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사랑'] 편집위원 윤석
Abstract: 사랑과 폭력 사이의 경계는 지극히 모호하다. 이 글은 ‘수동적 정동인 사랑이 왜 권력의 작용인 폭력으로 받아들여지는가?’를 연구 질문으로 삼아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랑은 타자의 체험을 가능성으로 자아의 행위를 끌어내는 매체이다. 연애적 사랑이란 근대 사회에서 가까운 세계를 구성하여 개인의 자아 정체성을 만드는 친밀성의 기제이다. 사랑은 열정과 낭만의 의미론에 기초해 세워졌으며, 열정(passion)의 특성상 수동적(passiv)인 감정(pathos; πάθος)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경계 넘기라는 점에서 폭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도리어 나를 사랑해달라는 짝사랑의 요구는 사랑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기제가 된다. 섹슈얼리티는 사랑 안의 폭력의 범위를 정하고 이를 규율하나, 사랑을 윤리로 재단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사랑의 개별성을 침범하고 사랑을 이해할 수 없게 할 뿐이다. 사랑은 객관적 자아 너머 자신도 몰랐던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바, 사랑은 오히려 타자 되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러한 이해에서, 사랑에서의 욕망의 대상/주체-도식은 극복될 수 있다.
— Ваша... — прошептала она едва слышно.
"당신 거예요……" 하고 그녀는 간신히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속삭였습니다.
- 이반 투르게네프 (1983). 짝사랑. 이철 역. 범우사. 225쪽. -
「死しんでも可いいわ……」とアーシャは云いつたが
聞取き〻とれるか聞取き〻とれぬ程ほどの小聲こごゑであつた。
"죽어도 좋아..."라고 아샤는 말했지만, 알아들을 듯 말 듯 한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 후타바테이 시메이 (二葉亭四迷) 역 (1916). 片恋. 春陽堂. 100쪽. -
사랑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소식이 들려오는 마당에, 사랑을 매개로 한 폭력적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헌법재판소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갖는다고 판시한다.[1][2] 이에 따르면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범해 성적 주체의 자유 의사에 반하여 그들을 억누르고 의사를 강요하려는 행위들은 그것이 사랑일지라도 엄연히 폭력이다. 사전적으로 폭력이란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 수단이나 힘. (…) 억누르는 힘”이다.[3] 요컨대 폭력은 타자의 신체에 대한 침해의 수단으로서 억지와 강제로 자유의사를 억누르는 힘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강제는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의 자유의사를 억눌러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킴”으로 정의한다.[4] 요컨대 폭력의 핵심은 자유 의사를 침범하여 강요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때 사랑은 폭력이 된다. 이 기준에 근거하여 ‘어떤 사랑은 폭력이다’ 라고 쉽게 결론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사랑과 자기결정권 사이의 기묘한 관계를 배제한다면 말이다.
사랑은 그 언어적 형식에서부터 상대의 의사를 넘는 도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 라는 사랑의 형식 속에서, 상대는 늘 나의 목적어로 나타난다. 여타 유럽 제어에 비해 한국어에서, ‘사랑하다’가 ‘너’에 대하여 가해지는 동사라는 점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에서 “-를 -한다”의 형태로 보다 명백히 드러난다. 이 관계의 이면은 스페인어 및 포르투갈어와 같은 역구조동사 언어의 예시에서 볼 수 있다. 스페인어 “Me gustas tu”에서 Me(나에게)와 tu(너는)는 각각 여격어와 주어로서 자리를 바꾸고 있다. 둘을 연결하는 것은 gustar 라는 역구조동사로서, 스페인어 문법에서 이는 ‘(여격어)에게 (주어)가 -의 영향을 미친다’ 로 기능한다. 여기서 “나는 너를 사랑해”의 주-객 구조는 “너는 나에게 사랑을 하게 해”의 구조로 뒤바뀐다. 두 언어의 비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랑은 그 자체로 타자와 자아 양측에 일정한 효과를 낳는다. 둘째, 그 효과는 주체의 결단이 아니라 도리어 타자의 효과이다.
