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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열망과 두려움의 교차로

[특집 '사랑'] 편집위원 유진

I. 사랑은 해체되었을까?


어릴 적 마법 같은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동화책을 읽으며 자랐다. 나이가 조금 더 들고서는 K-드라마를 보며 가슴을 졸였고, ‘차도남’ ‘댕댕남’ 따위의 캐릭터에 열광했다. 십대이던 나에게 사랑은 마치 수학 공식처럼 명료하게만 보였다. 사랑을 학습했던 미디어에서, 사랑이란 연애-결혼이라는 공인된 절차를 거쳐 성취되는 최종적 목표로 비춰지곤 했으니까. 


그러나 이 글을 쓰며 회상하는 지금은 2024년, 지극히 명료한 듯 보였던 사랑 공식에 적극적으로 회의한다. 외려 사랑이 이토록 요원하게 느껴졌던 적이 없다. 연애-결혼-출산이라는 전통적 도식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익명 아래 갈등을 무책임하게 재생산하는 자극적인 컨텐츠를 볼 때는, 마치 사랑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 개중에서도 연애에 대한 여러 통계는 이러한 짐작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인구보건복지협회가 2022년 발표한 ‘청년의 연애, 결혼 그리고 성 인식’에서는 만 19세~34세 비혼 청년의 65.5%는 현재 ‘연애하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개중70.4%는 ‘자발적’으로 비연애 상태이며, 48.3%가 현 상태에 ‘만족’을 나타냈다.[1] 이는 기존 n포 세대와 구별되는 대목으로, 자발성이 두드러지며 현재 대체로 만족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층 나아가, 《시사IN》이 조사한 ‘2023 연애·결혼 리포트’에서는 ‘연애-결혼-출산’ 생애 모델을 거부하는 세태와 그 인식을 보여준다. 20대 여성의 27.3%만 ‘연애는 반드시 해야 한다’에 동의했다. 결혼에 관한 질문에서는 성별 관계없이 전 연령대에서 더 낮은 수치의 긍정적 응답을 확인할 수 있다.[2] 이러한 회의감의 원인으로 여성들이 ‘개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전통적 성역할 거부, 젠더 폭력, 정상성 문제 제기 등으로 인한 낭만적 사랑의 해체가 지적된다.


그러나 로맨틱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욕망이 진정 사라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은 분명히 남아 있다. 『이토록 두려운 사랑』에서는 현대를 ‘연애 불능 시대’로 정의한다. 젠더 이슈를 둘러싼 ‘전쟁’ 속에서 더 이상 행복한 로맨스 관계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친밀성을 향한 욕구는 분명히 잔존한다. ‘연애 불능 시대’란, 단순한 ‘포기’와 ‘절망’이 골자가 아닌, 로맨스적 관계를 향한 열망과 두려움이 촘촘히 얽힌 관계인 것이다. 


‘연애 불능 시대’ 속 인물들은 사랑을 향한 열망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나, 이와 상충하는 두려움에 연애와 거리를 두고자 한다. 따라서 자신을 경험의 주체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닌,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경향이 수반된다. 이와 같은 현상을 사랑이 ‘컨텐츠화’ 되었다고 정의하고자 한다. 

로맨틱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열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양상이 변해 왔고, 로맨스는 이를 반영하여 욕망과 공명해 왔다. 사랑이 ‘컨텐츠화’된 다음의 세 가지 미디어에서 우리는 현시대의 두려움과 열망을 읽어내릴 수 있다.

 

II. 두려움과 열망 읽어내리기


일반인 출연자들이 한 공간에서 커플로 맺어지는 과정을 담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높은 화제성을 기록하고 있다. 2022년에만 30개 가까운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환승연애2〉(2022)는 19주 연속으로 티빙 유료 가입 기여자 수 1위를 차지했으며, 〈나는 솔로〉 또한 10기 돌싱 특집 최종회의 시청률이 수도권 유료 방송 가구 기준 5.7%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다.[3]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연애를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행위, 즉 ‘컨텐츠화’된 연애를 적확하게 나타낸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는 연애의 각본 상황을 인공적으로 연출해 짧은 시간 내에 로맨스 관계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로맨스를 향한 열망은 자극하면서도, 미디어와 시청자 사이라는 안전거리를 확보해 실제 연애 관계 형성의 두려움을 상기시키지 않는다.  


