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사랑'] 편집장 은지
앞니는 음식을 자르는 용도. 저작운동 외에 그의 역할은 과도를 대체하는 것이다. 감자 칼도 사용할 줄 모르던 나이에 동생에게 앞니로 사과 껍질을 깎아 줬다. 제법 지저분한가 싶지만, 앞니깎이소녀가 초등학교 입학도 전인 나이였음을 감안한다면 귀여운 해프닝이 된다. 앞니깎이소녀는 낮 동안 할머니 댁에서 동갑내기 사촌과 4살 어린 사촌 동생에게 사과를 깎아주고 밥을 해주고 공부를 챙기면서 고등학생이 됐고, 기숙사형 고등학교에 가면서 그들의 돌봄은 종료됐다. 새벽 6시 반에 아침 운동에 나가기 위해 친구를 새벽마다 깨우면서 3년의 가벼운 돌봄 인생을 보낸 뒤, 대학생이 되고는 고등학교 친구와 운 좋게 옆집에 살게 됐다. 집에서 끓인 국과 일에서 얻어온 샌드위치를 물물교환하고, 술에 진탕 취해 집주인 아저씨께 걸쳐져 돌아온 친구를 챙기고, 코로나19로 번갈아 아플 때면 장 본 것들을 문고리에 걸어놓으면서 서로를 돌보았다. 그리고 이사를 온 지금은 룸메이트와의 상호 돌봄을 이어가고 있다. 음식을 하는 사소한 돌봄부터 건강과 정서적 안정을 챙기는 제법 큰 돌봄까지, 어느덧 20년이 다 되어가는 돌봄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 돌봄이라는 것은 참 기묘하다. 분명히 마음속 깊이 자리한 사랑으로 그를 돌보기는 하지만 체력적으로 많이 지치고 진이 빠진다. 대가가 없으니 생색이라도 잔뜩 내야 할 것 같은 그런 선의 같다가도, 돌봄에 들이는 시간과 체력을 고려하면 이는 반드시 노동이어야만 한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말로 당연시되어 온 가정 내 조부모·부모의 돌봄과 이 순리에 어긋나는 영케어러들, 그리고 주로 여성들에게 부여됐던 부양의 책임까지.
이들의 ‘돌봄{care}’은 다른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적절한 도움을 제공하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수고를 통칭한다. 돌봄노동을 명료하게 정의내리기는 어려운데, 누군가를 돌보는 행위에는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활 환경을 쾌적하게 만드는 도움도 포함되고, 이는 가사 노동과 연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봄노동은 생활에 필요한 가사 노동과 타인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노동을 포괄적으로 일컫는다. 돌봄 노동자들 – 가사 노동자, 요양보호사, 방문 돌봄 종사자 - 은 각자 특화된 분야를 지닌 채, 이 모든 노동을 횡단한다.
돌봄노동은 전통적인 경제학적 의미의 노동과는 결이 다르다. 웨어니스(Waerness, 1987)는 금전적 동기뿐만 아니라 노동과 사랑이 아우르는 행위가 돌봄이라고 설명한다. 라이라(Leira, 1994)는 돌봄이 상호성과 관계성을 내포하며, 정서적 동기와 강한 도덕적 의무를 요구한다고 봤다. 트론토(Tronto, 1993), 부베크(Bubeck, 1995), 키테이(Kittay, 1999) 등은 돌봄은 행동이면서 동시에 태도라고 지적했다.[2] 타인을 돌보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들의 요구를 충족하는 행동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정서적 의지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돌봄노동에는 육체노동(부축하기, 쓰다듬기, 주무르기 같은 신체적인 일이 포함된 실제적인 과제 수행), 인지 노동(돌보는 방법을 이해하는 능력 사용)뿐만 아니라 감정노동(수행자와 수혜자 간의 관계 형성)과 도덕적 헌신, 정신노동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돌봄은 지극히 타인 중심적이고 다면적인 노력의 결합체다.[3]
나이 들어서는 더 사소하고 많은 돌봄이 필요할 텐데, 그리고 돌봄은 평생 필수 불가결하게 주고받는 것인데, 이상한 점이 있다. 돌봄 수행자들은 돌봄노동의 공적 지위가 낮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러나 모순적으로 자신의 돌봄노동과 다른 사람의 돌봄노동을 높이 평가하며, 특히 사랑노동은 자신들의 행복한 삶에 필수라고 생각한다. 사랑과 애정에 기반해 내가 자발적으로 해왔던, 그러나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수반하는 모순덩어리 노동은 왜 사회적으로 낮춰졌을까?
