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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광들은 어떻게 영화충이 되었는가

[칼럽] 편집위원 정후

1.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이하 〈노란문〉)〉 (2023)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다큐멘터리로, 영화를 좋아하는 대학생들끼리 모여 만든 영화 공동체인 ‘노란문’에 대해 다룬다.  이들이 활동하던 90년대는 독재가 끝나고 활발했던 학생 운동이 그 동력을 잃어가기 시작한 시점으로, 검열이 풀리며 온갖 영화 비디오들이 불법적인 경로로 유출이 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자료를 구하는 것이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90년대의 시네필들은 여러 영화 서클을 구성했고, 규모가 커지면서 ‘시네마테크’라고 불리는 집단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서 모인 것만은 아니었다. 문학평론가 황종연이 말했듯, 90년대는 한국은 민족성이라는 개념이 무너지고 대학생이라는 집단에게 타도할 적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말을 빌리자면, 90년대 학생들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어떤 길이 아닌지는 알고 있던’ 세대였다. 이 상황에서, 영화 공동체는 꿈의 부재를 해소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담지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방황을 버티게 해주는, 혹은 방황을 심화하는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담은 작품이 이 다큐멘터리에 실려 있는 봉준호 감독의 최초 단편 영화 〈Looking for Paradise〉(1992)이다. 이 영화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는데, 지하실에서 사는 고릴라가 괴물 애벌레를 물리치고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나무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고릴라는 마침내 나무를 찾는다. 그리고 이 장면이 페이드아웃되며, 사실 그 고릴라가 찾은 나무는 TV 속의 나무라는 것을 보여준다. 봉준호와/를 비롯한 노란문 사람들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파라다이스로 상징되는 영화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그곳까지 가는 것이 마냥 쉽지 않다는 생각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게 노란문은 이런 영화를 같이 만들고, 같이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2.그 시대에 영화를 같이 본다는 것


80년대까지의 영화 서클은 학생 운동을 하는 이들의 모임이었다. 진실을 알리고 대학생 스스로의 자각을 위해서 영화를 보는 곳이었다. 물론 예술적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부의 검열로 금지되었거나 정식 수입이 되지 않아 쉽게 구하기 힘든 영화를 본다는 점에서 이들 서클은 일종의 저항성을 갖추고 있었다. 80년대에 영화 서클에서 활동하던 이수정 감독은 ‘들어가자마자 보여주는 것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담은 영상이어서 놀라웠다. 다들 영화를 통해서 무언가 사회에 의미 있는 활동을 하려고 하는 분위기였다.’라고 회상한다. 검열이 심했던 시절에 영화는 진실을 알려주는 수단이었다. 사실이 있는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어려웠던 시기, 그리고 정부가 진실을 정하던 시기에 영화는 실재를 보여주는 매체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 학생 운동의 열기가 식으면서, 영화 서클은 운동성보다는 영화 자체를 향한 애정이 주된 동력인 공동체로 변모했다. 때맞춘 vhs(Video Home System) 의 등장은 이들로 하여금 동시대 세계 영화들을 관람하기 쉽게 해주는 한편, 영화를 샷 단위로 끊어 보거나 심지어는 불법으로 비디오를 복제하는 일마저 가능하게 했다. 또한/게다가, 카메라의 가격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 되면서 영화 제작을 꿈꾸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들의 눈엔 ‘세상이 영화가 되어가는’ 것처럼, 마치 ‘정부가 물에 시네필이 되는 약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는 곧 영화광들의 등장을 의미했다. 정성일을 비롯한 80년대 시네필 세대는 프랑스 문화원과 독일 문화원에서 영화를 봤고, 따라서 영화를 골라서 본 세대는 아니었다. 화면을 정지시킬 수 없었기에 영화를 분석적으로 보기도 힘들었고, 문화원에서 보여주는 영화에 자막이 달린 것도 아니었다. 이전 세대의 시네필들이 제작한 《키노》와 같은 영화 잡지나 영화 서적, 그리고 기술적 혁신 아래서, 90년대의 시네필들은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누렸다.