'컨텐츠화'된 연애는 사랑을 향한 열망과 그 열망을 가로막는 두려움이 요구하는 '대리만족'을 충족시킨다. 외모부터 재산, 성격까지 촘촘히 설계된 현실의 연애 '자격' 조건은 연애의 두려움을 가중한다. 이러한 ‘자격’ 조건은 본질적으로 보편성에 기반하나, 모든 ‘자격’을 갖춘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트시그널〉 및 〈환승연애〉 등의 프로그램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선망받는 외모와 직업을 가진 출연진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제공한다. 일반인이라는 보편적 속성은 ‘자격’을 갖췄다는 희귀성에 덧입혀져, 역설적으로 이들을 더욱 판타지에 가까운 존재로 만든다.  

[그림1] 숏폼 컨텐츠를 통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덕질’ 행위 ©유튜브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일부를 발췌한 숏폼 컨텐츠들이 20만~50만 회 가량의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시청자들은 연애 ‘자격’을 갖춘 출연자들의 로맨스를 관음적으로 지켜보며 판타지스러운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러한 대리만족의 쾌감은 분초 단위로 숏폼 영상 클립(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을 무한정 돌려보는 ‘덕질’ 행위를 통해 증폭된다.


대리만족을 통한 ‘덕질’ 행위는 종종 ‘과몰입’으로 이어지고는 한다. 몰입이 지나칠 경우 시청자들은 출연자와 비교해서 현재 배우자의 행동을 비난한다던가, 출연자의 개인 SNS에 악성 댓글을 남기는 등의 단점을 경험하기도 했다.[4] 동시에, 프로그램을 넘어 현실에서도 연인으로 이어진 출연진의 연애를 응원하며 ‘덕질’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이러한 ‘덕질’ 행위는 로맨틱한 관계를 향한 시청자의 열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강화시킨다. 가령, 큰 인기를 얻었던 〈환승연애2〉의 경우를 살펴보자. 키워드 분석 사이트인 ‘블랙키위’의 검색어 분석 결과, ‘환승연애 나연’ 관련 인기 주제로는 ‘환승연애 나연 직업’ ‘환승연애 나연 집안’ 등이 있었다. 동일한 프로그램의 출연진인 ‘현규’ 또한 마찬가지로, ‘환승연애 현규’와 함께 ‘환승연애 현규 직업’ ‘환승연애 현규 스펙’ 등이 인기 주제로 꼽혔다.


시청자는 ‘덕질’ 행위를 통해 출연진을 긍정하고 우상화함으로써, 출연진처럼 로맨틱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워나간다. 그와 동시에, 출연진의 뛰어난 조건과 현실을 비교해 연애의 ‘자격’론을 강화하며 두려움 또한 증가시킨다. 열망과 두려움이 충돌해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는 컨텐츠를 자아냈듯이, 컨텐츠를 학습한 시청자들은 기존의 열망과 두려움을 한층 강화하며 미디어와 상호작용한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일반인이라는 동질성에 기반한 현실 연애의 ‘대리만족’을 제공한다면, 비현실적 로맨스는 판타지를 통해 과장된 쾌감을 안겨준다. 기존 로맨스에서 흔히 차용하던 ‘부자’ 혹은 ‘재벌’ 이미지를 넘어서, 비현실적 로맨스는 외계인부터 제국의 공작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인공을 생성한다. 

[그림2] 〈셀러브리티〉에서 화제를 낳은 ‘신발 벗기기’ 장면 ⓒ넷플릭스

출처: 넷플릭스 https://www.netflix.com/title/81361096


신발조차 제 손으로 벗지 않고, 사용인이 허리를 숙여 벗길 정도로 과장스러운 재벌 캐릭터를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림 설명 끝.