사랑과 폭력의 관계는 이처럼 그 핵심인 자기결정권을 경유할 때 굉장히 당혹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랑이 폭력이 아니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자기결정권이 사랑받는 사람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앞선 논의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 때문에 사랑을 하게 된다. 여기서 타자와 자아 사이의 자기결정권의 문제는 그 경계가 꼬이고 흐트러진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모든 사랑은 자기결정권의 침범이므로 폭력이요 강제라고 해야 할 것만 같다. 이 논지를 반대로 밀고 나가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지는 실질적 폭력들 또한 다른 사랑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가히 황당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자유 의사 너머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지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달리 말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결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빠져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목소리는 떨리며, 얼굴은 빨개지는’,[5]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된다. 원해서 열병에 걸리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신체적 반응 양상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사랑을 하도록 부추겨진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몸 간의 상호작용이 개인의 인지에 영향을 미치는 ‘정동’ 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랑의 전-개인적(pre-individual)이며 신체적인 단계는 아무리 플라토닉한 사랑일지라도 자유 의사 앞에 놓여 자유 의지를 뒤흔든다.[6]
사랑과 폭력 사이의 애매한 관계는 ‘고백 공격’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좁은 의미에서 고백 공격은 서로 간의 어떠한 전개도 없이 느닷없이 사랑을 고백해서 느끼는 정신적인 타격과 황당함의 표현이다. 요컨대 사랑의 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고백이 들어왔을 때 이를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유튜버 랄로의 유행어 “내가 누군가를 이제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잖아요”[7]는 이러한 패러독스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고백 공격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은 고백을 거절당한 사람이 아니라 고백을 받은 사람이다. 굳이 폭력이 들어가지 않아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가 폭력이 된다. 넓은 의미의 고백 공격에서는 굳이 고백까지 가지 않고 좋아하는 티를 내거나 감정을 들키기만 해도 폭력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용법의 고백 공격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의 사랑에의 연루에서 느끼는 부담감을 상대에게 떠넘기고 싶을 때 쓰인다. 물론 권력을 이용해서 고백을 빙자해 연애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이 그러한 경우를 옹호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고백 공격의 의미론은 이러한 권력 격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고백해서 혼내주자’라고 떠든다 해도 이는 자조일 뿐 실제로 폭력을 휘두르기 위해 전쟁터에서 고백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체 ‘사랑의 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 사람과의 관계’는 무엇에 의거한 것일까? 이것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면, 어느 고백이 어느 날 기묘한 과정을 거쳐 고백 공격을 넘은 스토킹으로 읽히지 않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을까?
이 글은 그러므로, ‘수동적 정동인 사랑이 왜 권력의 작용인 폭력으로 받아들여지는가?’ 라는 질문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랑과 폭력의 관계 지점을 자기 결정권에 기반하여 해설하려는 기존의 시도들은 사랑 자체의 구조화된 형식 때문에 상기한 바와 같은 애매한 지점들을 남기고 있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기존의 자기 결정권의 도식은 기능하기 어렵다. 사랑이 인정과 수용의 문제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그에 반해 사랑 속의 폭력을 논하는 많은 담론들은 사랑이 위치하는 상황과 구조들을 언급함으로써, 사랑을 섹슈얼리티를 경유한 권력 관계의 산출물로서 읽고자 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 나의 사랑은 단지 구조들의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상대에 대한 고유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환상이든 구성물든 엄연히 기능하고 체험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전히 사람은 사랑은 빠져들고, 여전히 ‘너는 내 거야’는 노예제가 아니라 달콤한 사랑의 밀어로 기능하며, 여전히 짝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글은 개별적 사랑에 있어 여타 행위 및 소통과 다른 특성을 파악하여 사랑의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다루는 사랑은 연애로 한정한다. 곧 이 글에서 사랑이란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하여 이중의 성적 및 연애적 지향을 전제로 하는 혹은 이와 유사한 관계 및 지향으로 한정한다. 여타의 친밀 관계 아래의 사랑, 이를테면 부모-자식 간의 사랑이나 국가나 돈 혹은 반려 동물에 대한 사랑 등을 글에서 제외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나 구세주가 가르치는 초월적 사랑 또한 글의 범위에서 제한한다. 그렇다면 이들 관계를 경유하여 연애 관계에서의 문제를 우회하려는 모든 시도는 효과적으로 거부된다.
