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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셀 트랜스와 양자적 동성애를 상상하기

[특집 '사랑'] 편집위원 민상

인셀을 재발명하기


 김멜라의 소설 「저녁놀」의 서술자는 “의료용 실리콘 재질로 만들어진 검은색 모형 페니스”, ‘모모’다. 레즈비언 커플 ‘눈점’과 ‘먹점’은 그를 사 오지만 몇 번 사용하지도 않고 상자에 담아 방치한다. 급작스러운 실직(?)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 모모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급기야 눈점과 먹점을 향해 분에 차서 소리 지른다. 컴컴한 상자 속에서.


어쩌다 여자들이 이토록 섹스를 업신여기게 된 걸까. 섹스 없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들이, (…) 섹스의 상징이자 육체의 중심인 나를 버리겠다니. (…) 나는 두 여자가 미웠다. 날 이렇게 만든 너희, 너희 두 여자.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로 한 여자들. 질 좋은 음식을 요리해 먹고 안전하고 깨끗한 집에서 잘 살아보겠다는 너희 여자들![1]


 당연하게도 모모의 말은 ‘여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함께 버려진 철학책들 사이를 퀘퀘하게 메아리칠 뿐이다. 폐쇄적인 회로 속에서 모모의 분노는 결국 대상을 찾지 못해 폭주하고 만다.


 딜도의 입을 빌린 이 비장한 독백은 곧장 오늘날의 인셀{incel: 비자발적 독신주의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상자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딜도와 달리, 2014년 엘리엇 로저의 총기 난사 사건부터 작년 한국의 연쇄 칼부림 난동에 이르기까지 인셀 남성들은 여성혐오가 뒤섞인 증오를 테러리즘에 담아 분출하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 ‘인셀’은 명백히 남성화된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며, 사회부적응, 게임중독, 특정 커뮤니티 사용 등의 하위요소로 분절된다. 심지어 ‘인셀’이라는 낙인이 찍힌 당사자들에게마저 그러하다.


 이러한 인식은 인셀 커뮤니티를 뒷받침하는 남성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구체화되는데, 이들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식이 사회적 정체성의 공통성에서 출발하는 연대라기보다는 페미니즘이나 인싸들을 향한 적대감에 바탕을 둔 탓이다. 공동체가 매끈하게 형성되는 데 부족한 정동적 아교 역할을 이들의 무정한 세계관이 대신 떠맡는 형국이다. 남성혐오적인 세계에서 비참한 처지를 바꿀 수 없으니 자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주장하며 자살 팁을 공유하는 블랙필{BlackPill}들은 그저 단적인 예시에 불과하다.


 레드필{RedPill}[2] 이론과 그 한국적 판본인 설거지론 또한 남녀 간의 연애와 결혼을 소박한 형태의 진화심리학과 성 자유경제로 설명하려 한다. 이 유사이론은 니체와 키에르케고르를 얄팍하게 인용하는 모모의 남성학처럼, 고급 담론의 형식과 ‘불편한 진실’이라는 동어반복적인 수사에 의해 환각적으로 유지된다. 요컨대 레드필 이론을 비롯한 인셀, 대안우파들의 담론 체계는 담론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가져오는 효과에 더 집중하는 닫힌 시스템이다. 나무위키, 커뮤니티의 정리글 등은 음모론 내에서 근거로 차용되는 데이터베이스들을 최소한 그 체계 안에서는 최종적인 증거물로 보이도록 연출한다. ‘여성우월주의로 변질된 한국 페미니즘’에 대안으로 제시된 이퀄리즘, 패밀리즘 등의 가상 이념은, 그렇게 남초 커뮤니티 내에서만 인용되는 유령이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논리를 논파하기란 쉽다. 이들이 사용하는 커뮤니티의 방언과 여러 기호를 매개로 이들을 ‘검거’해 내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곧 인셀 문제의 해결-만일 그런 상태가 존재한다면-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먼저 인셀은 남초 커뮤니티 일반과 구분하기 쉽지 않아, 인셀들의 언어와 논리체계를 논박하는 것은 그들에게 무의미하다. 또 인셀을 이미지로 치환하려는 시도는 인셀들이 자신들의 내러티브를 강화하고 차가운 공동체성을 구성할 수 있도록 촉매를 던져주는 것에 불과하고,[3] 결국은 ‘남성혐오 vs 여성혐오’라는 가짜 대립을 심화시킬 뿐이다.


 ‘집게손가락 모양’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를 곧장 메갈리아 유저나 ‘페미’로 낙인찍고 폭력을 가하는 일은 일베 용어를 썼다는 이유로 그를 직접적으로 일베 유저로 판단하는 것과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 기호의 배후에 무엇이 있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남초 커뮤니티가 ‘여성가족부’나 넷 페미니스트들의 ‘기호 검열’[4]을 근거 삼아 인셀 vs 페미라는 도식을 확대 선전했듯,[5] 기호와 이미지 차원에서 진행되는 ‘검열 전쟁’은 남초 커뮤니티가 집합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남초 커뮤니티 전체가 ‘인셀’, 혹은 ‘도태남’은 아니며, 이 둘은 커뮤니티의 공통 문법로만 이어져 있다. ‘도태남’은 남초 커뮤니티의 지형도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남초 유저들은 이 인접성과 정체성의 교란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모든 것이 완벽해보이는 소위 ‘알파메일’ 남성을 향해 ‘제꼬삼’[6]이라고 댓글을 다는 수많은 유저들이 정말 모두 도태남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혼란은 애초에 인터넷 공간으로 진입하는 순간 사회적이고 전통적인 정체성과는 해리되어 별개의 문법의 정체성이 생성되기 때문에 발생한다.[7] 초기부터 ‘잉여’라는 기표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공동체성을 형성해온 DC인사이드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도태남들 입장에선 억울할 일이다. 아싸는 아싸 자격마저 가상 공간에서 약탈당해 ‘빼앗긴 아싸’가 되었지만, ‘빼앗긴 아싸’가 밈으로 정착하며 이마저 빼앗길 처지다.

 

 남초 유저들이 도태남 정체성을 인용하는 이유가 ‘너도 병X, 나도 병X’이라는 ‘정서적 평등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 할 때,[8] 도태됨은 하나의 핑계로서 남초 유저의 자기기술을 몇 개의 문화적 코드의 집합으로 뭉뚱그려버린다. 그 결과 자신들은 정치적 올바름 담론이 설정한 사회적 소수자와는 달리 ‘진짜 약자’라는 인셀 남성들의 주장은 남초 커뮤니티의 부족주의와 ‘페미’라는 가상의 적 사이에서 공허하게 부유하게 된다. 결국 도태남들은 남초 커뮤니티 전체로 희석되면서 역설적으로 비가시화되고, 이들과 도태성을 공유하는 퀴어, 장애인, 여성들의 ‘인셀적인’ 면모 역시 뒷전으로 아득히 밀려나 버린다.