넷플릭스 드라마 〈셀러브리티〉(2023)에서는 기존의 ‘재벌’ 이미지를 차용하되, 기존 캐릭터와의 차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남자 주인공을 그려낸다. 업계 1위 코스메틱 브랜드의 대표 ‘한준경’은 재벌 중의 재벌을 표상하는 캐릭터로, 신발마저 사용인이 벗겨줄 정도로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과한 묘사에 한 업계 관계자는 “많은 드라마에서 재벌 남자 주인공이 등장했고, 성격도 비슷하다 보니 더욱 특별한 재벌을 그리려다 과한 설정까지 등장했을 것”이라 지적했다.[5] 즉, 비현실적인 로맨스 캐릭터가 포화 상태인지라, 인플레이션의 결과물로써 ‘한준경’과 같은 캐릭터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림 3] 2024년 2월 9일자 네이버 웹소설 및 만화 인기작 현황 ⓒ네이버

네이버 웹소설 및 만화 인기작 현황으로, 로맨스 판타지 장르가 인기 순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이와 같이 현실과 멀어져 가는 경향은 다른 매체에서도 쉬이 찾을 수 있다. ‘로판’으로 통칭되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가 ‘비현실화’ 경향의 선두 주자라 할 수 있는데, 네이버에서 ‘이번주 가장 많이 본 웹소설’ 및 ‘지금 가장 많이 보는 만화’로 꼽힌 작품 중 대다수 역시 ‘로판’ 장르에 속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배경은 대체적으로 가상의 서양풍 제국으로, 귀족 내지는 황족 출신의 주인공들이 사랑을 키워나간다. 가령 네이버 웹툰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022)에서는, 추기경의 사생아 ‘아리아드네’가 제국의 왕자인 ‘알폰소’와 백작 ‘체자레’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절대군주의 통치제도인 ‘로판’ 속 제국은 극대화된 남성성을 재현하는 동시에 가부장제의 섹스-젠더 체계를 공고히 한다. 제국 속 여주인공은 길고 아름다운 머리와 화려한 드레스를 착용하는, 여성성이 극대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컨텐츠를 향유하는 과정에서, 주인공과 더불어 독자들은 제국의 섹스-젠더 질서를 비판 없이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6]


현대 독자들이 젠더 이슈에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가부장적인 젠더 이미지를 강조하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유행은 언뜻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바로 여주인공의 여성성이 강조됨으로써 ‘보호받아야 할 여성’으로 이미지화되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여성이 가족을 보살피고 아이를 양육하는 의무에 시달리지만,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여성이 사랑받고 보살핌을 받는다.[7]


더불어, 주인공 ‘아리아드네’는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결말을 되돌리고자 과거로 회귀해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 과거로 회귀한 주인공은 끝내 성공을 거머쥐고 부를 마음껏 누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이 이용하는 등장인물들은 크게 주목받지만, 하녀 등이 수행하는 일상적인 돌봄노동은 등한시되며 당연히 여겨진다. 여성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여성 서사’를 추구하면서도, 가부장적인 주류 사회의 가치를 긍정하고 고착화된 돌봄을 지우는 형세다.[8] 이는 앞서 서술한 여성성 강조의 효과와 유사하게, 여주인공이 여성으로서 져야 할 현실 세계의 돌봄 노동 의무는 흐리면서 '돌봄 받아야 할' 역할로 만든다. 따라서 '로판'은 독자들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열망을 충족시키고, 정서적 위안을 제공하면서 성행해 왔다.


오랜 시간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폭력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는’ 온정적 가부장이 사회의 표준으로 자리 잡아 왔으나, 전통적인 섹슈얼리티의 체계가 거부되며 온정적 가부장에 대한 기대가 소멸하게 되었다. 온정적 가부장 아래 여성이 로맨틱한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안정감, 안전함, 안락함 등은 ‘판타지’로 전락했다.[9]


