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편집위원 하영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굿’은 무당들이 칼춤을 추면서 누군가의 소원을 대신 기도해 주는 무언가였다. 요즘 나에게 ‘굿’이란 ‘사람’과 ‘삶’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하는 무언가. 혹은 별로 친하지 않은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다 대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적당히 좋다는 의미로 날려주는 멘트다. “오, 뛰는 거 재밌어 보임” 정도의 단순한 생각으로 풍물패에 들어간 나는 무럭무럭 성장해 “아, 뛰기 싫다”고 외치며 안 힘들게 뛰는 법을 연구하는 장구 치배[1]가 되었다. 어딘가에 앉으면 무의식적으로 ‘덩따다쿵따쿵 따구궁따쿵따쿵’ 등의 장단을 손으로 치는 산만함까지 획득했다. 그렇게 점점 풍물과 친해지면서도, 언젠가 풍물패 선배들의 블로그에서 ‘굿이란 뭘까’라든지 ‘굿과 함께하는 삶’과 같은 문장들을 보면 ‘저렇게 무언가에 심취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하며 별 의미 없이 넘기곤 했다.
지난겨울 처음으로 고창농악전수관에 갔다. 전수관 입구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굿, 사람, 삶’ 글자가 적힌 벽면과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다.
[그림 1] 굿, 사람, 삶 ⓒ고창문화관광재단
출처: https://blog.naver.com/gctf1110/223269777346
벽면에 ‘굿, 사람, 삶’ 글자가 적혀 있다. 그림 설명 끝.
굿에 대한 사랑이 철철 넘치는 선배들의 글이 떠오르며 ‘대체 굿이 뭐길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주일의 전수가 지나 나 또한 ‘굿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고창농악보존회의 전수 교육 프로그램 이름은 ‘사시사철 굿피는 고창’이다. 전수생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사부님[2]들은 모두 스스로를 ‘굿쟁이’라 칭하시고는 한다. 처음에는 ‘굿’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색하기만 하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풍물이나 농악 대신 ‘굿’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본래 농악(農樂)이란 글자 그대로 농부들이 꽹과리, 징, 장구 등의 악기를 이용하여 연행하던 ‘악’이다. 농사일을 하는 농부들은 고된 노동 속 흥을 내기 위해 직접 악을 치곤 했다. 매해 대보름 기간에는 마을의 액운을 물리치고 한 해 농사가 잘되길 기원하는 당산제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농악이 농민들만의 문화였던 것은 아니다. 소작농을 거느린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위로하고 인심을 얻기 위해 전문 농악단을 부르기도 했다. 세습무계 재인들과 여성 농악단의 재인들 또한 농악의 연행 주체였다. 그리하여 농악은 크게 마을 구성원들이 연행하는 ‘마을굿’과 전문 예인들의 연행으로 형성되었다.
고창 농악은 1998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6호에 등재되었다. 이명훈(2019)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를 거치며 ‘마을굿’이 거의 소멸되던 1985년에 각 마을의 어르신들이 모여 고창농악단을 만들며 그 맥을 잇기 시작했다(p. 264).
“굿은 그냥 생활이에요. 모내기 다 끝내 놓고 한 판 치는 것. 벼걷이 다 끝내놓고 한 판 치는 것. 동네 액운 다 몰아내 달라고 당산에 모여 한 판 어울리는 것. 일없는 농한기에 어느 잔치집에서 한 판 어울리는 것. 이런 판을 다 굿판이라고 했어요. 꼭 악기가 등장해야만 굿인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이 모여 어울리는 판, 그것을 우리는 다 굿판이라고 했지요. 판에 끼어든 누구나가 얼쑤 장단을 넣거나, 댓거리하며 판을 함께 만드는 열린 판이었죠.”[3]
마을굿을 치는 날이면 평소에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도 누구나 거절당하지 않고 판에 참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 공동체 농악에서 악기를 얼마나 잘 치는지나 함께 노는 사람의 평소 행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핵심은 서로의 몸과 몸이 만나 소통하는 과정이었다. 그 순간에 마주 보며 호흡하는 것이 바로 마을굿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아무리 흥겨운 가락에 몸을 맡긴다고 해도,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호흡하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까? 대체 굿이 뭐길래 이러한 정동(貞洞)을 가능하게 할까?
함께 판을 맞추던 시간에 사부님께서는 “한 번 가락을 냈으면 무조건 맺고 넘어가야 해”라고 하셨다. 생각해 보니 판굿만이 아니라 악기별 개인 놀이도 마찬가지였다. 이채가락으로 놀다가 삼채가락으로 놀고 싶다면 중간에 꼭 맺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풀이’다. 흔히 우리가 ‘풀다’라고 말할 때 그 뜻은 묶이고 뭉친 것을 물리적이든 정신적으로든 해제하는 것이다. 풍물에서 ‘풀기’를 하기 위해서는 비교적 느리고 밀도가 낮은 가락을 치며 점점 빠르고 밀도가 높은 가락으로 고조시키다,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가락을 마무리하는 맺음 가락(매도지)을 친다. 이때 느린 가락에서 빠른 가락으로 고조시키는 과정을 ‘가락을 쌓는다’라고 표현한다.