 이 난장판 속에서, 도태성과 인셀됨에 관해 사유해볼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팬데믹 기간 우리가 마주했던 사회적 단절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그 모든 연결의 노력들이 무색해지는 것이다. 인셀들의 낮은 사회성과 그들이 ‘좋은 관계’를 수립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향한 경멸은 폭력과 혐오를 남발하는 인셀들만 정밀타격하지 않는다. 질병이나 노화 등으로 사회적 연결이 희미해지는 일에서처럼, 소수자성으로 환원하기 애매한 도태됨은 많은 이들이 마주한, 또 잠재적으로 마주할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셀 문제를 생산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 남초 커뮤니티가 구사하는 정의나 이미지에 발맞춰야 할 조금의 가치도 없다. 우리가 인셀을 살펴보는 이유는 인셀 남성에게서 여성혐오와 남성성의 버그들이 극단화된 기표로서의 층위를 발라냈을 때 남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존재로서 인셀의 기원에 다가가기 위해서다. 인셀이란 용어는 애초에 1993년 캐나다의 여성 알라나{Alana}가 은둔형 외톨이들을 위해 개설한 넷 커뮤니티의 이름{Alana’s Involuntary Celibacy Project}에서 기원했다. 이 시기 인셀은 성별에 따라 분화되기 전이었으며, 이성과의 섹스를 비롯한 타인과의 정서적인 연결이 끊어져 있다는 사실이 여성혐오 등의 특정한 각본을 채택하기 전이었다. 거꾸로 말해, 알라나의 인셀 커뮤니티는 고립이라는 공통성을 바탕으로 성별 등의 정체성을 횡단해 연합할 수 있는 플랫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루소가 사회계약 이전의 자연 상태의 인류를 상상하듯이, 시원으로 돌아가 개념의 차원에서 인셀을 재발명할 수 있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스기타 슌스케는 ‘인셀 레프트’라는 명칭을 제안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름의 취약함을 지닌 남성들의 괴로움이나 박탈감에서 출발해, 그들의 분노를 정확한 대상을 향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9] 그에 따르면 인셀 남성들은 스스로를 사회적 강자인 여성들에 의해 억압받는 소수자로 상상하는 반면,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이들은 여성을 향해 전방위적 폭력을 난사하는 다수자이자 가해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수자’나 ‘소수자’라는 집합 어디에도 안정적으로 포섭되지 못하고 범주 바깥으로 밀려난다. 이들은 갈등의 주체이면서도 역설적으로 동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잔여, 찌꺼기’로 남고 만다.[10]


 잔여로서의 남성들은 이름을 가지지 못한다. 그들이 꽉 쥐고 있는 ‘남성’이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그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남성이라는 기표는 너무나 크고 헐렁해서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 옷과 같다. 때문에, 남성성의 바깥을 상상하지 못해 남성성을 수행하는 레드필, 인셀 남성들은 자신과 남성적 코스튬 사이의 간극을 유사 담론으로 메꾸며, 이는 필연적으로 음모론의 속성을 띄게 된다. 이 음모론의 역사가 지금까지는 곧 여성혐오적 테러리즘과 대안우파의 역사였다. 아도르노나 라이히가 극우주의를 심리적인 문제라고 지적할 때, 이것은 오늘날 인셀 남성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진단이다.


 이 ‘심리적인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일단 인셀이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인 여성혐오적 속성들, 남초 커뮤니티의 집학적 정동에 대한 논의를 잠시 (고의적으로) 미뤄보자. 문제적인 인셀 남성들이 남성에 미달해서 남성성에 집착하는 존재들이라면, 그들의 욕망의 균열과 실패는 곧 남성성 수행과 이성애 각본의 그것이기도 하다. 그들만이 이뤄내고 있는 고유한 실패가 있으며, 그 실패는 그들만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남성성이라는 공간 내부에 골고루 포진해 있으며, 실패의 거점들을 둘러보는 다크 투어는 경계나 형태가 명확하지 않은 남성성의 전체상을 그려보는 데 유용한 방법일 수 있다.


 트랜스 문화 연구자이자 FTM 트랜지션을 경험한 프레시아도는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 내는 정치적 테크놀로지’[11]로서 섹슈얼리티와 건축의 유사성을 언급하면서, ‘몸의 역사를 건축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때 우리의 몸이 아무리 양산형 조립식 몸이라 하더라도, 거기엔 불법증축, 리모델링, 인테리어 등 디테일들을 범람시킬 여지가 숨어있다. 이 몸들이 만들어져 집합적으로 형성하는 공동체의 섹슈얼리티는 마치 수많은 건축물들이 모인 도시의 모습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눈에 파악되는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남성성을 하나의 도시로 간주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곳으로 떠나볼 수 있다.  


섹스가 뭐 별거냐 - α 메일 따라잡기


 인셀 남성들이 수행하고자 하는 남성성의 조감도는 남성성의 핵심에 위치한 ‘알파메일’보다는 남성성이라는 메트로폴리스의 외곽이나 위성도시에 의해 더 명확히 그려진다. 인셀 커뮤니티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알파메일’이 무엇인가에 관한 토론이 오간다. 미국에서 전파된 레드필의 정의에 충실하게 앤드류 테이트를 알파메일로 추앙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4인 가족을 부양하는 건실한 화이트칼라 가부장(싸이의 <아버지>에 등장하는 것 같은)이 진정한 알파메일이라는 한국적인 주장(?)을 펼치는 부류도 있다. 알파메일의 정의에 관한 논쟁은 도덕, 근육, 유전, 자본을 오가지만 흐릿한 이미지만 남길 뿐 어느 부분에서도 합의되지 못하고 일종의 공백으로 주어진다. 단 한 가지 요인인 섹스를 제외하면, 알파메일은 곧 α(없는) 메일에 다름아니다.


 라캉에 따르면 남성은 세상의 모든 쾌락을 독점하고 원초적 아버지와 같은 예외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주체다. 이러한 ‘팔루스적 향유’는 남성화된 표준으로서 ‘개인’을 형성하는 자질이 된다. 예컨대 근대 문학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교양소설은 ‘성숙한 남성의 형식(루카치)‘으로서 개인과 사회가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구축되는 과정을 그려왔다. 이곳에서 남성은 ‘진실 찾기’에 몰입한 인식의 주체로 드러나는데, 이때 여성과 그에 접근하는 수단으로써 섹스는 인식이 닿을 수 없는 타자이자, 주체의 욕망과 역능의 잉여이자 틈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남성 주체의 성장이란 섹스나 강간, 배신, 성 구매 등 우회를 통해 여성이라는 희생 제물을 ‘섭취’하면서 달성되어 왔다.[12] 인셀 남성들에게 여성이라는 기표 역시 근대 교양소설에서의 그것과 유사한 역할을 떠맡는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이들에게는 교양서사와 섹스라는 ‘성인식’이 불가능하고,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구실에 불과하다.