사회가 요구하는 생산적인 가치에서 영화로 도피한 이들에게 〈노란문〉과 같은 영화 공동체는 영화를 즐기는 데 있어 중요한 조건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나아졌다해도 혼자서 모든 영화를 다 구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인터넷 보급 이전 테이프를 통해서 물리적으로 영화가 공유되던 환경에서 영화는 물질적인 매개, 그리고 장소를 필요로 했다. 


물론 자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같이 보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묻어난다. 그들은 영화를 함께 보는 것과 같이 사진을 찍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어땠는지를 회상한다. 영화는 단순히 매개체에 불과했나 싶기도 하다.


이것은 영화와 함께 떠오른 영화 잡지 열풍과 연결된다. 80년대 국내 시네필들이 해외의 시네필들을 보고 배운 영화 잡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비평이 실려 있었다. 사실 비평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일종의 감상문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 감상을 나누는 것은, 그 감상이 자신의 주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내면에 대해 공유하는 활동이다. 이렇게 서로의 내면을 공유하는 행위가, 어떤 내면을 가져야 할지조차 고민되게 만드는 1990년대에 영화 열풍이 불게 된 이유가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3.현재의 힙스터들


이제 더 이상 영화를 같이 볼 필요가 없어졌을 정도로 영화를 구하는 것이 너무나도 쉬워졌기에 같이 영화를 보거나 어떤 내면을 고백하는 행위의 가치가 무색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영화를 본다는 것이 시간을 소비하는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어려워졌다. (어떤 예술 분야든 다 겪는 문제이지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정성일을 찬양하고, 명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찾아다니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90년대와 보는 영화는 비슷할 수 있어도 그들이 이 문화를 향유하는 이유는 다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삶을 상상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우리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게 오히려 어색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영화 커뮤니티 또한 여전히 존재하지만, 공동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느슨한 연대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은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커뮤니티에 오는 것이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그들은 한 명의 예술 소비자로서 과시의 목적으로 커뮤니티를 한다. 


여기서 ‘영화 비평’ 역할의 변화상에 대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90년대의 비평은 영화의 수가 많지 않았기에 볼 영화를 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봐야만 하는 영화 중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활동에 부합한다. ‘발표되는 모든 작품을 읽고 비평을 남긴다’는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원칙은 영화광들에게도 달리 적용되지 않았다. 과거의 비평은 글쓰기를 통해 내면을 형성하고 고백하는 행위였다. 


반면 현대의 영화 비평은 너무나도 많은 영화를 디지털 환경에서도 볼 수 있게 되면서 볼 영화와 보지 않을 영화를 가르는 ‘큐레이션’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박스오피스 순위와 유명한 비평가의 별점 등의 지표에 따라 보거나 보지 않을 영화가 정해지는 것이다. 이전 세대와 같은 형태의 시네필들은 오늘날 궤멸 직전이다.


이같은 21세기 시네필들에게 마블 영화는 “감성적이고 심리적인 경험을 전달하는 영화{cinema}가 아니라 테마파크”일 뿐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독설은 나름의 위안이 된다. 스코세이지의 발언은 시네마와 필름을 만드는 목적의 차이에 대한 말이었지만, ‘순수하고, 고급진 예술’을 향유하는 ‘시네필’ 소비자 집단에게는 자신들이 남들보다 우월하고 개성적인 소비자라는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일개 대중과는 다르기 위해 노력하는 집단, 그리고 이 다름을 우월함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이 21세기의 시네필이고, 이를 영화라는 문화에만 한정시키지 않는다면, 21세기의 힙스터다. 이들은 대중과 자신들을 변별하기 위해 정성일이라든가 스코세이지와 같은 ‘거물’들의 토막난 발언, 혹은 《피치포크》와 같은 평론지의 위대한 작품 순위 등의 데이터베이스를 자양분으로 삼는 한편, RYM, 왓챠피디아처럼 별점을 매기는 사이트들을 통해 자신의 ‘예술력’을 아카이빙하고 정리해 자랑한다.


또 이 집단의 흥미로운 점을 꼽자면, ‘어떤 태도로 예술을 향유할 것인가’에 대해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1차 힙스터, 2차 힙스터, 3차 힙스터’라는 삼분법은 이들의 공허함을 잘 보여준다.