“달콤한 사랑의 쓰라린 고통”(루만, 2009)을 피하지 않고 상처를 정면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상처를 주는 사랑 그 자체에 대해 다뤄야 한다. 그러나 사실 사랑에 대한 하나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 “그 자체의 내재적인 어떤 성격에 근거해서 감정적 관계”(기든스, 2003)[8]로서 내밀한 관계 속에서 친밀성의 소통을 이어나가는 것이라 한다면, “50억의 심리적 체계와 50억의 세계관”(Luhmann, 1990: 54; 김미경, 2017: 80에서 재인용)보다 많은 사랑 하나하나의 본질을 논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멀리서 나의 사랑을 회상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다.”(크리스테바, 2010)[9]
그럼에도 사랑을 논하고 경험하는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사랑은 대중 문화의 주요 화두 중 하나가 되었고, 연애는 생애과정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랑은 근대 사회가 낳은 주요 담론 중 하나로 부상했으며, 근대 사회의 제도들 속에서 배양되고 조정되어 다양한 형태로 착근되어 있다(푸코, 2018).[10] 자유 연애가 사랑을 대표하고 사랑이 독립적인 매체가 된 것은 열정과 낭만의 의미론이 등장한 근대의 일이다(루만, 2009). 김미경(2017)이 정리한 바, “많은 사회학자들은 근대의 개인주의화가 친밀성의 구조변동을 가져왔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기든스, 1996; 벡·벡-게른샤임, 1999; Hochschild, 2003).[11] 정성훈(2014)은 사랑을 근대 사회의 친밀성 처리 기제로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루만은 사회의 기능적 분화와 함께 개별 인격이 사회의 어느 한 하위체계에 정착할 수 없게 되며, 그로 인해 체계/환경 차이, 즉 개인과 사회의 차이가 뚜렷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개인은 출신 가족이나 기능적 역할들에서는 자기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가까운 세계와 먼 세계의 차이를, 즉 ‘개인적으로만 유효한 경험, 평가, 반응 방식’과 ‘익명적으로 구성되고 모두에게 유효한 세계’의 차이”를 사용하게 된다고 말한다. 전자의 세계에서 성립하는 관계, “타인의 자아 중심적 세계 설계를 확증”해주는 파트너와의 관계이며, “삶의 모든 상황에서 파트너를 계속 함께 고려”해야 하는 “준거의 보편성”을 갖는 관계가 ‘친밀 관계 (Intimbeziehung)’ 이다.[12]
연애적 사랑의 배경이 되는 근대 사회의 양식은 기능 분화, 곧 정상(頂上)도 중추(中樞)도 없이 기능 체계들 각각이 자신의 기능을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구조이다.[13] 이 관점에 따르면 사랑 또한 기능 분화된 근대 사회에서 고유의 코드를 갖고 친밀성을 처리하는 매체이다. 역설적으로, 사랑에 대해 다루기 위해서는, 사랑을 감정이나 내면이 아닌,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 매체이자, 기능 분화된 근대 사회에서 친밀성이 코드화되는 방식 중 하나(루만, 2009)로 보아야 한다. 연애 관계를 염두에 두고 사랑의 폭력성에 대해서 다룰 때, 감정이나 내면 등 사랑의 본질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은 논의의 주제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사랑이 권력·진리·화폐와 같은 독립적인 매체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들에 자극을 받을 수 있을지라도 다른 체계에 종속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당선이나 돈이나 연구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다. 연구의 성패가 돈에 달려있지 않고 사업의 성패가 집권에 달려있지 않듯이 말이다. 그런데 기능 분화의 매체들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필연적인 기반도 갖추지 못 한다. 따라서 코드 자체에 대한 질문은 결코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 논리적으로 사랑 자체는 사랑한다/사랑하지 않는다 구분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구분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연애는 연인이 좋아서 하지 연애 자체가 좋아서 하지 않는다. 설령 속마음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소통을 통한 사회의 유지를 위해 역설의 언급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번 매체가 형성되어 소통을 진행하게 되면 이러한 소통을 해야 할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상황은 그 매체의 존속에 큰 위협이 된다. 연애를 하다 보면 “넌 대체 날 사랑하긴 하는 거야?”라는 질문이 찾아온다. 그러나 사랑이란 게 대체 왜 이 모양인지 궁금해서 “사랑이 뭔데?”로 답하면 이별을 피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역설이 언급되는 대신 ‘탈역설화’를 가능하게 하여 매체를 존속 가능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각 매체들의 코드화, 프로그램화, 절차화 등이다. 사랑의 경우 그 코드는 ‘사랑한다/사랑하지 않는다’ 구분이 된다.