“이쯤에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별그대’ 이후 ‘마이 데몬’에 이르기까지 왜 이토록 많은 판타지 로맨스물이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 더 정확히, 미남-부자-귀족-비인간 남성과의 로맨스가 왜 이토록 흥한 걸까. 그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듯이 현실 속의 ‘한국 남자’와의 로맨스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별그대’에서 ‘마이 데몬’에 이르기까지 여주인공들은 계급적으로 보면 재벌부터 가난한 고아 소녀까지 다양하지만 모두가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오늘날 한국 여성들이 체감하는 삶이 그러하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와중에 리스크를 증가시킬 ‘한국 남자’와의 로맨스를 생각하기 어렵다. 실장님이니 재벌 3세와의 로맨스도 끝이 좋을 것 같지 않다(황진미, 2023).”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은 깨지고, 이상과 현실의 균열 사이로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여전히 잔존하는 친밀성을 향한 열망은 두려움과 상충하여 새로운 형태의 로맨스를 자아냈다. 이른바 ‘비현실화’된 로맨스는 현실 관계의 두려움을 상기시키는 요소들을 극단적으로 배제하는 동시에 과장된 판타지 요소를 적극 차용했다. 

 

로맨스의 ‘컨텐츠화’는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경향을 수반한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처럼 ‘현실에 있을 법한’ 출연진들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로맨스, 그리고 과장되며 ‘비현실적’인 판타지 로맨스. 즉 로맨스의 ‘컨텐츠화’는 ‘현실성’과 ‘비현실성’이라는 두 가지 갈래로 대표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향을 결코 모순적이라 할 수 없다. ‘현실성’과 ‘비현실성’ 모두 로맨틱한 관계를 향한 열망과 이를 가로막는 두려움이라는 제약 아래 생겨난 것으로, 타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컨텐츠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다만, 열망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작품과 소비자의 거리감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다.

 

III. 우리는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두려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림 4, 5] 관계 속 ‘두려움’을 엿볼 수 있는 실제 사례 ⓒ네이트판

출처: 네이트판 https://pann.nate.com/talk/368122920


‘연애에 대한 두려움 어떻게 극복하시나요?’라는 제목의 네이트판 게시물으로, 연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했음을 토로하고 있다. 이에 ‘저는 포기한 것으로 극복했습니다’라는 재치있는 댓글이 추천을 다수 얻었다. 그림 설명 끝. 


지금까지 로맨스 속의 열망과 두려움, 그리고 독자들이 이를 소화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관계 형성에 결부되는 두려움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두려움을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상정하며, 최종적으로는 사랑을 추구하도록 훈계하는 글은 아니다. 다만 두려움이 지나쳐 모든 관계를 단절하거나, 왜곡된 분노로 증폭되는 양상을 경계할 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新しん世せい紀きエヴァンゲリオン, 1995)은 타인과의 관계 형성을 극단적으로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 ‘신지’는 에반게리온을 조종하며 인간관계로 인해 상처받고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은 후, 급기야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외딴곳에 틀어박힌다.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두려워 사람과 사람 간의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고, 인류를 액화하여 단일한 전체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인류보완계획’은 이러한 극단적 회피 시도의 양상이다. 


그러나 정녕 타인과의 관계를 평생 회피할 수 있을까? 타인과 관계 맺지 않는 삶은 불가능하다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관계는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수반한다. 어느 관계든 실패를 내포한 리스크를 동반하고, 누구든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이상 두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상처받더라도 관계에 부딪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劇場版Air/まごころを、君に, 1997)에서 극적으로 재현된다. ‘나에게 오면 널 상처입힌다’ 이야기하는 등장인물 ‘아스카’는, 관계에서 회피하며 안정을 구하는 주인공에게 ‘상처받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을 추구할 뿐이라며 ‘너는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 일갈한다. 관계는 필수적으로 상처 입을 가능성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종내 주인공은 언젠가는 배신당하고 버림받을 것을 예감하면서도 다시 한번 관계에 부딪히기로 결정하며 영화를 끝맺는다. 