“유혹당한다는 기분은 좋더라고… 실제론 그런 건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그런 기분을 느껴본 거라서 좋았어. (…) 그냥 섹스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 난 거기서 친밀감을 배우고 싶었던 거야(로라 베이츠, 2023: 87).”


 그러나 성 구매를 통해 성관계욕에 우선하는 친밀감을 향한 욕망을 발견한 이 사례에서, 이 도시의 생활권을 배치하는 기제로서 섹스와 여성을 향한 판타지는 지배력을 잃고 만다. 우리는 여기서 이성애-삽입-섹스만을 재화로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성 경제 체제의 가능성을 엿본다. 섹스와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필연적이라는 각본을 부식시키거나, 섹스에 과부하를 걸어 파산시키는 방법으로 말이다.



[그림1] ©DC인사이드   [그림2] ©웃긴대학


그림 1은 디시인사이드의 게시물이다. 제목은 "섹스가 뭐 별거냐", 본글은 "더운 날에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치킨에 맥주 먹으면 그게 섹스지.."라 적혀있다. 그림 2는 웃긴대학의 한 게시물 덧글이다. 그림 1의 내용에 대한 답변의 형식으로, "아닙니다. 정상적인 섹스라 함은 남녀간에 서로의 몸을 애무하다 남성의 성기가 발기가 되고 여성의 성기에서 애액이 나오면 남성이 자신의 발기된 성기를 여성의 성기에 넣고 수십차례 왕복 운동을 한 뒤 정액을 사정하는 것이 섹스입니다. 님께서 하신 것은 그저 식사 입니다."라고 적혀있다. 그림 설명 끝.


 남초 커뮤니티에서 큰 파급력을 얻었던 ‘섹스가 뭐 별거냐’ 밈(그림1)은 다양하게 변용된다. 남성 호모소셜에서 사실상 유일한 쾌락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섹스’를 하지 못해 체념한 유저들이 자조적으로 쓰는 밈이다. 이 밈에서 섹스는 쾌락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효과만 남긴 채, ‘에어컨’과 ‘치맥’, ‘SSS급 가챠 성공’ ‘차돌박이에 쫄면’, ‘헌혈’, ‘K리그’ 등으로 끝없이 미끄러진다. 이 밈이 ‘뇌절’ 단계로 나아가며 점차 파생 밈이 생겨나기도 했는데(그림 2), 대개 섹스의 사전적 정의를 들어 끝없이 환유 되는 섹스를 멈춰 세우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미끄러짐은 그리 간단히 중단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라캉이 ‘성관계는 없다’고 할 때, 그것은 섹스가 근원적인 의미에서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이 욕망은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충족될 수 없어 고통을 수반하는 탓에, 섹스를 통해 엿볼 수 있다고 가정되는 실재는 언제나 언뜻언뜻 섹스에 실재의 몇 조각을 끼워 넣는 식으로만 관측된다.


 때문에 라캉식으로 말해보자면, 섹스를 향하는 듯 보이는 욕망의 대부분은 사실 섹스를 향한 것이 아니며, 차라리 실재를 향한 욕망에 더 가깝다.[13] 지젝은 딜도에 소형 카메라를 부착해 여성의 질 속으로 삽입하는 종류의 포르노를 예시로 들어 포르노 중독자 남성이 넘은 특이점을 보여준다. 포르노 중독자 남성의 욕망 경제 체제는 ‘정상’적인 섹스를 즐긴다고 가정되는 이성애자 남성의 그것과 질적으로 구분된다. 점점 자극적인 포르노에 길들여져 실제 섹스에서는 심인성 발기부전으로 쾌락을 즐기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포르노는 이때 섹슈얼리티의 가소성{plasticity}을 이용해 남성을 포르노중독자로 가공한다. 수많은 레드필 구루들이 알파메일이 되기 위한 첫걸음으로 ‘포르노를 끊어라’라고 가르치는 덴 이유가 있다. 남성향 포르노는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적 시선에서 출발하지만, 포르노 중독자들은 엄밀히 말해 더는 남자가 아니게 된다. ‘진짜 섹스’라는 실재의 보증서, ‘성숙한 남성’으로 향하는 급행 티켓을 발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프레시아도는 섹스, 그리고 섹슈얼리티를 보증서가 아니라 ‘접속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14] 섹스 그 자체를 목적으로 섹슈얼리티의 각본을 반복 연주하지 않고, 섹슈얼리티를 섹슈얼리티의 용법과 문법만으로 재현될 수 없는, 더 큰 차원의 쾌락이나 정동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포르노 중독자들의 섹슈얼리티는 프레시아도가 정의하는 ‘트랜스{transness}’의 범주에 포함되거나, 연결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트랜지션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뿐 아니라, “다른 욕망 경제체제로 이행, 신학적 약물주입, 몸의 탈성화, 탈생식화가 지배하는 새로운 섹슈얼리티의 발명(프레시아도, 2022: 19)”이다. 트랜스는 퀴어 정치에서 활용되는 정체성이기 이전에 욕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속성과 맞닿아 있다. 덧붙여 그는 이 트랜스가 트랜스 당사자들의 정체성이라기보다는 딜도와도 같은 인공보철물로서, 이성애주의를 극복할 잠재력이 있는, ‘대항성주의’의 방법론으로 평가한다. 포르노 중독자들 같은 존재들을 대항성주의의 전위에 세울 수 있을까?


 물론, 포르노 중독자들이나 인셀 남성들의 섹슈얼리티가 헤게모니 남성성과 다른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대항성을 띄거나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비약이다. 프레시아도에게 대항성주의자의 섹슈얼리티가 “다양성, 연결, 공유, 전의의 경제, 사용의 경제에 속(프레시아도, 2022: 25)”하는 반면, 잔여 남성들의 그것은 여전히 남성성 내부의 교통신망에 단단히 붙들려 이성애주의를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대도시의 비유로 돌아오자면, 잔여 남성들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몰락한, 임대 광고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구도심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들은 이전 시대의 가부장적 남성상을 그리워하며 도심의 마천루를 올려다본다. 도시 외부의 소수자들-여성, 장애인, 그리고 퀴어들-이 공백의 남성성을 구성적 외부로 지탱하는 와중에, 남성성 내부의 잔여들 역시 그것을 보조하고 있는, ‘구성적 내부’나 다름없다. 그것이 없었다면 도시는 애초에 성립하지 않았을 테다.


