 한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 늘어나는 수고가 뒤따랐다.
"한족이 한국을 욕하면 괜히 기분이 나빴죠. 기본적으로 조선족은 한족과는 결혼하지 않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한국을 오니까 한국인들이 또 중국인을 욕해요. 저는 분명히 중국인이지만 정서적으로 조금은 경계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럴 때 기분은 참 오묘하더라고요. 중국이랑 한국이랑 축구하면 어디 응원하느냐는 질문도 참 많이 받았는데 대꾸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죽어라 일하고 사는데 축구는 뭔 축구냐 싶었죠."
10년 전 한국에서 H-2 방문취업비자를 받은 이후 김은하 씨는 식당일부터 가사도우미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차별과 부당함은 날이 샐 정도로 말할 수 있지만 이미 지난 일이라고 김은하 씨는 한사코 길게 말하길 거부했다.
"심지어 몇 년 전부터는 조선족 범죄를 소재로 한 영화가 꾸준히 나왔잖아요. 조선족의 끔찍한 범죄가 알려졌고요. 명백한 사실이고 저랑 같은 중국인이 저질렀다는 것엔 변명할 말이 없어요. 근데 또 통계로만 보면 그렇지도 않다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자이니치의 흉악 범죄는 뭐죠? 그들을 일본이 그렇게 대하던가요?"
국내 외국인 범죄율만 따지면 중국인 비율이 미국, 베트남, 몽골보다 낮다는 점이 전해지고 있지만 편견은 무섭다는 게 김은하 씨의 결론이다.
"요즘은 간병인 일을 하고 있어요. 속한 회사에서 연락이 오면 며칠부터 며칠까지 환자를 맡는 식이죠. 대개는 시작하는 일자는 있지만 끝나는 날짜는 환자분 보호자랑 얘기가 돼요. 그쪽에서 기분 나쁘면 하루 만에 잘려서 돌아올 수도 있고 반년 가까이 있는 경우도 있어요. 간병인 일을 왜 하냐고요? 의식주가 해결되고 적어도 병원에서 아무렇게나 부르지 않아서예요. 회사에서 옷 주고 밥 나오고 병원에서 잘 수도 있죠. 그래서 저 같은 조선족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간병인은 시험 경쟁률도 꽤 높아요. 요즘 젊은 중국인 친구들은 그렇지 않지만 저희에겐 그나마 나은 일자리죠. 꼬박꼬박 여사님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좋고요. 물론 환자분이나 보호자분들 중에선 대충 아무렇게나 막 부르는 분들도 있지만 병원 분들은 여사님으로 불러줘요.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아무렇게나 부르는 환자나 보호자는 대개가 자신들도 한국 사회에서 아무렇게나 불린다는 거예요. 차별과 막무가내도 전염이 있나 봐요. 그렇게 표현하고 싶진 않은데 돈 많은 분들이 오히려 점잖죠. 저희끼리는 그렇게 자주 얘기해요."
한국 사람 중 연변을 다녀온 이들은 꽤 놀란다. 분위기 때문이다. 적어도 연변 시내 중심 상점은 한국어와 중국어 간판이 반반이다. 같이 쓰는 곳도 많다. 여기서부터 한국인 머릿속 조선족 편견과 실재 마주하는 그들 도시 모습에 간극이 생긴다. 부분으로 전체를 보던 오류가 깨지는 셈이다.
"예전에 어디 신문에도 나왔던데요. 미국 LA 한인타운에서 한평생 산 할아버지는 영어 한마디를 못한대요. 굳이 영어를 쓰지 않아도 한국에서 살듯이 살면 될 정도로 불편한 게 없어서 그랬다죠. 조선족을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중국인이라고 하는 것과 그러면서도 한국어를 쓰는 것 등등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