그런데 연애로서의 사랑은 통상적으로 일대일 관계이므로, 사랑은 경제·법률·정치 등과 달리 기능 체계나 조직 체계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친밀성의 코드화 중 한 종류이므로 그 반대항인 기능 체계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 또한 결혼 계약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사랑의 조건도 아니고, 반대로 사랑 공동체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따라서 기능 체계들이 제도화나 절차화를 통해 ‘역설을 돌려막는’ 동안 사랑은 늘 역설화에 집어삼켜질 위기에 처해 있다. 사랑에 있어 탈역설화를 가능하게 하는 의미론의 공급은 일반적으로 대중매체에 의해 가능해진다(정성훈, 2014).
이 의미론은 연애적 섹슈얼리티의 주요한 부분을 이룬다. 인스타 감성의 카페나 카카오톡 선물이 그렇듯이 말이다. 이러한 의미론적 매체의 예시로서, 오늘날 스마트폰 보급 이후 시대의 사랑에서는, 데이팅 대화 앱 ‘비트윈’의 이모티콘이자 대표 캐릭터인 ‘모찌’를 대표 주자로 들 수 있다. 말랑말랑하고 동그란 몸에 짤막한 팔을 파닥거리며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모찌는 연애 감정의 간질거림을 상징화한 캐릭터로서 대화 이모티콘을 넘은 비트윈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사랑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답이 불가능한 질문에 모찌는 연인 간 내밀한 사랑의 외화된 현현으로 나타나 질문을 회피시키고 사랑의 소통을 지속시킨다.[14]
오늘날의 사랑의 의미론적 근원에는 열정과 낭만의 의미론이 있다. 루만은 『열정으로서의 사랑: 친밀성의 코드화』 (Liebe als Passion: zu Codierung von Intimität, 1982)에서 오늘날 사랑의 원초적 형태를 근대 낭만주의의 영향 속에서 밝힌다. 이 근대적 사랑의 근원은 열정(Passion)이다. 연애적 사랑은 가족 단위의 사랑이 도달하지 못 하는 곳에서 느끼는 좌절과 쓰라림에서 뜨겁게 시작했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근대적 사랑 이전, 완벽한 상대라는 이상에 나아가기 위한 공적을 달성함으로써 쟁취하는 ‘이상적(ideal) 사랑’에 대비된다. 『클레브 공작부인』, 『신 엘로이즈』,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 등 근대 초기 낭만주의 연애 소설들에서, 사랑은 쟁취가 아니라 ‘비극’으로 나타난다.(정성훈, 2023: 187-217) 클레브 공작 부인은 결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사랑의 결실을 이루기를 거부하고 체념에 빠져든다. 생 프뢰와 쥘리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다는 점에서 지고지순하며, 알베르트가 그러하듯 볼마르 또한 악역이 아니다. 베르터는 누구보다도 격정적이고 사랑에 어울리는 청년이지만 샤를로테는 그의 사랑을 거부한다. 이들 작품에서 지고지순한 사랑이 그대로 행복한 가정이 되는 연속극 같은 결말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사랑-섹슈얼리티-결혼 모델이 인륜의 현대적 판본으로 등장하는 것은 헤겔의 시대가 되어서이다. 오늘날 사랑해서 가족을 이룬다는 말을 하기 위해 열정은 영원한 동반 속에 방탕을 병합하고 결혼 속에 섹슈얼리티를 포섭하며 ‘낭만적 사랑’을 ‘만들어야’ 했다.