 그렇다면, 조금 뻔뻔해져 볼 수는 없을까? 무더운 날 에어컨 밑에서 치킨을 먹는 행위가 섹스가 아닐 이유는 무엇일까? 섹스가 남성기의 여성기에로의 삽입과 사정이라는 사건으로 한정되는 일은 확실히 이상하다. 이 과정에서 세계의 에로틱한 표면은 성적인 생식기관으로 축소되고, 남근만이 성 충동을 생산하는 유일무이한 중심인 것처럼 특권화된다. ‘섹스가 뭐 별거냐’는 질문은, 확실히 이 특권을 향한 볼멘소리며, ‘대항성주의자’들이 들고 휘두를 수 있는 하나의 딜도다.  


나를 만지지 마라 – 제대로 만지는 법으로서 BDSM과 대항성 계약


 그럼에도 여전히 인셀 남성들에게 섹스가 실재를 제시하는 어떤 상징이나 대유로 활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섹스가 일종의 ‘만짐’이라는 차원에서일 것이다. 남성의 시선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아온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도 만짐, 그리고 촉각은 시각을 가장 근거리에서 보조하는 감각으로 여겨져 왔다. 버클리 주교는 촉각이 시각과 함께 대상을 삼차원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메를로퐁티는 시각이 언제나 특정한 시공간에서 대상을 국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시각이 이미 촉각과 교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15]


 근대 이후 젠더 위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는 남성과 시각의 공모가 새로 자리 잡는 한편, 대상(여성)과의 만짐(접촉)은 그 빈틈을 메꾸는 보충재로 사용되어왔다. 단적인 예로 남성적 교양소설에서 대상(여성)과의 접촉은 언제나 부분적으로 일어난다. 최인훈의 『회색인』에서 ‘준’은 폭격을 피하려 엎드렸을 때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한 여성과의 접촉과 ‘따뜻한 살의 압력’을 기억한다. 여성은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조건 속에서 ‘생명’의 파편으로 제시되면서 남성-글쓰기-주체에게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는다. 때때로 교양소설에서 여성이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입구이자 계기로 작동하기도 하는 이유다.


 당연하게도 이 계기가 꼭 여성이나 섹스일 필요는 없다. 여전히 섹스, 그리고 섹슈얼리티가 정체성 탐색의 대유로서 차지하는 역할을 간과할 순 없지만 말이다. 타인과의 관계선이 단절된 인셀들에게 필요한 계기는 앞서 살펴본 성구매자 인셀의 사례에서처럼, 무엇보다도 섹스를 포함하는 ‘만짐’을 필두로 하는 타인과의 ‘만남’이다.


 부활한 예수의 몸을 만져 부활을 확인하려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가 건넨 말,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에서 사유를 출발시키는 장 뤽 낭시는, 예수의 말이 ‘나를 만져라, 떨어져서, 제대로.’란 의미라고 해석한다. 만짐은 무엇보다 대상을 감각하는 직접적인 방법이지만, 그 직접성을 과신하는 만짐은 우리가 정작 대상을 만짐으로써 대상과 격리된다는 사실, 대상과 주체 사이에 피부라는 해체할 수 없는 경계선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고로, 예수가 말하는 ‘제대로 만져라.’란 명령은 이 망각을 경계하면서, ‘만지면서 밀어내라’는 주문이다.[16]


 성노동자인 막달라 마리아, 문둥병자, 시체, 생리 중인 여성과 거침없이 접촉한 예수는 사탄과 연합했다는 비난까지 들으며 사회적 관습과 유대 율법을 위반했다. 그에게 율법과 관습은 거침없이 만지되, 아무것도 만지지 못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죄인과 정결한 사람의 변별은 예수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안락함 바깥에서 희생과 배신, 그리고 기쁨을 향해 열려있기로 하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로 떠나며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만지지 않음의 만짐’을 허락한다.


 제대로 만짐, 그리고 거기서 출발하는 좋은 관계란, 예수가 보여주듯 만짐과 관계 속에 공존하는 ‘밀어냄’과 ‘비-관계’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대상과 ‘직접’ 만나지 못하고 언제나 프레시아도가 말하는 것과 같은 ‘접속기들’, 말하자면 딜도, 생체 성기, 스트랩 등의 접속 모듈을 통해서만 타인을 만나고 만진다. 대항성주의자들이 두 개의 모듈을 통해서 활성화할 수 있는 ‘대항성 관계’는, 언제나 ‘참여자 모두가 서명한 합의된 계약의 산물’이다. ‘대항성 계약’은, 프레시아도에 따르면 자신의 ‘성 관행’, 그리고 섹슈얼리티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화된 허구’들을 명확히 제시하면서 성립할 수 있다. 관계의 배후에 어떤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이 어떤 문법을 따라서 흐르는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욕망이 얼마나 비천하고 더러운 것인지는 제쳐두고서라도 말이다.


 그 계약이야말로 서로를 ‘만지지 않으면서 만지’는 방법이라면 어떨까. 이때 최선의 관계의 전범은 법적이지 않은 계약들, 이를테면 돔과 섭 사이 약속의 다발들 위에 관계를 수립하는 BDSM과 비슷한 형태가 된다. 서로의 필요를 충족하는 약속이되, 그것을 결산하고 회계 처리해 버리지 않는, ‘세이프워드’와 같이 단단하게 마련된 약속의 틀 아래서 뭔지도 모를 것들을 주고받는 부정확한 약속들 말이다.


 이런 약속이나 관계들은 BDSM이 그렇듯 변태적이라고 규정된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Fifty Shades of Grey) 등 BDSM 테마 유행에 대한 일루즈의 분석처럼, BDSM은 남성-여성 대신 돔-섭이라는 순수한 형태의 역할만을 남겨 성 이분법에서 탈주하려는 욕망을 반영한다. 역할이 주는 권력의 차이는 남아있더라도, 그 역할엔 성별과 관련 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BDSM 계약 아래서는 이성애 제도의 불평등을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역할이 주는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 이때 BDSM은 삽입 섹스에서 남성의 사정으로 중심화되는 쾌락을 거부하고, 절차화된 시나리오와 제스처에 따라 고통과 쾌락을 서서히 끌어올리고 계발한다. 계약은 주체를 규정하는 욕망의 자발성을 발라내어, 두 파트너를 연결하는 관계선 전반에 넓고 균등하게 펴 바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체계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BDSM의 변태성은 이성애 각본의 다수성으로 회수 당하기 쉬운 성질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일루즈의 말마따나 BDSM은 주체가 자신의 고통과 취약성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자기 계발’의 일종이기에, BDSM의 해방성은 자아를 강화하는 한편 안정적인 사랑을 획득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회수되고 만다. 일루즈는 이런 탓에 BDSM 테마의 인기가 ‘페미니즘이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다’는 증거라고 말한다.[17] 여성들이 욕망의 불균등함과 폭력을 향한 두려움을, 욕망의 능력을 포기하고 BDSM 판타지가 제공하는 안락한 남성적 소유와 보호의 모델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해소하는 모습을 관측했기 때문이다.