타인을 돌보는 것은 그의 육체적인 면모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돌봄의 낮은 지위는 신체기능을, 특히 취약한 신체를 다루는 것을 연상시키는 데서 비롯된다.[4] 다른 사람의 몸을 씻기고, 그에게 음식을 먹이고, 그의 배설물을 받고 치워주는 일을 하는 돌봄 노동자들은 ‘그 일에 걸맞기 때문에’ 돌봄노동을 한다고 여겨진다. 휴스 등(Hughes et al., 2005)은 ‘폐기물{waste}’ 은유를 들어 가장 기초적인 인간의 폐기물(배설물) 등을 다루는 삶은 낮은 수준의 삶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했다.[5] 전통적으로 하인과 여성들이 ‘육체’를 다루며 돌봄노동을 해 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반면 돌봄을 받는 이들은 재화와 용역을 산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쓸모없{wasted}’다고 여겨진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 수행자와 수혜자들은 비생산적이고 취약하며 심지어 ‘낭비가 많다’고 간주된다(Hughes et al., 2005).[6]
돌봄노동의 낮은 지위는 노동의 특성 분류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에서 노동의 지위는 ‘무엇이 인간에게 가치 있는 노동인가’에 관한 고전적인 이해와 관련된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노동을 위계로 구별했는데, 지적 노동자인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의 노동에 가장 높은 지위를 부여했고, 삶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숙명적으로 일해야 하는 사람인 ‘일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의 노동에 가장 낮은 지위를 부여했다. 돌봄 노동자들은 신체 노동에 수반되는 인지 능력을 무시당한 채, 일하는 동물로서 가장 낮은 노동의 위계를 차지하게 된다.
돌봄 제공의 역학관계를 결정하는 국가가 돌봄노동을 외면한 것도 이유다. 국가는 가족을 돌봄의 책임 단위로 구성했고, 가족 밖의 돌봄은 시장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제공됐다. 가족은 분화되지 않는 단일한 실재로 취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젠더와 권력관계에 기반한 가족 내 억압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간과됐다. 전통적 핵가족 형태가 기본적인 현대 친족의 단위가 되고, 이것이 곧 돌봄의 단위가 되면서 돌봄의 관계도 이 단위에 맞춰 축소됐다. 또한 경제적 의미의 ‘노동’이 통상적으로 유급 고용으로 정의되면서 무급노동은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됐고, 가정 내 돌봄노동은 대표적인 무급노동이었다. 경제활동은 유급 노동과 더불어 무급노동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급노동의 가치는 폄하됐다. 국가가 돌봄을 책임지지 않고 가족과 민간에 외주화하는 돌봄 방식은 돌봄의 중요성을 격하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떠밀어 그들을 소외시킬 뿐만 아니라 돌봄 노동 종사자들의 지위를 떨어뜨렸다.
돌봄은 사적이자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지만, 실은 공적으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누스바움(Nussbaum, 1995)은 기본적인 인간적 욕구를 충족하는 인간의 능력으로서 돌봄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대 시민성 개념에 돌봄은 없다. 지배적인 시민성 개념은 활동력(신자유주의하에서는 ‘생산성’)과 동일시되는데, 이는 “자율성과 자립을 드높이는 한편, 취약성, 의존성과 상호의존, 그리고 돌봄에 속한 모든 것을 과소평가(Kittay, 1999)”[7]한다.서구 민주주의에서 이상화된 시민은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시장경제에서 소비하고 선택하는 합리적 경제행위자이자[8] 정치에 참여하고 공공의 일에 관여하며 스스로 결정하는 개인[9]이기 때문이다.
‘자립할 수 있는 합리적 경제인’의 자율성과 독립심은 역사적으로 ‘남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시민권에서 배제된 특성들 – 취약성, 의존성, 상호의존성 – 은 ‘여성적’ 특성으로 비유되면서 돌봄 수혜자들의 연약성과 돌봄의 상호의존성은 시민성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 됐다. 특히, “여성의 시민권은 남성 가장의 아내 또는 과부라는 지위에서 파생된 것이어야만 하는 부차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10]되면서 ‘시민성’은 여성적인 것들을 결여했다.