여기서 ‘너는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주목할 만하다. 이는 관계 형성의 두려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사를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을 진정 사랑할 수 있다면 두려움마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미국의 노동 계급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한 『커밍 업 쇼트』(Coming Up Short)에서는 이렇듯 자신을 사랑하려는 시도를 찾을 수 있다. 불안한 경제 아래의 청년들은 취직, 결혼, 양육 등의 ‘성인기에 이르는 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하고, 나이는 먹어가지만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상태로 남는다. 불완전한 성인기에 자리한 청년들은, 성인으로 이행하기 위해 전통적인 성인기의 필요조건 대신 ‘치료 서사’를 택한다. 이들은 중독이나 실패 경험 등을 이겨내는 ‘치료 서사’를 성인기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삼고, 자아를 긍정하며 돌보는 데 집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특히 친밀성의 영역에 있어서, 청년들은 얼마 없는 가진 것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친밀성을 일종의 리스크로 간주한다. 무엇보다도 자아의 성장을 원하기 때문에 청년들은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갈 관계에 자원을 쏟을까 봐 두려워한다.[10] 설령 친밀 관계를 가지더라도, 자기희생 등의 전통적인 논리와 애써 가꾼 ‘치료적 자아’가 부딪혀 갈등을 자아내곤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된다. ‘치료 서사’는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극복하게끔 하고, 극복해 낸 자신을 긍정하며 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관계 속의 두려움을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이러한 ‘치료적 태도’는 성공의 책임이 오직 병약한 자아와, 자아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장한 자신을 인정해 줄 타인의 필요성을 간과하곤 한다. 


따라서 문제는 또다시 관계로 회귀한다. 두려움과 맞서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안적 관계와 인식이 필요하다. 이에 『커밍 업 쇼트』에서는 시각을 넓혀 제도와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며 타인과의 연대를 도모한다. 그러나 『커밍 업 쇼트』는 서술 대상을 미국 노동 계급의 밀레니얼 세대로 한정하기 때문에, 다양한 스펙트럼의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고자 보다 관계 중심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논하고자 한다.

타인의 필요성이 간과된 ‘치료적 태도’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아를 인정하며 함께 성장하는 관계를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 앤서니 기든스가 제안한 ‘합류적 사랑’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마치 각각 흘러가던 물줄기가 어느 시점에 합류해 함께하듯, ‘합류적 사랑’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며 사랑의 유대로 새로운 정체성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11]


기든스는 낭만적 사랑의 ‘영원한’ ‘하나뿐인’ 특성이 파편화되는 현실에 기대어, 개별성과 차이에 대한 존중을 골자로 한 ‘합류적 사랑’을 이야기했다. ‘합류적 사랑’ 내에서는 사랑이 일부일처제적일 필요가 없다. 상대방과 반드시 하나가 되지 않아도 괜찮고, 헌신을 요구하며 상대방을 압박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열어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주인공의 아버지, ‘겐도’는 불우했던 인생을 이겨내도록 도운 아내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하려 한다. 그에게 아내란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이었으므로, 아내와의 사별 후 마음을 닫고 아내만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마지막인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シン・エヴァンゲリオン劇場版 :||, 2021)에 이르러, ‘겐도’는 아내의 죽음과 동시에 아들의 성장을 받아들인다. 더 이상 죽은 아내와 하나가 되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처음으로 아들을 긍정하며 진심 어린 용서를 빈다. 영원성과 유일성에 기반했던 낭만적 사랑에서, 상실을 받아들이고 아들의 인생을 긍정함으로써 아내-아들과의 합류적 사랑 이행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자아를 긍정하고 가꾸는 ‘치료적 태도’는 ‘합류적 사랑’과 모순되지 않는다. 두 가지 시도 모두 자아 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합류적 사랑’이 지닌 상호보완적 관계가 ‘치료적 태도’의 고립을 완화할 수 있다. 비록 ‘합류적 사랑’이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도 결국 타자일 뿐이라는 매정한 인상을 주지만, 어차피 달콤한 낭만적 이상이 무너져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하나뿐인 영원한 사랑이 존속되지도 않을 것 같다. 