 일루즈가 본 BDSM의 이상이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틈’을 메꾸고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한 교양 서사의 왕좌를 위협하고 있는 한편, 대중문화가 재현하지 않는, 퀴어한 섹슈얼리티 실천에서는 그러한 ‘완성되고 강화된 자아’의 자리가 공백 상태로 놓여있다. 결혼을 통해 가족을 이루며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이성애의 진보 서사와 달리,  ‘미래’라는 시간을 상정하는 일이 어려운 ‘퀴어 부정성’의 영향이다. 때문에 퀴어의, 퀴어한 시간은 언제나 이성애 규범의 시간표를 꼬이게 하고, 계획에 없던 불안정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18] 퀴어들에게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 우정, ‘식’[19], ‘라이크’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말과 달리 퀴어들에게 사랑과 우정은 늘 얼마간 혼합되어있다. 퀴어들의 만짐은, 언제나 ‘만지지 않음’을 함축하는 것이다.  


여장 갤러리와 시디레즈의 양자적 동성애


 ‘퀴어’라는 범주는 관습과 ‘율법’의 바깥에 있다. 때문에 퀴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연합과 단절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영토로 남는다. ‘정상 시민’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변태’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게이 운동의 맥락 속에서, 이 누명을 ‘정면 돌파’하고자 소수자로서의 층위와 변태의 층위가 연합했던 데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두 단위의 연결은 완전히 겹치거나, 분리된 채 차이가 기워지는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김규진의 레즈비언 출산이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 인정 투쟁이냐 가족주의로 대표되는 정상성을 경계해야 하냐로 갈려 논쟁을 유발했듯이, 이 둘은 완전히 봉합될 수 없는 만큼 쉽사리 화해하기도 어렵다. 


 성적 정체성/지향성으로서 ‘퀴어’라는 정체성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여겨지는 섹스는 이런 혼란이 전면화되는 공간이다. 섹스는 오랫동안 퀴어운동에서 ‘벽장’에 갇혀있던 퀴어 당사자가 사회로 나와, 정체성을 확인하고 성장하는 단계로 여겨져왔다. 퀴어 운동과 반동성애 운동이 늘 ‘사랑’이라는 상징을 두고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동안, ‘사랑’이라는 기호로 도저히 퉁쳐지지 않는, 무성애나 ‘조용한 퀴어들’, 경계에 놓여있는 ‘더러운’ 욕망들은 전략상 퀴어하지 않은 것으로 밀려나고 만다.


 한국 퀴어 커뮤니티의 지형 속에서 크로스 드레서(이하 시디)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미국 퀴어 운동에서 크로스드레서들은 트랜스젠더의 가시화를 이끄는 존재들로 상징적 특권을 누렸다.[20]  반면 퀴어 당사자들의 가시화와 ‘인정투쟁’이 우선되는 분위기 속 변태 층위보다 소수자 층위가 우선되었던 한국에서 시디들은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 배제당해 왔으며, 퀴어와 덜-퀴어, 반-퀴어와 비-퀴어 사이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해 왔다.


 디시인사이드의 여장갤러리(이하 여장갤)는 이처럼 불안정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코스프레 갤러리, LGBT 갤러리, 변장 갤러리 등 인접한 갤러리들이 포용하지 못하는 정체성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21] 그래선지, 여장갤에는 오타쿠 코스어, 트랜스젠더, 러버,[22] 크로스드레서, 그 외의 퀴어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다.


 이용자가 적은 마이너 갤러리 시절 시디들이 모여 소규모 친목을 도모하던 갤러리는 2016년 2월 5일 정식 갤러리로 인정받으며, 큰 변화를 맞이했다. 정식 갤러리가 되며 많은 수의 유저들이 유입되었고, 디시인사이드 특유의 커뮤니티 문법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23] 그 결과 여장갤 유저들은 ‘도태 한남’으로 경멸받으면서 디시인사이드의 정체성 지도 위에 자리잡게 되었다.


 여장갤러리는 오늘날 도태갤러리, 모태솔로갤러리 등과 함께 전체 갤러리 중 가장 ‘심연’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반사회적인 성향을 띄는 앞선 두 갤러리과는 달리 여장갤러리는 가장 변태적인 욕망을 가진 이들이 모여드는 상징적 하수구로 인식된다. 이같은 디시의 세계관에는 시디와 트랜스젠더, 게이들을 향한 호모포비아가 크게 기여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들을 향한 기이한 선망도 자리잡고 있다. 여장갤러리가 LGBT갤러리의 잔여이자, 디시인사이드가 표방하는 인터넷 남성성의 잔여로서 이들의 외연을 구성하고 남은 건축 폐기물 처리반의 역할을 떠맡고 있는 탓이다.

 

 예컨대 여장갤러리에 유입된 소위 ‘분탕’ 유저들은 마치 관광하듯이 갤러리를 둘러본다. 여장갤러리의 섹슈얼리티나 정체성은 이들에게 명백히 소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 관광에는 위계적인 시선이 작동하게 된다. 여장갤러리의 덜-남자, 비-남자들을 조롱하고 훈계함으로써 ‘남자’라는 이름을 안정적으로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유입 유저가 작성한 글[24]은 이러한 시각을 대변한다. 작성자는 러버가 시디와 달리 ‘도태남일 확률이 높지만 스스로 유사여성이 되기를 자처하지 않는 이상’, 또 ‘성기를 제거하지 않은 이상’, ‘정상적인 여성과 교제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웅변한다. 이는 모두 러버들의 핸드폰이 ‘역겨운 여장남자 컨텐츠’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므로, 작성자는 핸드폰을 치우고 ‘정상적인 남자’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이 글은 앞서 살펴본 ‘알파메일’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자기 계발 담론을 여장갤에 적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상적인 남성을 변형시키는 포르노의 가소성은 여전히 위협적으로 그려지며, 정상성의 기준은 실제로 크로스드레싱을 수행하는지, 성기가 달려있는지 등으로 환원된다. 마치 탈동성애 운동이 그러하듯이, 이성애자 남성의 외관을 유지하는 러버들은 남성성이 훼손되는 시작점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여장갤로 놀러 온 관광객들이 ‘구원’의 손길을 뻗는 대상으로 호명된다. 동시에 시디들에게 ‘시디들을 이용만 할 뿐’이라며 경계를 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러버들 중에서도 가장 멸시받는 부류가 있으니, 바로 ‘시디레즈’이다. 이성애자 남성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두 시디-러버가 연애를 하는 경우다. 이 관계는 두 이성애자 남성의 관계라는 점에서 ‘게이’에 불과하다며 비난받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관계를 수식하는 데 꿋꿋이 ‘레즈’라는 말을 사용한다.