시민권은 어떻게 젠더화되었을까? 로마 시대 ‘시티즌십’은 법적 지위를 일컬었다. 이때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공식적으로 법률적인 문제에서는 시민으로 인정받았다.[11] 이 법률적 시민권은 낮은 세금 부과 및 거주의 허가 불필요 등의 특권과 법률적 특혜를 줌과 동시에 세금을 내고 도시를 방어해야 하는 의무를 부과했다. 그러다 18세기, ‘공화국 여성상’이 등장했다. 계몽주의 사상가와 정치 지도자들은 도덕적인 문제를 들어 여성이 열등하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남편이 아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졌다. 여성의 정치적 역할은 남편과 아들이 도덕적인 시민으로 성장하게끔 뒷받침하고, 그들이 공적인 일을 잘 처리하도록 가정을 평화롭게 유지하여 독려하는 ‘공화국 여성상’에 머물렀다.
18세기 살롱 여성들은 이에 따른 시민상을 잘 보여준다. 18세기 살롱은 지성인들의 대화와 토론이 활발히 오가며 서양의 근대 문화를 주도하던 지식의 산실이었다. 특히 프랑스 살롱은 당대 새로이 각광받은 계몽사상이 생겨나고 확산된 곳으로,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마련된 중요한 공간이었다. 랑베르 부인, 탕생 부인, 조프랭 부인, 레스피나스 양 등 많은 여성이 살롱을 운영하며 경영권을 가졌다. 그러나 이들은 살롱의 주인이었지만 학문적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남성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하기 위한 자기중심적 의식을 발전시켜 나가는 한편, 여성은 타인을 우선시하는 이타심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배제했다. 살롱 주인의 명성은 그들이 얼마나 타인 중심적인 돌봄을 잘 행하느냐에 달려있었다. 그들은 박학다식함이나 논리성을 보여주는 대신, 자신의 능력을 최소화하고 남성들의 능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게끔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살롱 여성들은 공개적으로 글을 쓰고 이를 출간할 권리를 요구하는 대신, 유능한 (남성) 지식인과 문인을 발굴하여 그들을 물질적·정신적으로 후원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12] 흥미로운 점은 살롱 여성들이 주최한 살롱이 18세기 계몽주의의 발판이 되었음에도 여성들은 ‘시민’에서 암묵적으로 배제됐다는 점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은 인간 평등과 주권재민을 선포했지만, 선거권도 없는 여성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여성들이 주최하고 주도한 살롱에서 대혁명이 싹텄으나 정작 여성들은 그 혁명의 대상인 시민으로조차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살롱 여성들이 행위한 적절한 시민의 모습은 어머니에게 기대되는 바와 유사하다. 공화국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을 개체 자체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돌보는 ‘어머니’로서의 가치는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포함하여 가족과의 일체감을 이루면서 개인이 독립적인 정체감을 가지는 건 지양해야 한다”[13]라는 헌신과 희생, 그리고 돌봄은 모성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 인권 증진을 위한 전략이자 국가적 선전이 되기도 했는데, 일본의 제1물결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히라쓰카 라이초{平塚らいてう}가 모성을 중심으로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 예다. 기관지《여성동맹{女性同盟}》 창간사에서 히라쓰카는 “여성의 천직은 역시 어머니이며, 어머니 일은 좋은 아이를 낳고 잘 키우는 것이며, 여기에 여성, 어머니의 존엄한 사회적 의의가 있다”[14]라고 말했다. 히라쓰카는 ‘남녀 불평등의 시작이 모성을 가지고 후세를 낳아 기르는 여성을 국가가 돕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의 가치와 권리를 내세웠다. 일본은 특히 국민들을 전시 총동원 체제에 동원하고 이에 충성하게끔 만들고자 모성의 이미지를 사용했는데, ‘여성’은 모성의 이미지로 통합됐으며, 나아가 자식을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고 군인 유가족으로 살아가는 강인함을 지닌 ‘군국의 어머니’로 형상화되었다.