1단계 힙스터: 대중들이 좋아하는 거를 무작정 싫어한다
2단계 힙스터: 대중들이 좋아하는 거를 무작정 싫어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3단계 힙스터: 대중들이 좋아하는 거를 무작정 싫어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1]


이들은 대중과 다르고자 하지만, 이 ‘다름’이 자신들이 아닌 대중들이 소비하고 ‘남은’ 영역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박스오피스 순위와 차트 순위로 대표되는 대중성에 휘둘리지 않으며 미디어에 종속되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고 믿는 이들이 실은 가장 수동적인 것이다.


이들은 보여주기 위해, 패션으로서 예술을 소비한다. 왓챠피디아 개인의 프로필에 노출되는 본 영화와 책의 숫자는 누가 더 얼마나 많이 봤는지에 따라 힙스터에게 감정적인 보상을 제공하고 우월 의식을 느끼게 한다. 이 게임의 관건은 누가 더 많은 예술영화를 봤는지이며, ‘좋은’ 영화에 높은 별점을 알맞게 주는지이다.


즉, 예전의 시네필들이 한데 모여 각자의 감상평을 나누면서 자신의 내면을 고백했다면, 현재는 양적으로 더 많은 영화를 보고, 별점을 남기고, 한 줄 평을 쓰며 누가 더 합리적인 별점을 내린 사람인지에 치중한다. 고백할 내면이라곤 없고, ‘죽기 전에 봐야 할 1001편의 영화’를 누가 더 많이 봤는지만이 더 중요하다.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놓을만한 훌륭한 시네마를 보더라도, 왓챠피디아라는 앱에서는 그저 하나의 편수와 0.5부터 5점까지의 점수 안에서 수치화될 뿐이다.


과거에는 모두가 볼 수 있는 영화의 선택지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이너’한 취향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았고, 한 사람이 아무리 많은 영화를 보더라도 그 편수의 격차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예술의 취향을 따질 때 얼마나 유명하지 않은 작품을 보았느냐, 그리고 그런 작품을 얼마나 많이 보았느냐가 중요해졌다. 예술의 향유가 마치 노동처럼 지난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질 좋은 작품을 얼마나 많이 감상했는지, 즉 나의 개성을 얼마나 생산했는지가 지표화되어 평가를 받는 모습은, 직장에서 성과지표를 내야 하는 직장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의 향유가 지표화되었다는 것, 그로 인해 남과의 비교가쉬워졌다는 것은 예술을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방식조차, ‘쓸모없음으로 가치가 있다(김현)’라는 것을 내세웠던 기존의 예술의 소비관과는 분명 달라진 면이다.


하지만 힙스터들에게 노동으로서, 혹은 패션으로서 예술을 소비하고 있냐고 물으면 절대 그렇다는 답변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숭고한 이유로 예술을 ‘향유’하고 있다고 답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의 ‘구분됨’의 근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대중과 자신을 구분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일까?


4.미개한 대중들은 실신


다소 마이너한 장르였던 힙합은, 〈쇼미더머니〉를 통해  한국에서 가장 메이저한 장르 중 하나로 등극했다. 〈쇼미더머니〉 방영 초창기인 2010년대 초에, 힙합씬에서는 ‘저런 경연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은 Real이 아니라 Wack(가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많은 래퍼들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나 스윙스와 그의 레이블에 속한 아티스트들이 이 프로그램을 기회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유명세를 얻은 후로, 수많은 래퍼들이 하나둘씩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이나 참가자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시작된 것이 ‘노선 바꾼 뱀새끼’ 논쟁이었고, 〈쇼미더머니〉 출연이 래퍼로서의 진정성에 흠집을 내는 일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딥플로우, 저스디스와 같은 래퍼들은 ‘〈쇼미더머니〉에 나가는 것은 영혼을 파는 행위이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많은 비난을 면치 못했다.

 앞선 스코세이지의 발언이나 〈쇼미더머니〉 논란을 보면, 특히 상업적인 목적에 힙스터들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돈을 버는 것 자체로 뭐라 하는 사람은 없다. 힙스터들에게는 돈을 ‘어떻게’ 버느냐가 더 중요한 지표다. 즉, 상업적인 목표로 만들어지는 작품들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힙스터들의 이런 태도는 허상에 가깝다. 타란티노나 박찬욱처럼 스스로를 ‘상업영화 만드는 감독’으로 자칭하는 이들이 (모든은 아니어도) 힙스터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돈을 노리고 만들더라도 평론가들이 극찬하거나, 유명세를 크게 얻지 못했다면, 힙스터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 후보에 오를 만하다. 상업성이라는 잣대로 작품을 평가한다고 보기에는 그들의 잣대는 일관되지 못하다.