 시디레즈는 심지어 당사자들에게도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각자의 변태적인 욕망에 따라 ‘시디레즈 하는 애들’의 형식으로 묘사된다. 그렇다 해서 이런 실천이 임시적이거나 일탈적이지만은 않다. 시디-러버들이 자신들의 관계를 ‘연애’라는 약속의 집합으로 묘사하는 순간, 이는 약물을 중단하듯 ‘끊을’ 수는 없는 성질의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여성으로 정체화한 적이 없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이들이 ‘레즈’일 수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시디레즈는 ‘여성’의 약자성이 가진 독성을 벗겨내고 그 이미지만을 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듯 보인다.


 시디레즈들은 일단의 타협과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레즈비언’이라는 범주를 약탈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관계에 임하며 무엇보다 ‘여자’가 되고자 하는데, 당장 이성애자인 시디레즈 파트너에게 ‘여자’로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트랜스 문화 연구자 안드레아 롱 추가 정의하듯, “타인의 욕망에 자리를 내어주는(롱 추, 2022: 21)” 존재론적인 상태에 더 가깝다. 이들이 여자로 보이기만 한다면, 이 관계에서 각자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그리 중요시되지 않는다. 여성을 욕망하는 일과 여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TERF(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하듯 모순이나, 교통사고 같은 일이 아니다. 최소한 그들에게는 그렇다. 알파메일 신봉자들이 혀를 차듯, 이미 ‘강을 건너가’ 버린 시디레즈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상대를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키고, 배신이라는 기회비용을 지불하며 상대의 수요와 나의 수요를 맞춘 계약을 건설하는 일이 그들에겐 최선이다. 


 그렇다고 시디레즈들이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일을 섣불리 긍정하기에는 의문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당연하게도, 시디들이 여장을 하는 이유에는 젠더 디스포리아, 오타쿠의 코스프레 욕망, 다른 시디레즈를 만나기 위해서 등등 수많은 이유가 개입한다는 점에서 시디레즈는 폭력에서 안전한 낭만적이거나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이들의 퀴어함을 퀴어한 ‘장면’으로 호명하는 일은 리버럴들이 공허하게 약속하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미래, 혁명, 예술성이라는 ‘토큰’들과 납작하게 결부시키는 일과 무엇이 다를까? 이름을 빼앗긴 레즈비언과 여성들은? 이 전유는 용납될 수 있을까?


 이성애자 남성임에도 자신과 동료 펠릭스 가타리의 관계를 ‘분자적 동성애’ 관계라고 부른 질 들뢰즈 역시 유사한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당시의 동성애자들은 들뢰즈가 ‘똥지림’, 동성애 ‘게토’의 경험 없이 동성애를 ‘선의로 옹호’할 뿐이라고 지적했다.[25] 그럼에도 들뢰즈는 자신이 ‘몰적으로는 동성애자’라며 정정을 거부했다. 들뢰즈에게 사랑은 ‘특정 기호들을 통해 상대방을 재인식하는 일’이었다.[26] 사랑의 불가능함과 난해함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한정된 기호 세계 내에서 가능한 것들부터 쥐게 만드는데,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동성애가 이성애에 우선하는, 따라서 ‘사랑의 진실’인 이유이다.


 시디레즈는 이때 두 가지 동성애의 기호 체계, 남성 동성애(결국 게이 아니냐)와 여성 동성애(“레즈”)를 동시에 참조한다. 물론 방점은 후자에 찍히지만 말이다. 이들의 ‘시디레즈 하기’는 분할된 성들 사이의 횡단이라는 점에서 ‘분자적’이지만, 이 횡단은 들뢰즈처럼 철학 언어의 층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현전하고, 트랜스젠더와 레즈비언이라는 두 정체성을 획득하기에 미달하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해석의 잔여로 남는다.


 관측하는 각도에 따라서, 시디레즈를 ‘하는’ 이들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이 관계는 이성애일 수도, 동성애일 수도, 영원히 그런 정체성으로 뭉쳐지지 않는 변태성의 부스러기 중 하나로 보일 수 있다. 혹은, 동시에 이 모든 것일 수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시디레즈는 ‘양자적 동성애{quantal homo-sexuality}’이다. 양자 얽힘 현상처럼 극도로 불안하고, 계약의 내용은 두 행위자 중 어느쪽에도 일방적으로 속하지 않고 높은 상호의존성에 의해 시시각각 쓰인다. 이들이 참조할 만한 재료가 많지 않은 탓이다. 이들 앞에서 들뢰즈의 위장술은 비로소 말장난에 불과해진다.


 이 계약이 이성애 각본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만지는’ 하나의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시디레즈 관계에서 정체성은 지향성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이 너를 바꾸고, 네가 원하는 것이 나를 바꾼다. 우리는 우리이기를 그만두고 부정확해지면서 서로를 더듬을 수 있게 된다. 70년대 미국의 정치적 레즈비언 운동이 “정치적인 힘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바꾸고 스스로를 재정향”[27]하는 대안적 실천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가부장제의 억압적인 기제 속에서 이성애 각본 수행을 거부한 자들이 택한 선택지가 정치적 레즈비언이었듯이, 시디레즈는 사랑받을 수 없는 이들, 퀴어 커뮤니티와 주류 사회 모두에서 배척당한 자들이 택한 거처이다. ‘레즈비언’이라는 용어는 둘 중 어느 경우에든 정의의 부정확함과 대책없는 낙관주의에 거처를 제공한다.


 이 거처들은 당장 연대, 전복 같은 더 나은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 억압적인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세계와 ‘분리주의’를 택했던 것처럼 오히려 단절이나 절단에 더 가깝다. 특히 여장갤러리의 욕망의 생태계, 혹은 성 경제에서 탈락한 이들이 꼭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윤리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으며, 그러기도 힘들다. 여장 갤러리와 퀴어 커뮤니티를 오염시키고 있는 장본인들인 시디레즈는 자기자신에게 나쁜 것을 원하는[28] 자들이다. 이들은 ‘도태한남’이며 ‘퀴어’ 실격이지만, 최선의 실패, 즐길 수 있는 실패를 배설한다.