이 낭만적 사랑이 현대에 마주한 산적한 문제들을 뒤로 하고, 헤겔적인 ‘인륜적 사랑’ 속에 열정으로서의 사랑이 포섭되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Первая Любовь)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그날, 나의 고통도 시작되었다.”라고 시작한다. 사랑은 달콤한 고통이 고통 그대로 사랑의 핵심이 되며 시작한다. 거꾸로 말해, 고통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주인공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몰락귀족의 딸 지나이다에게 회오리처럼 사랑에 휩쓸려 그의 연적을 죽이려 칼을 들고 나선 밤 정원에 있던 지나이다의 사랑이 블라디미르 자신의 아버지였음을 목격한다. 도무지 인륜 속에 포섭될 수 없는 이 사랑은, 정숙 너머의 장난 놀음에 사랑에 대한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 사랑의 원천은 바로 이 ‘열정으로서의 사랑’에 있다. 사랑의 언어들은 격렬하고 소모적이면서도 강렬한 생기를 불어 넣는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열정적인 사랑은 그리움이나 애틋함 등의 언어로 표현된다. 낭만주의 시대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애착의 대상은 뜨거운 감정으로 현현한다. 오랜 노부부와 같은 연인이라도, 상대는 여타의 친밀 관계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격 너머의 따뜻함으로 상징화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경이롭고 독특한 존재로 여겨진다. 사랑이 이처럼 이상화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타자가 자아 너머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열정은 수동적인 감정이다. 사랑이 뜨거울 수 있는 이유는 자기 지평 너머의 뜨거움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정(Passion)과 수동(Passiv)과 감정(Pathos)은 모두 같은 어원인 ‘πάθ-’(pas-), ‘견뎌내다’에서 나온다. 열정적 사랑에서 자아는 타자를 향해 힘차게 진격하기는 커녕 멀리서 온 감정을 ‘견딜 수 없어’ 토해낸다. 사랑의 불을 끄지 못 하는 자아에게 사랑이 주체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판단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사랑은 그 깊은 근본에서는 대단히 수동적인 사건이다.
거꾸로 말해, 타자에게 뿐만 아니라 자아에게까지 사랑은 비개연적인 일이다. 느닷없이 찾아온 뜨거운 감정을 다른 이유 없이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견뎌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토록 수동적이고 비개연적인 일이 다른 사건과 구분되어 일어날 수 있도록 근대 사회는 수백 년에 걸쳐 의미론을 발전시켜 왔다. 근대 사회의 “매체들은 체험 내지 행위로의 귀속 차이와 자아 내지 타아로서의 입장 표시 차이를 통해 네 가지 종류로 분화되어 있다.”(정성훈, 2014)
사랑은 이 도식에 의하면 타자의 체험을 자아의 행위로 받는 매체이다.[15] 사실 어떤 소통에서 자아가 타자를 이해할 수 있으며 어떤 사회에서 타자와 자아 간의 경계가 무너지겠느냐마는, 사랑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의 체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사랑의 행위를 구성해낸다는 점에서[16] 어떤 사회적 체계보다도 일방적인 소통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은 서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그 너머의 ‘본’모습을 사랑한다. 역설적으로 그 본모습이 무엇인지는 서로가 다른 사람인 이상 영원히 알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곧 짝사랑이다” 라고 정리할 수 있다.
사랑이 그 자체로 의도하지 않은 가능성에 근거해 타자를 해석하고 타자에 대해 행위하도록 한다면, 사랑과 폭력 사이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사랑이 폭력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사랑이 왜 폭력으로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한 물음은 오히려 거꾸로 뒤집어야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사랑은 왜 폭력이 아닌가’ 라는 질문이 나을 정도로, 사랑은 폭력과 몹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앞선 ‘고백 공격’ 의 예시로 다시 돌아가보자. 권력에 대한 문제를 잠시 미뤄두자면, 고백 공격에 있어 사랑의 감정은 연인의 의지에 반하는 침입으로 다가온다. 어떠한 전개도 없이 뜬금 없이 관계에 있어 사랑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 왜 사랑이 상처까지 되는지 근본적인 의문은 제쳐두더라도 — 사랑이라는 소통 형식은 원래 그 자체로 타자의 체험을 자아의 행위로 받는 소통이다. 다시 말해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현행화되지 않은 가능성을 구성해 투사하는 소통이다. 고백 공격 이전의 전개와 사랑 자체는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능성의 연속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구별이 힘들다. 실제 연인의 사랑이 다양하듯이, 사랑의 전개 또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고백 공격을 받아 경계를 침범당한 상처를 ‘상처’라고 말하기 전에, 전개를 위반한 뜬금 없는 고백이 ‘폭력’이냐는 질문은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사후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 전개란, 근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자기 혼자만의 생각에 지나지 않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히려 타자의 경계 넘기를 용인하는 매체이다. 사랑의 의미론은 의도하지 않은 바대로 타자를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타자의 지평에 들어서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오히려 이 경계 넘기는 사랑의 의미론에 있어 허용된 침범이다. 경계 허물기의 예시 중 하나는 사랑에 요구되는 숨김 없음의 미덕이다. 연인의 역할에는 투명함이 강하게 요구된다. 