그들이 무슨 작품을 좋아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상업성을 일종의 오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예술의 내면고백적 특성과, 작품을 받아들일 때 이에 따라 의도를 해석하는 데서 기인한다. 상업적인 작품은 내면이 없는 작품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내면을 강조하는 태도는 근대 이후 예술의 창작 동인이자 판단 기준이었다. 이런 관점 아래서는 작품의 모든 구성 요소들, 이를테면 가사 한 줄, 장면 하나에까지 작가의 놀라운 의도가 삽입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힙스터들에게는 ‘리얼함’ 즉, 예술의 진정성이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가와 연결된다. 


앤드류 포터는 그의 저서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에서 진정성의 조건으로 즉흥성, 위험 감수, 감성 발현, 창의력이 있고, 위계성, 상업성, 착취성이 없는 유기적 소규모 공동체를 제시한다. 그들은 계획되지 않고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원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작가의 의도를 확인하고, 확신을 얻기 위해 작가를 둘러싼 환경과 생애사를 추적한다. 예를 들면, 힙합은 그 사람의 출신과 불우했던 성장 배경을 확인한다. 작품 자체에서 진정성을 확인할 길이 없기에 작가의 배경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리얼함’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한 상업성의 허구에 이어서, 그럴 듯해 보이는 나머지 조건들도 주류의 것과 조금 달리 보이거나‘쿨’해 보이는 문화라면 정해진 기준 없이 모두 흡수한다. 힙스터들은 새로워 보이는 문화를 흡수하고, 거대 미디어는 이들을 주류 문화로 다시 회수한다.


5. 과거와 달라진 양태


과거라고 해서 이렇게 대중과 자신을 구분 짓는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 20세기 초에 발행되었던  《Little Magazine》에는 ‘대중의 취향과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슬로건이 표지에 적혀 있다. 모더니즘적 우월감에는 대중과 타협하지 않는다 -돈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 는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지만, 그들은 현재의 힙스터처럼 대중에게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새 시대에 맞는 예술을 할 것’이라며 과거를 공격하는 태도를 가졌다. 모더니스트들의 적은 대중이 아니라 19세기였다.


‘힙스터’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비트 세대들 또한 상업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들에 반발했고 자신들을 주류 문화와 구분 짓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는 구분 짓기에서 나아가 이전의 속물적이었던 ‘재즈 세대’를 공격하고,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후의 히피 세대는 자본주의와 타협하지 않는 반문화의 특성을 띄었고, 자본주의와 전쟁을 극복할 문화적 모토로 ‘사랑’을 내세웠다.


과거의 힙스터들 중에서 현재와 가장 비슷한 부류가 있다면, 영 어번 프로페셔널즈(Young Urban Professionals)의 머리글자 YUP에 히피를 결합해서 불린, ‘Yuppie 세대’가 될 것이다. 이들은 이전의 세대와 달리 물질적인 것과 명품으로 자신을 주류와 구분 짓는 세대였다. Yuppie 세대는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2000)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이전 세대가 문화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고 일종의 변화를 도모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그저 즐기고 구분 짓는 것에서 끝나는 생활을 즐겼다. 영국에서도 20세기 말에 ‘차브족’이라는 세대가 등장하여 이전의 모드, 펑크와는 다르게 사치를 즐기고 주류 문화에 반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일탈에 불과했으며, 이전 세대와 달리 어떤 공통적인 의제나 방향성이 없었다.