 시각문화 평론가 이연숙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이 실패를 기술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지 않는, 만질 수 있는 것을 만지는, 항문을 더 다채롭게 이용하는 기술 말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에 바탕을 둔 진정한, 따라서 좋은 관계의 전범은 무너진다. 관계 속에서 진정한 나는 아마 영원히 찾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것들을 입력하세요. 라고 커서가 반짝이고 있는 칸은 앞으로도 오래 비워져있을 테다. 그 빈칸에 대고 시디레즈는 나몰라라 외친다.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을 우리가 가져가겠다고,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꽤나 좋아보이므로.[29]


퀴어 인셀과 인셀 트랜스


 만화가 출신 유튜버인 ‘카광’은 일간베스트 저장소를 비롯한 대안 우파 커뮤니티의 성 경제학을 성립시키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들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만화 〈그와 그녀의 사랑이야기!?〉는 일베 유저와 워마드 유저의 연애담을 그린다.[30] 처음에 서로를 ‘한남충’, ‘웜련’이라고 멸칭하던 두 주인공은 끝내 각자의 커뮤니티 방언을 버리지 않은 채 사랑에 성공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대두된 인터넷 성별 전쟁의 피로도가 높아져 가고 있던 와중에 그려진 이 만화는,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슬로건의 일베적 판본으로 보인다. 남녀갈등의 역사적 맥락과 여러 변인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연화된 이성애와 연애를 향한 욕망만을 유일한 삶의 동력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광이 이어가고 있는 유튜브 컨텐츠 ‘나락의 삶’ 역시 이런 관점을 바탕에 둔다. 이 시리즈에서 카광이 인터뷰하는 인물들은 19세기의 프릭쇼처럼 폭력적으로 전시된다. 그중 직업 없이 1인 방송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동성애자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엽기적이고 자극적으로 연출해 관심을 끄는 것이 유일한 무기이다. 그럼에도 최소한 해당 영상 안에서[31] 이들을 바라보는 카광의 시선이 윤리적으로 최악의 ‘나락’을 찍지 않는 이유는, 카광 자신부터가 크로스드레서로서 랜덤채팅으로 남자들을 꾀어내어 속이고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해 혐오세력과 ‘디스랩배틀’을 뜨며 스스로를 전시하는 프릭이기 때문이다. 남초 커뮤니티의 주된 정동으로 지적되는 ‘정서적 평등주의’는 이들 같은 인셀-프릭들에게 쥐어지며 새로운 맥락을 만난다. 너도 나락, 나도 나락이니, 최소한 유튜브 영상의 디제시스 안에서만큼은 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편하기 위해서, 이들은 나쁜 곳(나락)에 남아있기로 한다. ‘인생을 저렇게 낭비하느냐’고 분노하는 동시에 안도하는 시청자들을 남겨놓고서.


 이 글에서 지금껏 살펴본 인셀은 친밀감이라는 사회적 자본이 고갈된 자들이 처한 불가역적인 상태이다. 어떤 인셀들이 현실에서 저지르는 폭력과 혐오는 상당 부분이 오늘날의 남성성 속에서 남초 커뮤니티의 문법이 정립되어 온 역사적 맥락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역사적 천박함과 폭력성이 이들이 가진 어쩔 수 없는 출발점이라면, 그 재료들로 빚을 수 있는 최선의 실패를 상상해 보는 일은 꽤 많은 이들에게 유용하다. 사회 변혁을 염두에 둔 슌스케의 ‘인셀 레프트’보다는 ‘인셀 트랜스’가 확실히 지금으로선 가깝다.


[그림3] 2023년 7월 1일 개최된 노프라이드 파티 안내문 © 2023 노프라이드 준비팀


노프라이드 파티의 안내 포스터이다. 빨간 바탕에 "프라이드가 부끄럽게 여기는 불법 존재들의 노 프라이드"라고 메인 슬로건이 써져 있고, 위치와 일시는 합정 티라미수 2023. 7. 1. 12:00-16:00으로 안내되어있다. 그림 설명 끝.


 이를 바탕으로, 성소수자 운동의 ‘프라이드’가 포용하지 못한 이들이[32] ‘노프라이드 파티’에서 퀴어라는 연합체를 재시작시켰듯이 인셀들 역시 비슷한 방법을 대안삼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인셀-퀴어의 접합을 상상해보는 일은 어떨까. 시디레즈의 사례처럼, 이 임시적인 연합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그들을 지워내고 ‘미화’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미화라는 기획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다른 이들을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들에 저항해온 퀴어 운동의 역사는 인셀들에게도 풍부한 함의점을 제공한다. 어쩌면 그 반대도 가능하다.


 따라서 퀴어 퍼레이드가 여장갤러리와 혐오자, 앨라이, 비-앨라이 헤테로 등의 ‘관광객’들로 상당히 ‘오염’되어있다고 할 때, 행사장을 정화하고 안전하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떤 방식으로 오염될지를 고민해야 한다. 인셀들이 남성성의 극단적 각본을 폐기하고 자신의 취약함을 직시하는 과정과 벽장 속의 퀴어가 나름의 쾌를 찾아가는 과정은 인접해있다. 섹스는 앞으로도 ‘기분 좋은’ 일에 속할 테고, 여전히 큰 돈이 걸린 판이겠지만, 그 속에 난무하는 더럽고 추악한 욕망들은 그리 간단히 지워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각자는 너무나도 달라서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통점이나 연대는 힘들지라도, 그 얼룩들과 땟자국들만큼은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관계와 사랑은,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이 더러움과 미숙함에서 출발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33] 그때 우리가 ‘이게 섹스지’라며, 천박하게 웃게 될지라도 그렇다.[34]


편집위원 민상 | hitch9662@gmail.com


[1] 김멜라 (2021). 저녁놀. 171.

[2] 레드필(RedPill)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진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등장하는 ‘빨간약’에서 이름을 빌려왔다. 이들은 자신들의 담론이 ‘남녀 관계의 불편한 진실’을 다룬다고 주장하며, 사회와 페미니즘이 가리는 남성의 본질적 욕망을 인식하고 이를 계발할 것을 추종자들에게 주문한다. 

[3] ‘오조오억’, ‘허버허버’ 등 여초 용어가 남초 유저들에게 적극적인 검열의 대상이 되는 것과 달리, 남초 용어의 기원은 ‘일베’와 디시, 인셀과 남성 일반의 연속선상에서 흐릿해지기 때문에, 인셀들의 기표를 향한 공격은 남초 커뮤니티와 남성 일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며 이들을 ‘결집’시키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4] 여성가족부가 과자 ‘죠리퐁’이 여성기 모양이라는 이유로 검열했다는 류의 도시괴담이 대표적인 예다.