연인끼리는 서로의 필요, 욕구, 경험을 내면화해 상대방의 기쁨과 고통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깊이 느낀다. 단순한 사랑 놀이를 하려고 역할에나 충실하라고 냉소해도, 막상 상대가 그 역할을 다수에게 뽐내며 바람을 피우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최소한 열이라도 받아야 인지상정이다. '나'와 '너' 사이의 장벽은 사랑 안에서 투과성을 갖게 된다. 이 투명함은 연애 관계 이전의 짝사랑에서 이미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에 자신을 투영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상상하여 그의 내면에 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사랑이 완전한 진실성을 가능하게 하진 않는다. 사랑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공간을 무너뜨리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녹아버려 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내면이라는 표현은 도리어 그 내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기에 사랑의 과정은 오히려 꾸며내지 않은 내면의 진실이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요구하고 끊임없이 검증하는 과정이다. 짝사랑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내면의 깊숙한 곳을 알고 느끼며 서로 진실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아무리 갈망해도, 상상 속에서 공유된 세계관은 성장하여 훌쩍 증폭되고 확장되었을지라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홀로임을 씁쓸하게 상기할 수밖에 없다. 더 심각하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조차 걸 수 없음에 절망하다가 대체 내가 그이와 교감한 적이 있기나 하며 그이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에 봉착하곤 한다.
사랑은 이러한 점에서 일방적인 역설일 수밖에 없다. 이러면서도 사랑은 자신의 일방성을 기꺼이 받아줄 상대를 찾아 헤맨다. 놀랍게도 이 요구에 셀 수 없는 대답들이 돌아와 애타는 부름을 받아주고 수많은 연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심지어 한 번 사랑을 해보고 파국을 맞은 이들은 또다시 이룰 수 없는 투명함을 찾아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까지 나아간다. 이 역설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 여러 위기와 불안정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용인될 수 있고 필요한 것으로 인정받아 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가 바라는 답은 “나도 너를 사랑해”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이를 사랑하여 가까이 하는 자체가 그이에게 어떤 작용을 하고 반응을 끌어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기꺼이 사랑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내가 너를 사랑하므로 너도 나를 사랑하라는 일방성을 함의한다. 놀랍게도 이 일방적인 사랑은 독립적인 매체로서 도처에서 성공을 거둬 왔다.
사랑의 기능은 사랑하는 사랑을 사랑받게 하는 것이다. 사랑의 근본적 폭력성을 앞서 살펴본 마당에 이 심원한 폭력성이 오히려 사랑을 성공하게 한다는 사실은 적잖이 충격적이다. 일방적 사랑에 오히려 사랑을 부른다는 기능이 있다. 짝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하기를 원하는 만큼 사랑받기도 원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사랑해달라는 요구는 상대가 부담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백 공격이 ‘공격’으로 느껴지는 이유 또한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 사람에게 운만 잘 따라준다면, 사랑의 일방성은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상호화되어 극복된다.
반대로 결별은 사랑이 도리어 인격적 연결을 궁극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랑은 친밀성의 다른 맥락들을 압도하는 바로 이 강점 때문에 역설적으로 매우 자기파괴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랑은 짝사랑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랑이 멈추는 지점에서 친밀성은 대답받지 못 하는 짝사랑으로 전락하고 만다. 일단 사랑이 깨지고 나면 상대는 그 전까지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애원하던 기억의 매개체가 된다. 이 기억을 배경에 둔 관계를 다시 세우기는 서로에게 몹시 어렵다. 더욱 심각하게도 사랑이 끝나는 지점은 연인 두 사람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괴상한 고백 공격으로 과대표가 대화방에서 탈출한 유명한 이야기는 정말 다행히도 지어낸 이야기라고 밝혀졌지만, 이 이야기의 끝에 썰렁하게 폭파된 대화방에서 “이제 누가 공지해주냐” 라는 메시지가 많은 사람들의 폭소와 공감을 낳았다는 사실은 한 사람의 사랑의 시도가 비단 상대 뿐만 아니라 백여 명이 넘는 이들에게 충분히 관계의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문제는 사랑의 자기파괴적 특성이 예견된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많은 연애는 어떤 이유이든 결별로 끝나기 마련이고, 서로에게 있어 상대와 자신의 거의 사회적 죽음에 가까운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사랑을 통해 한 사람의 연결망은 결국 이어지기는 커녕 끊어지고,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교류할 수 있는 관계는 가족 외 몇 명으로 집중된다. 사랑의 이러한 자기파괴적 특성은 다른 기능 체계들에 비교해 보았을 때 사뭇 황당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사랑을 위해 사랑한다 한들, 일단 사랑의 의미론이 개입이 되면, 이후의 인격적 관계가 모두 거기에 귀속이 되고 그 실패에 따라 모든 관계의 포기가 수반될 수 있는 위험이, 지금까지 옹호되고 유지될 수 있으며 심지어 명백한 기능까지 맡고 있다는 사실은, 전체 사회가 자살을 용인하는 체계를 친밀성 내에 몰래 숨겨두기라도 한 것처럼 생경하게 느껴진다.