전수 첫날에 전수생들은 다 같이 모여 가장 기본이 되는 이채가락[4]을 계속해서 쌓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아주 느리게 시작하여 서서히 속도를 고조시킬 때, 이는 누군가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바라보고 가락에 들썩이며 하나의 소리를 만들면서 가락은 자연스레 고조된다. 즉, 가락을 쌓는 것은 단순히 속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치배들이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각각의 악기가 만들어 내는 소리들이 고조되어 하나의 소리로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맺는 것이 풍물에서의 ‘풀이’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무엇을 푸는 걸까? 한국 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정서는 바로 ‘한(恨)’이다. ‘한’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이는 쌓이고 맺히는 것이며, ‘풀어야 할 것’으로서 인식되고 있음은 분명하다.[5]
마을굿의 풀이는 크게 개인적 풀이와 사회적 풀이로 나눌 수 있다. 판굿이든 풍장굿이든, 모든 굿은 가락을 내고-쌓고-맺고의 반복이다. 즉, 맺고 풀고의 연속인 것이다. 그 연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신명(神明)이다. 판에 참여하는 개인은 계속해서 신명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굿에는 개인적 풀이의 기능이 있다. 한편, 평소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도 판에서만큼은 함께 어울리고 화합할 수 있다는 면에서 굿은 분명 사회적 풀이 기능도 가진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다가올 새해에 마을의 액운이 다 물리쳐지길 기원하며,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얽히고 맺힌 것들을 풀고 신명을 쌓는 것이 바로 마을굿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고창 농악은 전문 예인들뿐 아니라 마을굿을 연행하던 마을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정리되었다. 따라서 마을굿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고창농악보존회는 판굿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판굿 전수뿐 아니라, 대보름굿, 풍장굿, 문굿 등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진행하는 마을굿 전수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기획하고 있다. 그렇다면 농촌 혹은 마을 단위의 공동체가 소멸한 지금, 우리는 ‘전수 교육’의 형태 없이는 ‘굿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풍물, 탈춤, 마당극 등 연행예술이 활발하게 연행되던 1980년대로 돌아가 본다.
마을 단위의 공동체가 점점 소멸하면서 농악, 그리고 풍물은 ‘보존’되어야 할 무언가로 남겨진다. 그러다 풍물은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 운동이 한창인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다시 울려 퍼진다. 민중문화 운동의 영향으로 대학가에서는 풍물뿐 아니라 탈춤을 활용한 마당극 등이 활발히 연행되었다. 당시의 마당극은 이야기극, 판소리, 굿의 양식 등 복합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6] 아마도 대학생들이 탈춤, 풍물, 판소리 등을 복합적으로 활용한 마당극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새로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 즉 ‘판’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의 판의 의미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는 바로 ‘안암 대동제’이다.
1983년 5월 2일부터 5일까지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안암 대동제’는 학생 운동의 물결 속 뜨거워진 연행 예술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안암 대동제’는 단과대학 단위로 사전 준비가 진행됐고, 고려대학교 캠퍼스 전체 공간을 활용하여 전교생이 모이는 대형 놀이까지 기획한 엄청난 규모였다. ‘안암 대동제’는 마을굿의 형식을 차용했기 때문에 캠퍼스를 ‘안암골’이라는 마을로 상정했다. 가상의 마을로 설정된 캠퍼스 곳곳의 공간에서는 약 3일에 걸쳐 굿과 다양한 마당극이 펼쳐졌다. 그러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단과대 학생이 모여 줄다리기 행사로 마무리하였다고 한다.[7]
기억을 더듬어 그때 공연을 회고해보면 다음과 같다. 길놀이, 고사, 판굿에 이어 본 공연(창작춤극)이 펼쳐졌다. 판씻이 열두발 벽사의식에 이어 흰옷을 입은 다수의 흰무리들이 평화로운 집단 민중 춤을 추었다. [중략] 검은 장막 천을 찢고 나와 검은무리와 검은 천을 마당 밖으로 몰아내고 해방의 집단 춤을 추면서 공연은 끝이 났다. 공연 마지막 난장 뒤풀이는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로 이어졌고, 야외 공연장을 빠져나가던 스크럼 행렬은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교내를 행진하였다.[8]
[그림2] 1983년 안암 대동제 ⓒ조현모
출처: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222602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안암 대동제를 위해 모여 밧줄을 만들고 있다. 그림 설명 끝.