[5] 나무위키 ‘인셀’ 문서의 ‘남성혐오적인 남용’ 단락을 참고하라.

[6] ‘제발 꼬X 3cm였으면’의 줄임말로, 모든 것이 완벽한 대신 성적으로라도 결함이 있길 바란다는 의미다.

[7] 이길호 (2021). 242-243.

[8] 박인성 (2022). 79.

[9] 스기타 슌스케 (2023).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 218-219.

[10] 스기타 슌스케는 아감벤과 지젝에게서 빌려온 ‘잔여’ 개념으로 인셀 남성들의 사회적 위치를 설명한다. 한국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이 사용해온 ‘잉여’라는 용어가 정치적 부족주의로 전유되며 오염되었음을 상기할 때, 잔여는 인터넷으로 모여든 이들의, 기존의 정체성 바깥의 공통성을 포괄하는 용어가 될 수 있다. 

[11] 폴 B. 프레시아도 (2023). 대항성 선언. 20.

[12] 강지윤 (2018). 646-647.

[13] 김종갑 (2012). 241.

[14] 프레시아도 (2022). 28-29.

[15] 김종갑 (2003). 31-34.

[16] 낭시 (2015). 64-65.

[17] 일루즈 (2014). 85.

[18] 전혜은 (2021). 422-423.

[19] ‘식성’에서 온 말로, 게이들이 자신의 육체적인 취향을 이르던 은어에서 비롯했다.

[20]  리치 윌친스 (2021). 63-66.

[21] 나노찡 (2016.01.26.). 갤러리 개설 비화에 관하여 [여장 갤러리 게시물].

[22] 시스젠더-헤테로이지만 여장 남자에게 끌려 그들과 만남을 가지는 남성들을 이르는 말이다.  

[23] 나무위키 ‘여장 갤러리’ 항목 참조.

[24] 부끄러운줄알아야지 (2023.12.03.). 옂갤 탈갤하는 법 (러버편) [여장 갤러리 게시물].

[25] Ren Schrer (1998). Regards sur Delueze. 72(폴 B. 프레시아도, 2022: 205에서 재인용).

[26] 들뢰즈 (2004). 54-55.

[27] Andre Long Chu and Anastasia Berg (2018. 07. 18). Wanting Bad Things [인터뷰 기사]. 

[28] Andre Long Chu and Anastasia Berg. 같은 글.

[29]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을 가져가려는 사람은 그냥 가져다 써라. 왜냐하면 여기에는 딱히 좋은 것이 없으니(이연숙, 2023: 122-123).”에서 변형

[30] 카광 (2018. 6. 3.). 그와 그녀의 사랑이야기!? [네이버 블로그 만화].

[31] ‘나락’들을 찍던 카광의 시선은 파주의 성매매 집결지나 홍대 놀이터의 ‘지뢰계’로 활동하는 10대들을 향하며 추문적인 것이 된다. 그런 것이야말로 카광의 성공 수단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32] “가난한 퀴어, 못생긴 퀴어, 춤을 출 줄 모르는 퀴어, 멍청한 퀴어, 더럽고 불쾌한 퀴어, 범죄자인 퀴어, 아픈 퀴어, 병을 전파하는 퀴어(노프라이드 준비팀, 2023)”

[33] 작년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했을 때였다. 행사장 입구를 따라 행사장을 둘러싼 폴리스라인을 따라가던 중이었다. 내 앞엔 치마가 지나치게 짧아 엉덩이가 다 노출된 메이드복을 입은, 20대 남성으로 보이는 참가자 2명이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한 손에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으면서, 그들은 다른 한손으로 서로의 엉덩이를 만졌다. 나는 그들의 사진에 나오지 않기 위해 걸음을 늦췄다. 각자의, 뾰루지 가득한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손길은 너무나도 ‘섹스’였고, 그들의 카메라에 비치는 내 모습은 마치 나도 그 섹스에 끼어있는듯한 느낌을 주었던 탓이었다. 혐오세력이 선전하듯 성기모양 빵을 팔지도 않았고, 어린이들에게 딱히 교육적으로 악영향을 끼치지도 못한 퍼레이드에서 가장 ‘문란’하고 불쾌한 순간이었다. 나는 정말 그 사진에 찍히지 않기 위해 자리를 비켜야했을까? 어느 답을 내리든 자의식이 과하게 느껴졌다. 이 글은 그 과함에서 출발했음을 인정한다.

[34] 「저녁놀」의 마지막에서 ‘모모’는 우연히 ‘먹점’의 허벅지에 깔렸다가 새로운 ‘쓸모’를 찾는다. 그는 더이상 딜도가 아니어도 괜찮다. ‘안마기’라는 새 쓸모와 ‘눈점’이 그려준 그림 덕에 ‘과일 나오는 도깨비방망이’라는 새로운 모습도  얻었다. 공장에서 나올 때 모모는 자신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말에서 모모는 어느때보다 편안한 모습이다. 가장 오염되고, 부정확한 자기자신인 채로.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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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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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진오 (2021). 나는 홧김에 개집을 샀고 할아버지와 섹스했다. 문학동네 제28권 2호. 244-270.

이길호 (2021). 익명의 가장자리에서: 익명-장소와 익명-되기,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 비교문화연구 제27집 1호. 239-297.

박인성 (2022). 밈과 신조어로 읽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부족주의-남초 커뮤니티의 정서적 평등주의와 위임된 성장서사. 대중서사연구 제28권 2호. 59-93.


기타 온라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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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줄알아야지 (2023.12.03.). 옂갤 탈갤하는 법 (러버편) [여장 갤러리 게시물]. 접속일 2024.02.09.. Retrieved from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yjrs&no=2992003&search_pos=-2960974&s_type=search_subject_memo&s_keyword=.EB.9F.AC.EB.B2.84.ED.8E.B8&page=1

카광 (2018.6.3.). 그와 그녀의 사랑이야기!? [네이버 블로그]. 접속일 2024.02.09.. Retrived from https://blog.naver.com/haeky123/221290788583

Andre Long Chu and Anastasia Berg (2018. 07. 18.). Wanting Bad Things [인터뷰 기사]. 접속일 2024.02.09.. Retrived from https://thepointmag.com/dialogue/wanting-bad-things-andrea-long-chu-responds-amia-srinivasan/

2023 노프라이드 파티 , nopride2023.my.canva.site. 접속일 202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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