사랑은 이처럼 양 측면에서 폭력적이다. 상대의 경계를 넘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확신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며, 결별을 통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든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사랑이 이토록 폭력적이고 파괴적임에도, 사람들은 어쨌든 사랑을 하고, 근대 사회는 사랑에 대한 수많은 담론들을 생산해낸다.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감정이 이토록 격렬하기 때문에, 결별이나 좌절에 있어 일단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조언 또한 많은 지지를 받는다. 물론 이러한 해법은 재귀적(Recursive) 관계와 반사적(Symmetric) 관계가 다르다는 점을 무시한 것에 불과하다. 자아는 결코 타아가 될 수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화가 이뤄져도 스스로 소통하며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도 없다.
이러나 저러나 사랑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랑의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결코 병리 현상이라 할 수 없다. 아무리 지향 없는 가능성을 계기로 관계를 자의적으로 구성한다 해도, 사랑은 분명한 기능을 가지고 독자적인 매체와 의미론을 가지며 심지어 상호적인 관계를 구성해내기까지 한다. 서로 헛된 꿈만 꾸고 있다 할지라도 욕망의 촛불을 끄는 것은 참선의 영역일 뿐 사회적 문제의 영역은 아니다.
섹슈얼리티라는 의미론에 사랑의 파괴성을 제어하고 사랑을 스스로 지탱하는 역할을 맡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행 섹슈얼리티 체계가 포함한 수많은 혐오와 폭력들은 어떻게 보아도 이 역할에 맞지 않아 보인다. 많은 소수자들의 사랑은 현행 섹슈얼리티 체계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서 비극으로 치닫는다.
오히려 사랑 고유의 폭력성과 섹슈얼리티의 폭력성을 비교하여 과연 어디까지가 사랑 고유의 폭력성이고 현행 섹슈얼리티 체계에서 이 폭력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바라볼 때 사랑의 폭력성을 고민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여타 기능 체계가 자기준거적 제어를 통해 구성되는 구조를 갖듯이, 사랑 또한 섹슈얼리티 위에 세워진다. 섹슈얼리티란 “사회적·생물학적·물리적·감정적 측면을 포함한 인간의 성적 특성 및 성적 행동”[17]으로서, 사람의 섹슈얼리티란 “사람들이 스스로를 성적으로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식”[18]이다. 섹슈얼리티는 사랑을 담론화하여 이를 규제하고 촉진한다(푸코, 2018). 사랑에 구체적 의미가 부과되는 것은 이처럼 사랑이 문화적 관행을 통과할 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섹슈얼리티는 문화이므로 사랑의 당사자들보다 먼저 만들어져 이들에 선행한다는 점이다. 섹슈얼리티는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의 관점 뿐만 아니라, 객관적 제3자의 관점을 반영하여, 거꾸로 이를 사랑의 당사자들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사랑을 허용된 침범으로 규정한다면, 섹슈얼리티 체계는 거꾸로 이 허용의 범위와 절차를 정한다. 오늘날의 연애 담론에서 침범은 양가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열렬하고 헌신적인 사랑은 아직도 현대 로맨스의 상징이다. 사랑은 황홀경과 고뇌를 동시에 가져다주는 압도적인 힘으로 여겨진다. 낭만적인 열정은 일시적인 것으로, 동반자적인 사랑으로 발전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초기 단계에서는 사랑이 사람의 전 존재를 장악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에 대한 환상에 압도된다. 이 욕망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달콤하고 절묘한 고통 앞에 모든 것이 사라진다. 반면 오늘날 사랑의 거부는 관계의 급격한 냉각을 낳는다. 일단 차이고 나면 그 뒤로는 말을 거는 것 조차 부담스럽고 어색한 일이 된다. 전 애인을 그리워하는 일은 ‘찌질한’ 일로 취급된다. 반대로 ‘깔끔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선을 지켜야 ‘쿨’하다고 인정받고 권장된다. 이처럼 현 섹슈얼리티 아래의 연애 담론은 연애 중에는 헌신적이되 연애 후에는 관계를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을 정상성으로 두는 듯 하다.