‘안암 대동제’의 굿과 마당극은 분명 ‘문화재’로 지정된 각 지역의 농악과 마을굿과는 다른 형태이다. 그러나 ‘안암 대동제’ 또한 그 옛날의 마을굿과 마찬가지로 얽히고 맺힌 무언가를 풀기 위해, ‘함께’ 행위하기 위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물론 지금의 대학 풍물패는 1980년대와 같은 목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대학에 입학하여 풍물패에 들어갔다고 말했을 때, 나의 사촌 오빠는 “혹시 ‘exercise’ 목적이야, 아니면 ‘movement’ 목적이야? 뭐, 요즘은 다 ‘exercise’긴 하지”라고 했다. 한 문장으로 대학 풍물패의 긴 역사를 압축하다니 놀랍긴 하다.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민중문화의 부흥을 기원하는 움직임{movement}이기보다, 대학 풍물패는 이제 같이 재밌게 놀기{exercise} 위해 모인다. 목적은 변화했으나, 모두 같은 마음으로 악기를 치고 행위한다는 사실은 역시 변함이 없다.
그래서 대체 굿은 무엇인가? 농촌 사회에서 굿은 성공적인 농사를 기원하기 위해, 1980년대 대학생들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위해, 독재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민족문화의 부흥을 꿈꾸며 굿을 쳤다. 그 모든 굿에는 어떠한 마음들이 필히 존재했다. 올해는 농사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 마을에 평화와 안녕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 ‘우리’가 더 단단해지길 바라는 마음. 더 나은 세상이 오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들을 떠올리자 어쩐지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든다. 굿은 마음에서 나와 사람으로 향하여 만들어진다는 말. ‘굿은 협화’라는 말. 소리내기 위해 치지 말고 먼저 행위하라는 말. 농촌 사회에서도, 뜨거웠던 1980년대에서도, 굿은 서로의 행위를 이끌어 내고 호흡하기 위함이었다.
초창기 보았던 1세대 분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서로 티격태격하기도 하였지만 굿을 치는 그 순간은 매 순간 서로에게 집중하고, 함께하는 치배들의 호흡을 읽어내려 노력하며 스스로 도드라져 보이기보다는 서로 받쳐주고 서로를 느끼려고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돋보였다. 즉 굿을 치는 그 시간 동안 온몸으로 서로를 느끼고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의 것’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열린 몸과 마음으로 그들의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9]
지난 1월 27일, 고창농악전수관을 다시 찾았다. 4주차 전수를 마무리하는 전수생들의 발표회가 있던 날이었다. 약 60명 가량의 전수생들이 널찍한 강당에서 판굿과 구정놀이까지 선보였다.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전수생들은 상쇠를 바라보며 신호를 기다리고, 함께 눈 맞추며 웃었으며, 서로의 몸짓에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발표회가 마무리된 후, 사부님이 “4주차는 굿을 쳤다”고 말하자 어떤 전수생들은 환호성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모든 집단 정동의 순간 속에서 구경하는 관객에 불과했지만, 사부님이 어째서 ‘굿을 쳤다’고 하셨는지, 그리고 왜 다들 그 한마디에 환호하고 감동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들의 몸짓들은 각기 달랐지만, 능숙하건 서투르건 함께 호흡하며 미소 지었다. 함께 맺고 풀고 신명을 느꼈으니 제대로 ‘풀이’하였고, 마지막 발표회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 되었으니 분명 굿이었다. 더불어 ‘굿을 쳤다’는 말로 그 마음을 확인받았으니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뜨개질에 관심이 생겨 인터넷에서 난이도가 쉽다는 뜨개질 키트를 구매한 적이 있다. 설명서를 읽으며 천천히 신중하게 코를 뜨기 시작했건만 꼬이고 꼬여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포근한 목도리나 아기자기한 뜨개 인형을 뚝딱 완성할 만큼의 손재주가 내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뜨개질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무언가를 잘하고 싶다(혹은 잘해야 한다)는 마음은 항상 내게 강박처럼 붙어 있다. 풍물패 선배들에게 처음 악기와 몸짓을 배울 때도, 몸을 잘 쓰지 못하는 거울 속 나는 뚝딱거릴 뿐이었다. 솔직히 “아, 나 너무 못하는데 그냥 관둘까”하는 생각이 울컥 들기도 했으나, 서툰 몸짓이라도 (속으로 울면서) 시도하자 어딘지 모르게 불화하는 나의 몸짓조차 판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다. 잘할 수는 없어도 즐길 수 있다는 말을 그날 처음 이해했다.