따라서 돌봄은 역사적으로 가정 내에서 여성의 중심적 역할인 ‘재생산’과 함께 묶여 ‘모성’의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가족의 공간과 가사를 생산(production)이 아닌 재생산(re-production)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은 돌봄노동이 시장에 의해 더욱 쉽게 착취당하도록 한다.[15]
돌봄노동의 결과는 돌봄 대상자에게 흡수되어 특정한 결과로 남지 않기 때문에[16] 여성들은 노동하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고, 따라서 노동시장은 여성의 돌봄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가정에서 고용시장으로 나오면서 돌봄의 위기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왔다. 여성들의 유급 노동은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 것뿐 아니라 가사 노동의 이중 부담을 떠안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이 이중 부담은 많은 노동 계층 여성들이 항상 감당해 온 것이기도 하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여성들은 이중 부담을 덜기 위해 가난한 유색인종 이민·이주 여성들을 고용하여 돌봄노동을 위탁한다. 남반구 여성들은 자신의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 채 돌봄노동 일자리를 찾아 서구 선진국으로 이주한다. 젠더는 전지구적 불평등과 결합하여 돌봄 노동을 평가절하한다.
대한민국도 돌봄노동 아웃소싱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가 올해 상반기 시행하겠다고 한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이 그것이다. 100가구를 대상으로 선발된 필리핀 이주 여성 가사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도록 하며, 비용은 해당 가정에서 전액 부담한다. 시급은 다행히(?) 최저임금인 9,860원이다. 지난해 조정훈 국회의원이 외국인 가사 노동자에게 지급할 적절한 금액으로 최저임금의 절반 수준인 ‘100만 원’을 제시했던 개정안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돌봄의 가치를 단순 급여로 환산하고 이를 흥정하는 정책의 모습은 돌봄에 대한 인식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일정한 수준이 유지되는 유급의 돌봄이라도 완전히 상품화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미 돌봄은 상품이 된 듯하다.
돌봄은 의존이다. 공공의 돌봄은 의존을 병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돌봄 수혜자와 수행자가 자율성 및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지니는 것을 중점으로 두어야 한다. 따라서 돌봄의 양면성과 상호의존성, 호혜성을 인지하고 돌봄을 평등하게 배분해야 한다. 비생산적인 일로도 여성의 일로도 치부되어서는 안 되며, 임금노동 영역에서 가난하거나 이민자이거나 유색인종인 여성들의 일로 떠맡겨져서도 안 된다. 이상적인 목표이지만, 사회 전체가 돌봄의 보람과 짐을 함께 나눠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돌봄의 범주를 새로이 규정해야 하며, 확장된 ‘난잡한{promiscuous}’ 친족 모델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다.
‘난잡한 돌봄의 윤리’는 1980~1990년대 에이즈 인권 활동가들의 이론이다. 여기서 ‘난잡함’은 서로에 대해 친밀감과 돌봄을 나누는 방법을 다양화하고 실험한다는 의미이자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17]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가장 먼 관계에 이르기까지 돌봄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증식해 가는 윤리 원칙이다. 예로,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어머니와 아이를 모두 돌볼 수 있는 돌봄 관계들을 늘려가는 방식이다.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타인의 아이와 지역 공동체를 돌보는 것이 자녀 양육과 동등하게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한다. 그리고 돌봄에 대한 적절한 자원과 보상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돌봄 사회다.
‘나와 같은 타인’의 돌봄 네트워크는 가족 단위를 넘어 대안 친족 구조로 돌봄을 수행한다. 미국과 영국에서 액트 업(ACT UP), GMFA(Gay Men Fighting AIDS), 테런스 히긴스 기금(Buddies and the Terrence Higgins Trust) 등의 단체는 게이, 레즈비언, 제2세대 페미니스트, 유색인종과 함께 정부와 거대 제약회사,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질병으로 죽어가는 소외된 사람들을 인지하고 돌보도록 촉구했다.[18] 특히 액트 업은 미국 사회에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치료 약의 가격을 인하했고, 다른 시민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HIV로 인한 직장에서의 차별 금지 법제화를 이끌어냈다.[19] 국가와 사회가 외면한 이들을 돌보고 연대한 이들의 활동은 우리 모두가 돌봄 역량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보편적 돌봄’은 돌봄을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하며 중심에 놓고, 직접적인 대인 돌봄뿐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종류의 돌봄에 대해 모두가 공동의 책임을 지는 사회적 이상에 도달하는 것일 테다.