이들 집단과 현재의 힙스터들의 공통점은 ‘정체성 없음’과 ‘개인주의’다. 지향점이 없는 채로 그저 일탈만을 원하며, 지향점이 없기에 집단을 형성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공동체를 만들지 않는다. 어떤 구체적인 문제의식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연대는 느슨해지거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사회비판적인 태도는 대중비난적 태도로 희석되었다. 힙스터들이야말로 서열을 나누고 등급을 매기는 체제에 가장 충실한 이들이기에, 자신들의 예술을 오염시키는 대중들을 제하고는, 그 누구도 공격할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순수한 예술을 추구함으로써 예술을 그 자체로만 보는 동어반복적 행위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이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내서 기존의 사회 규범에 도전했던 시기, 일종의 계몽적 역할을 수행했던 시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수용자든 창작자든 ‘샘플링’이나 ‘리바이벌’ 그리고 ‘레트로’를 통해 대표되는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으며,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즉흥적이지도 않고, 과거의 것을 다시 쓰는 창작물들은 위험을 감수하지도, 창의적이거나 급진적이지도 않다. 또한 힙합, 펑크, 소울 등의 장르가 주류화되어 백인들에게 소비된다는 점에서 문화적 착취라고 볼 여지도 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힙스터들의 ‘진정성’ 문제는 ‘김치 드릴’ 논쟁으로 이어진다. ‘드릴’이라는 힙합 장르는 영국에서 유행하는 장르로, 영국 범죄 집단 간의 싸움과 삶의 고난함을 소재 삼아 특유의 비트와 과격한 가사로 표현해낸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 수입되면서 ‘이런 류의 장르를 과연 한국인이 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논쟁이 래퍼들의 디스전으로 이어졌다. 한국은 영국과 달리 범죄집단 간의 경쟁이 일상적이지도 않은데 과연 한국인이 드릴을 하는 것이,그리고 진정한 드릴을 소화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 골자였다. 힙합이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영국인의 삶이 직접적으로 녹아 들어 있는 음악 장르인데다 Real과 Wack을 구분하는 것을 중시 여기는 장르라는 점에서 이런 논쟁이 일어난 것이지만, 최근 뉴진스가 사용한 저지 클럽 비트라든가, 아니면 너무나 대중화 되어 더 이상 논쟁이 되지 않는 다수 케이팝 장르의 힙합 차용도 실은 이런 논쟁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논쟁은 실은 사운드적인 특성만을 가져올 때 -스톤 로지스, 악틱 몽키스의 힙합 비트 차용, 라디오헤드의 재즈 사용-는 크게 논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BTS가 힙합의 문화를 ‘아이돌화’했을 때, 특히 ‘한국인이 무슨 락 정신을 운운하냐’는 발언에서 드러나듯, 그 정신적 측면을 차용할 때는 문제시된다. 이는 그들이 사운드/가사 그리고 문화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사용했을 때, 그들의 문화적 측면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으로 파악되며, 수용자들이 음악을 단순히 온전히 예술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창작/수용자의 문화적 정체성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포터는 그의 책에서 유기농을 구매하는 모순에 대해 말한다. 어떤 계급이 일종의 과시로 유기농 식품을 소비하는 것은 유용해 보이지만, 실은 더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것을 소비함으로써 과시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주장한다.  유기농 식품은 그것이 정말로 친환경적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로컬 푸드’라는 개념 또한, 어디까지가 지역적인 것인지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하지만 유기농 식품과 로컬 푸드의 구매자들은 그것의 소비로 자신을 남들과 구분 지을 수 있고, 이는 특히 그것이 ‘친환경’이라는 장점 뒤에 숨어있기에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힙스터도 다르지 않다. 그들이 내세우는 모호한 ‘예술을 자본으로부터 보호하자, 예술을 순수하게 유지하자’라는 명분 뒤에는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예술을 향유하지 않고 소비한다.


