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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 없는 사랑 이야기

[특집 '사랑' 닫는 글] 편집위원 석규 

 사랑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린 시절 어느 박물관에서의 기억입니다. 어머니는 한지 공예를 가르치는 강사셨고, 강의를 나가실 때는 달리 돌볼 사람이 없는 저를 데리고 다니고는 하셨지요. 쉬는 시간 마당에 나왔을 때, 함께 일하시는 동료분들이 어린 저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면 저는 손을 크게 머리 위로 올리고는 “아빠가 이만큼 좋아요!” 했습니다. 그러면 동료 분들은 막 웃으시며 엄마 옆에선 엄마가 좋다고 해야 한다며 눈치를 알려주셨고, 어머니는 그래도 상관없다며 저를 안아주셨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게 사랑의 매우 일부였음을 아주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어느 친구를 짝사랑했습니다. 3학년까지도 같은 반을 했고, 집도 가까운 편이었기에 늘 붙어 다니려 하곤 했지요. 관계가 깨지는 것이 무서워 늘 맴돌던 것이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것으로 만족했었습니다. 사실 지금은 그게 짝사랑이긴 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소심한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일방적인 감정으로 무언가를 해볼 용기나 의지도 없었습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잠시지만 애인을 사귀기도 했는데, 무언가 의무감으로 만들었던 그 관계를 연애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는 남고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생각하던 일반적인 의미의 ‘사랑’ 같은 것은 조금 먼 이야기가 되었지요. 교실은 아이돌부터 육상 선수까지 온갖 ‘여성’이 대상화되는 공간이었고, 복도에서는 크고 우렁찬 “아 섹-스!” 같은 소리가 밤낮으로 들려오곤 했습니다. 교실의 스마트 TV는 아이돌 직캠 영상 재생 머신이 되었고, 연애에 대한 막연한 갈망은 온갖 로맨스 드라마와 웹툰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연애를 하는 친구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커플’인 친구와 ‘솔로’인 친구들은 우월감과 열등감 같은 것을 갖기도 했지요.


 저는 여전히 부모님의 사랑(을 동력으로 하는 돌봄)을 받으며 집과 학교를 왕복했습니다. 상전 대우를 받으며 고3과 재수생의 수험생활을 지냈지요. “대학만 가면 놀 거 다 놀고 여친도 다 생긴다” 같은 말은 이틀에 한 번쯤 들었고, 저 역시 대학 생활의 로망으로 동아리와 연애를 꼽아왔습니다. 재수 생활 중에는 수능만 끝나면 같이 재수한 친구에게 고백을 할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고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기보단, 그냥 연애라는 것이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작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는 한 번도 못 하고 있지만요. 연애 같은 걸 할 시간도 없다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지만, 사실은 어느 관계도 잃고 싶지 않을 뿐임을 알고는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친한 동생에게 “우리 무슨 사이야?”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습게도, 듣자마자 오래전 인터넷에서 보았던, ‘정확히 “우리 무슨 사이야?”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던 연애 조언이 떠올랐습니다. 듣고 나면 2만 원어치 꽃다발을 사 들고 가서 더 깊은 사이가 되고 싶다며 고백하라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요? 두려움을 깨고 먼저 말을 건넨 그 동생에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무슨 사이인지,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잘 몰랐습니다. 혹은 그저 제가 그 동생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했지요.


 아, 이건 너무 상투적인 사랑 이야기였나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안동이나 이천 등 여러 지방을 오가시던 어머니 덕분에 저는 꽤 오랜 시간을 도로 위에서 보냈습니다. 한글은 간판으로, 숫자는 자동차 번호판으로 배웠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요. 그래서인지 저는 지금도 자동차를 참 좋아합니다. 온갖 종류의 자동차 모델을 외우고, 유튜브 추천 영상의 절반은 자동차 리뷰이며, 길거리에서 좋아하는 올드카를 보면 그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런 저에게 치어리더 영상 시청이 취미인 제 친구는 “그쯤 되면 사랑이야, 사랑. 아주 결혼을 해라 그냥.”이라며 놀리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게 사랑이 아닐 이유는 또 무엇인가요? 가끔은 제가 봐도 사랑이 맞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시덥잖은 제 이야기들은 보시다시피 사랑 이야기입니다. 사랑과 돌봄, 짝사랑, 또는 그 비스무리한 무언가에 대한 기억, 아이돌과 그들에 대한 덕질, 로맨스를 소재로 하는 수많은 콘텐츠들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관계 속에 살고 있나요? 우리는 (그것이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얼마나 자주 사랑을 목격하나요? 이번 특집을 준비하며, 사랑이라는 주제를 두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가능한지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마치 제 이야기 같아 조금은 찔리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진지하게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무언가 배운 것이 있다면 기껏해야 생활과 윤리에 늘 등장하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관한 이야기 정도가 전부 아니었을까요. 사랑은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고… 같은 이야기들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넘어서, 사랑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이렇게 많다는 게 새롭기만 합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랑에 대해 조금 더 생각 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또 어떤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 계신가요?


편집위원 석규 | ksk0303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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