‘더 케어 콜렉티브’는 저서 『돌봄 선언』에서 돌보는 공동체를 조성하는 4가지 핵심 특성으로 ‘상호지원, 공공 공간, 공유 자원, 그리고 지역 민주주의’를 꼽는다. 우리 사회는 이들을 가지고 있을까?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얼마나 역행하고 있을까.
첫째로 구조적인 지원인 ‘상호지원’이 필요하다. 이는 돌봄의 상호의존성이 극도로 발현되는 특성으로, 공동체가 구성원들의 돌봄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예로 1970년대 비공식 아이 돌봄 나눔 단체들은 여성들이 아이 돌봄 외의 영역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돌봄을 분담했고, 여성들은 공공영역에서 남성과 나란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를 광범위하고 일관되게 시행하려면 공적 규모 증대와 구조적 지원이 필요하다. 가사 및 돌봄 노동자들의 급여를 후려치고, 가정이 비용을 부담하고, 가족 구성원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돌봄 대상자를 돌보도록 하는 방식[20]이 아니라 ‘공동체 협동조합’처럼 공동으로 출자하고 소유하는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 저자는 일부 상호지원은 비공식 영역에 남을 수밖에 없겠지만 사회적 평등과 생존, 공공의료에 직접적 영향 끼치는 만큼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둘째로 ‘공공 공간’이 필요하다.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공재로 유지되고 개인의 이익에 따라 유용되지 않는 공간의 구성은 모든 것을 사유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강박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다. 예로, 영국 런던시는 2002년부터 5년 간 100개의 공공 공간을 조성하는 ‘100 Public Spaces’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새로운 시장의 취임 후에는 프로젝트를 ‘Great Spaces’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런던 곳곳을 공공 공간으로 탈바꿈했고, 이후 런던 시청사까지 강변 산책로와 테라스 형식의 공원, 야외 공연장 등 시민들이 소비하지 않고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공 공간을 조성했다.[21] 공원과 도서관 등의 공공 공간은 일상에서 ‘타인’을 만나는 매개가 되어 공동체 돌봄을 증진하고 모든 수준에서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도록 한다. 따라서 돌봄을 친숙하게 끌어오기 위해서는 영리 추구를 위해 만들어지거나 전유되지 않는 공공 공간을 늘려가며 공동체 자원을 공유해야 한다. 한국 공간의 공공화는 어떤가? 2022년 마포구가 작은 도서관 9곳을 폐관한다던 소식[22]에 마을 공동체인 작은 도서관의 소중함을 깨닫고, 돈을 써야 입장할 수 있는 민간 공유 오피스와 카페들이 늘어나고, 추억하고 공감할 공공의 공간이 한강 공원밖에 없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공공 공간과 더불어 ‘공유 자원’이 필요하다. 이는 도구 등 물질적 자원과 온라인 정보 등의 ‘무형’ 자원을 포괄하는데, 소수에 의한 자원의 축적과 일회성 자원 생산 및 소비를 지양한다. 대표적 예인 지역 도서관은 필요한 물건 – 대표적으로는 책과 DVD - 을 구비하고 대여함으로써 개인마다 해당 물품을 구매할 필요를 없앤다. 이는 환경의 지속가능성과 공동체 협업과도 연계된다. 도서관의 특성을 활용한 ‘사물 도서관’을 통해 “물건의 수명을 계획하에 한정하는 끔찍한 자본주의 제도를 거부하고 공동체 안에서 물건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결과로 우리는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돈을 저축하고, 생물뿐 아니라 무생물까지도 돌볼 수 있는 역량을 계발할 것이다.”[23] 독일의 Weiden 지역 도서관은 ‘Library of Things’라는 사물도서관을 운영한다.[24] 공구와 가정용 도구 등 자주 사용하지 않거나 개인이 구매하기에는 비싼 도구들을 도서관 카드로 대여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개인이 구매 후 사용’이라는 공식을 깨고 공유와 공동체의 의존의 개념을 되살리는 것을 추구한다.