‘합류적 사랑’이 영원한 최선의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전통적 세계관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대도, 연애에서 일부일처제 결혼에 이르는 사랑 도식이 아직 사회를 강하게 지배하는 이 땅에서 쉬이 받아들여질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합류적 사랑’이 하나의 높은 가능성으로 자리할 순 있지 않을까. 이러한 형태의 사랑이 기능하는 낙관적 세계관 아래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며 자아를 성장시키되, 관계에 예정된 구속으로부터 기인한 두려움은 경감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IV. 끝맺기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연말과 새해 그 어드매, 이 글의 개요를 엄마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엄마는 아주 조용히 글을 읽더니, 몹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너는 정말 이렇게 생각해?” 물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생각하는 모든 비연애-저출산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보는 눈치였다. 


사실 이 글은 지극히 개인의 욕망에 기반하여 쓰여졌다. 엄마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에 극도로 무관심한 나’를 적극 변호하고 싶었고, 동시에 언젠가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로맨스 양태에 한 명의 오타쿠로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담뿍 담겼다. 


글을 완성하는 지금도 내가 로맨스와 사랑을 논할 자격이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엄마의 말마따나 나는 로맨스를 보고 설레지도 않고, 사랑을 딱히 원하지도 않는 딱딱한 인간이니까. 한때 인간이 싫고 모든 관계가 피로하게만 느껴져 〈신세기 에반게리온〉처럼 무한히 회피하려고도 했다.


그럼에도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낙관하고 싶다. 두려움이 아무리 열망을 막아선다 해도, 언제나 대안적인 사랑은 존재하고, 따라서 사랑의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비단 이 글에서 언급한 ‘합류적 사랑’ 이외에도, 끝없이 변화하는 시대와 공명할 수많은 형태의 사랑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쓸데없이 비장한 말로 온점을 찍고 싶지는 않다. 단지 무한한 가능성과 끝없는 변용을 기다리며, 이만 글을 마친다. 


편집위원 유진 | gamjabat_@korea.ac.kr


[1] 여성, 연애·결혼·출산의향 남성보다 낮아…비연애 상태에 만족 (2022.09.27.). 연합뉴스.

[2] “우리 결혼 안 합니다” 생애 모델을 거부하는 사람들 [2023 연애·결혼 리포트] (2023.03.15.). 시사IN.

[3] ‘나는 솔로’ 출연료는 100만원, 환승연애는 2000만원? (2022.10.28.) 조선일보. 

[4] 장형민, 이재신 (2022). 16.

[5] ‘셀러브리티’ 황당 장면…#재벌 신발벗기 #나만 해괴망측? (2023.07.15). 한겨레.

[6] 서은영 (2020). 12.

[7] 같은 글. 14.

[8] 권경미 (2022). 25.

[9] 임국희 (2020). 28. 

[10] 제니퍼 M. 실바 (2020). 153.

[11] 앤소니 기든스 (2001). 108.


참고문헌


단행본

김신현경 (2018). 이토록 두려운 사랑. 반비.

앤소니 기든스 (2001).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배은경, 황정미 (번역). 새물결.

제니퍼 M. 실바 (2020). 커밍 업 쇼트. 문현아, 박준규 (번역). 리시올.

 

논문 및 저널

권경미 (2022).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의 신계급주의와 서사 특징 -책빙의물과 회귀물을 중심으로-. 인문과학84, 109-140.

서은영 (2020). 로맨스판타지 웹툰의 부상과 재현 : #서로판, #영애물, #집착남물을 중심으로. 애니메이션연구, 16(3), 9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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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및 온라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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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정 (2022.10.28.). ‘나는 솔로’ 출연료는 100만원, 환승연애는 2000만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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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은 (2023.07.15). ‘셀러브리티’ 황당 장면…#재벌 신발벗기 #나만 해괴망측?.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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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영 (2022.09.27). 여성, 연애·결혼·출산의향 남성보다 낮아…비연애 상태에 만족.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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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 (2023.12.24.). ‘별그대’에서 ‘마이 데몬’까지…한국형 판타지 로맨스의 진화.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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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2.11.10.). 추가++) 연애에 대해 두려움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네이트판 게시글]. 접속일 2024.02.04.. 

Retrieved from https://pann.nate.com/talk/368122920

블랙키위, https://blackkiwi.net. 접속일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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