6. 그들만의 공동체


우리가 힙스터라고 부르는 집단은 남들과 구분되려 하면서도 그 대상조차 모르는집단이다. 이들은 지독히도 개인주의적이어서, 남을 의식하긴 해도 남을 위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떠한 공동체를 만들고, 한 자리에 모일 이유라곤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취향을 공유하기 위해 이전 시대의 공동체에 대응할만한 장소들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왓챠 파티’나 ‘리스닝 파티’는 비록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예술을 같이 향유하는 경험을 만들어낸다. 예술이 대량 생산되는 시대에, 이들은 자신이 소비하는 예술을 통해서 자신 또한 특별해지기를 원한다. 벤야민이 사망 선고를 내린 ‘아우라’는 기이한 형태로 부활한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반자본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모두 돈과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특별한 예술’을 향유되는 것이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들의 일회성 연대와 그 우연적인 만남, 힙스터의 정체성 부재라는 특성은 그들이 연대체로 발전될 수 없는 한계의 원인이 된다. 취향을 공유하고 ‘뭘 좀 아는 인간’이라고 서로 평가하는 동시에 그들은 서로 다시 구분 지어지기 위해 차이점을 찾고, 생산해 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어떠한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추종하는 아티스트가 주류 문화에 들어온다고 해도, 아마 그것은 그들이 아닌 대형 자본의 힘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의도치 않게, 혹은 꽤나 불손한 의도로 기여하고 있는 점을 생각해보면, ‘컬트적 인기’를 주는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예술의 생명력은 획일화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들이 하루종일 붙들고 있는 실험적이고 마이너한 작품들, 반체제적이고 전통에 순응하지 않는 것들 속에서 그들은 무언가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대개는 샘플링이나 레트로와 같이 기존의 것들을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어쩌면, 언젠가는 정말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들이 유행에 뒤쳐진 옛것들, 골동품들을 수집하는 행위는은, 서버가 폐쇄되면 그 속에 저장된 정보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본질적 의미의 아카이빙이 어려운 디지털 시대에서, 아무도 관심주지 않는 ‘쓸모없는’ 것들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힙스터들이 천착하는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진정성은, 그제서야 비로소 빛을 볼 것이다.


7.미래를 상상하며


때문에, 힙스터들이 단순히 타인과 구분 짓기 위해서 예술을 소비하는 수동적인 수용자로 그칠 것이라고 비관하는 일은 ‘3단계 힙스터’론에서 그러하듯 ‘N단계 힙스터’의 연쇄를 낳을 뿐이다. 비록 힙스터들이 소비자적 정체성을 고수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저항에 실패하고, 90년대의 공동체로 회귀하는 데도 실패할 것이라 해도 말이다.


힙스터들의 에너지가 〈무한도전〉과 〈거침없이 하이킥〉을 마지막으로 와해된 대중이라는 실체 없는 집단에게 쓰인다는 것은 낭비처럼 보인다. 그들이 자신들이 구리다는 사실을, 그들은 영화를 사랑할지 몰라도 영화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왓챠피디아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근거 없는 기다림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름과 구분 짓기에서 ‘벗어난’ 이들이다. 주류 문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에 대해 고찰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류와 반주류를 가리지 않고 문화 자체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예술을 현실의 반영이자 현실에 대한 비판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등장해서 예술을 순수한 예술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바라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80년대에 영화가 마치 사실을 진실을 담보하는 매체로 사용되었던 형태와는 다를 것이다. 오히려 예술이 뿌려놓은 수많은 허구들 속에서 실재를 담지하는 능력을 통해 예술을 봐야 한다.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작품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정치적 올바름마저 트집잡히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탈정치 속에서 정치를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을 기다려야 한다. 


힙스터들은 분명 자본주의의 산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힙스터는 예술을 향유할 정도의 능력과 여유는 있는 중산층, 탈이념 시대에 살고 있는 정체성 없는 사람들, 자신들을 끊임없이 증명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다만 예술이라는 생산성과 거리가 멀어보이는 특수한 분야에서까지 자본주의의 논리를, 계급의 논리를 도입했기에 이들은 ‘힙스터’라는 명칭을 얻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행동양식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반은 그들이 소비하는 문화에 있다. 그들이 문화를 바라보는 태도만 바꿀 수 있다면 힙스터들은 허울뿐인 진정성을 명분으로 한 구분 짓기에서 벗어나, 그들이 예술을 증명을 위한 수단에서, 증명을 위한 수단으로 쓰게 만든 사회를 공격하는 이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본다.


편집위원 정후 | vlaestra@korea.ac.kr


[1] 흔한 센충이 (2022.11.27.). 심야형의 힙스터론 (feat.힙스터되는 법) [유튜브].


참고문헌


단행본

강덕구(2023).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 글항아리.

마크 피셔 (2018).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번역). 리시올.

앤드류 포터 (2016).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노시내(번역). 마티.


기사 및 온라인 자료

흔한 센충이 (2022.11.27.). 심야형의 힙스터론 (feat.힙스터되는 법) [유튜브]. 접속일 2024.02.21.. Retrieved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JaOCFpaSbus 


영상자료

이혁래 (2023).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주)브로콜리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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