고창 농악 판굿의 2마당은 가락에 몸을 맡기고 자유롭게 노는 ‘오방진 마당’에서 상쇠의 신호에 맞춰 빠른 속도로 진을 마는 ‘진오방진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방진 마당에서는 앞만 보지 않고 다른 치배들과 눈을 맞추고 춤을 춘다. 동시에 상쇠가 언제 신호를 줄지 모르기 때문에 상쇠에게 집중한다. 판의 순서나 가락과 같은 규격화된 틀 안에서 모두가 철저히 다른 몸짓으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몸짓에 집중하며 호흡하기에 하나가 될 수 있다. 굿은 결국 마음에서 ‘불화’하는 무언가까지 ‘조화’할 때 일어난다. 맺고 풀며 함께 신명에 이르는 집단적인 정동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농촌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 1980년대에 뜨거웠던 그 시절을 살고 있지도 않다. 풍물, 농악, 굿 등은 우리의 일상에 녹아 있지 않다. 이젠 길거리에서 풍물을 하면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주기 보다는 소음으로 경찰에 신고할 확률이 높다. 아마도 그러한 시대의 흐름이 마을굿, 풍물, 농악을 ‘문화재’라는 형태로 보존하려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굿’은 그러한 ‘문화재’의 형태로 박제될 수 없다고 믿는다. ‘무형문화재’, 즉 형태가 없는 무형의 유산은 사람의 몸을 통해 볼 수 있고 사람을 통해서만 전승될 수 있다.[10]
독자에게는 미안하지만,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굿을 벌릴 수 있는 ‘판’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풍물패를 떠나는 날이 온다면, 방학에 일주일 동안 고창에 내려가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맺고 풀고 신명을 느낄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이 앞설 때, 세월이 흘러도 생판 모르는 사이였던 타인과 함께 눈 맞추고 교감하던 순간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할 마음. 불화하는 나의 몸짓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에 밀려온 안도감과 떨림. 누군가의 사소한 몸짓에 감탄하고 박수 치던 전수생들. 그러한 것들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굿과 함께하는 삶’은 그 마음과 순간들을 언제든 다시 꺼내어 살피고, 불화하는 몸짓을 포용하는 조화를 간직하는 삶이라고 살포시 결론을 내려본다.
편집위원 여울 | choibook04@naver.com
[1] 농악대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를 일컫는 말. 장구를 연주하는 사람은 장구 치배, 북을 연주하는 사람은 북 치배 등으로 부른다.
[2] 고창농악보존회에 등록된 이수자가 전수생을 교육하는데, 전수생들은 악기를 가르치는 이수자를 ‘사부님’이라 부르곤 한다.
[3] 송경동(2003). 우리문화순례ㆍ전북 고창농악을 찾아서 풍물가락 그 사람의 뿌리가 그리 쉬 뽑힐까. 145.
[4] 장구 가락으로 ‘덩덩 쿵따쿵’
[5] 가미노치에 (2013). ‘풀이’ 문화와 계승. 20.
[6] 주창윤 (2015). 1980년대 대학 연행예술운동의 창의적 변용 과정. 247.
[7] 마을굿에서는 풍물굿뿐만 아니라 줄다리기와 같은 민속놀이도 진행한다.
[8]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2021.12.09.). 프레시안.
[9] 이명훈 (2019). 전승과정과 소통방식. 281.
[10] 이명훈 (2019). 267.
참고문헌
논문 및 저널
가미노치에(Chie Kamino) (2013). ‘풀이’ 문화와 계승. 국악원논문집, 28, 17–45.
권은영 (2013). 1980년대 이후 고창농악 연행주체에 관한 연구. 국어문학, 55, 53–79.
송경동 (2003). 우리문화순례ㆍ전북 고창농악을 찾아서 풍물가락 그 사람의 뿌리가 그리 쉬 뽑힐까. 민족21, 144-145.
송기태 (2019). 농악 전승집단의 새로운 생태계 구축과 예능 복원·재현의 가치 -고창농악보존회의를 주목하며-. 남도민속연구, 39(0), 201-234.
이명훈 (2013). 고창농악 판굿 가락 형성에 관한 연구(석사, 전북대학교 일반대학원). https://search-ebscohost-com-ssl.oca.korea.ac.kr/login.aspx?direct=true&db=edsker&AN=edsker.000003748321&lang=ko&site=eds-live&scope=site
이명훈 (2019). 고창농악의 전승과정과 소통방식. 무형유산학, 4(2), 261–295.
임형택 (2019). 전통 연행예술 판의 현대적 의의와 체험 콘텐츠 개발의 필요성. 인문콘텐츠, 53, 265–281.
주창윤 (2015). 1980년대 대학연행예술운동의 창의적 변용과정. 한국언론학보, 59(1), 242–264.
기사 및 온라인 자료
조현모 (2021. 12. 09.).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프레시안. Retrieved from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222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