마지막으로 ‘지역 민주주의’다. 지방자치와 협동조합이 돌봄과 복지 활동을 인소싱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간 아웃소싱해 오던 돌봄노동을 내부에서 상호의존으로 풀어낸다는 취지다. 노동자들은 일자리의 안정성과 급여, 연급, 그리고 유급병가와 유급휴가를 얻으며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인소싱은 노동자들을 돌보는 행위이며, 그들을 더 많은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위치에 놓아 궁극적으로 공동체 돌봄의 질을 향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돌봄은 ‘남 일’이 아니며 ‘사랑’의 노동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여성적이고 열등하다고 여겨진 돌봄은 사실 우리 모두가 개발해야 할 역량이며, 상호의존 또한 병적인 상태가 아니라 당연한 모습이다. 우리는 서로를 더욱 잘 돌봐야 한다. ‘몫’과 생산성을 따지는 신자유주의, 돌봄의 여성화를 만들어낸 가부장제와 가족 구조, 자본의 논리로 치환되지 못하는 것들의 가치를 폄하하고 심지어는 돈으로 치환해 버리는 성급함. 그간 우리가 모른 채 안주해 왔던 큰 틀에서 벗어나 돌봄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 자신의 친족만을 돌보도록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자기 것 돌보기’의 편집증적 형태를 초래하기 때문에,[25] 그리고 우리는 내 것 네 것을 나누는 소유의 논리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봤기 때문에. 복지 제도의 수지타산과 화폐 가치로 일축되어 온 돌봄의 언어를 해체하기 위해, 삶의 전반에 깔린 돌봄을 중심에 둔 채 의존을 당당하고 뻔뻔하게 요구하고 요구받아야 할 테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덮은 돌봄 말고 ‘그냥’ 돌봄 말이다.
편집장 은지 | choeej.eun@gmail.com
[1] 질병, 장애, 중독 등으로 일상생활의 제약이 큰 가족 구성원을 직접 돌보는 아동과 청년
[2] 캐슬린 린치 (2016). 정동적 평등. 18.
[3] 같은 책. 74.
[4] 같은 책. 141.
[5] 같은 책. 142.
[6] 같은 책. 126.
[7] 같은 책. 143.
[8] 같은 책. 95.
[9] 같은 책. 126.
[10] 메리 E. 위스너-행크스 (2006). 젠더의 역사. 237.
[11] 황정아 (2011). 67.
[12] 이휘재 (2007). 129.
[13] 박지영 (2023). 164.
[14] 문소정 (2023). 260.
[15] 더 케어 콜렉티브 (2021). 돌봄 선언. 52.
[16] 이라영 (2022). 말을 부수는 말. 239.
[17] 더 케어 콜렉티브 (2021). 돌봄 선언. 82.
[18] 같은 책. 73.
[19] 행성인 (2017.11.01.). 미국의 HIV/AIDS 운동의 주춧돌, ACT UP [웹진].
[20] 돌봄 인력 부족, 가족으로 채운다?... 서사원 추진 방안에 “우려” (2024.02.08.). 경향신문.
[21] 이상민, 엄운진 (2011). 도시 생활밀착형 공공공간 조성 방안 및 매뉴얼 개발 연구 [별책] 생활밀착형 공공공간 관련 국내외 사례 [보고서]
[22] 책 읽지 말고 공부해라?... 마포구, 작은도서관 9곳 없앤다 (2022.11.14.). 한겨레.
[23] 더 케어 콜렉티브 (2021). 돌봄 선언. 101.
[24] 도서관디자인연구소, https://library.re.kr.
[25] 정동적 평등. 39.
참고문헌
단행본
더 케어 콜렉티브 (2021) 돌봄 선언. 정소영 (번역). 니케북스.
메리 E. 위스너-행크스 (2006). 젠더의 역사. 노영순 (번역). 역사비평사.
이라영 (2022). 말을 부수는 말. 한겨레출판.
캐슬린 린치 (2016). 정동적 평등. 강순원 (번역). 한울 아카데미.
논문 및 저널
문소정 (2023). 1930년대 후반 히라쓰카 라이초의 모성주의 변용에 관한 연구. 동북아문화연구 제76집, 257-273.
박지영 (2023). 모성 이데올로기 전복과 해체의 글쓰기.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98집, 27권(1호), 163-193.
이휘재 (2007). 18세기 살롱 여성에 대한 남성 사회의 배타성. 서양사학연구 제16집, 119-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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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및 온라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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