섹슈얼리티 정상성 바깥의 침범은 특정한 형태에서 폭력과 등치됨으로써 스스로 관리·조절하고 이로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으로 형상화된다. 여기서 폭력이란 자기 결정권의 침해이지만, 그 폭력이 언제나 당사자 뿐만 아니라 문화에 의하여 수용되고 인정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이 근대 사회에 착근해 이들 요소들과 뗄 수 없듯이, 그리고 자기결정권이 ‘권리’로서 일정 질서 아래 규정되고 옹호되듯이 말이다.
문제는 이 폭력성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섹슈얼리티를 경유하는 사랑의 작동은 해당 소통이 배치된 사회적 의미망과 그 인격적 담지자들의 연결망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요컨대 구체적 사랑의 소통 하나하나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포함하며 이뤄지는지에 따라 작동이 달라진다. 섹슈얼리티의 구조가 있다 해도, 그 구조는 지금까지 쌓아올린 연애 관계의 과정을 통해 변이가 가능하다. 사랑의 행위가 폭력인지의 여부는 구체적 상황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구체적 상황은 ‘정상적 섹슈얼리티’의 영향 하에 있다. 섹슈얼리티 정상성이 성별 역할을 규정하고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의 정상성을 규정하여 그 바깥의 존재들을 지우려 하는 일련의 폭력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밝혀진 바 있다.
중요한 점은 이 정상성에의 회복이 순전히 사랑의 당사자들의 책임으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구조를 논하기 이전에, 사랑하는 관계에서 사랑하는 이가 인정받는지의 문제는 사랑의 문법 속에서 투쟁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과 호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표현해 자기 매력을 드러내려 하는 사람은 충분히 억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섹슈얼리티 정상성을 운위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드러내려 할 때 사랑의 소통은 그대로 무너지고 마음을 접는 게 나을 지경이 되어버린다.
사랑이 호의를 얻는 문제라는 점과 사랑에 있어 자유 의지에 기반해 폭력에 관한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두 가지 판단은, 각자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두 판단이 하나로 합쳐질 때에는 예상하지 못 한 결론들로 치닫는다. 사랑의 정상성을 벗어난 이들은 ‘관리·조정을 하지 못 했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이 실패는 호의를 얻지 못 한 것에 대한 실패이다. 수용되지 못 했기에 정상성을 벗어나 폭력을 휘두른 것이 된다. 이 수용 불가가 개인적 관리의 문제라는 주장을 거꾸로 뒤집으면, 관리를 통해 조정할 수 있는 일종의 능력, 사랑의 문제에서는 매력이 없다는 것이 자그마치 도덕적 문제가 된다는 기괴한 결론을 내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매우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결론은 실패한 고백 이후 당사자에게 다시 못 볼 사람 취급을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수많은 경우들을 볼 때 그리 생경한 일이 아니다. 연애감정의 전개는 그 자체로 사랑을 함의하기 마련이며, 당혹감을 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더구나 구조화된 연애의 정석은 앞서 말했듯 실제의 연인 관계의 계보로 돌아가면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이다. 황당한 이야기로 시작해 갑자기 사귀기로 했다며 끝을 맺는 이야기는 더이상 놀랍지도 않다. 이러니 짝사랑 끝에 차인 불쌍한 이들이 울분을 토하며 호감을 받을 수 없으면 사랑을 표현할 권리조차 없느냐고 호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한편 원치 않는 고백을 받은 역시 불쌍한 이들의 상처는 차라리 맥락 없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온 데에 대한 황당함에 가깝다. 그런데 이 맥락 없는 경계 넘기는 오히려 그 자체로 사랑이라는 매체의 본질에 가까우며, 이 사랑이란 매체는 근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마주칠 수밖에 없다. 이 고백 자체를 폭력이라 말하기 위해서는 자그마치 근대 사회 전체를 비판해야 하는 지경에 봉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고백 공격인지, 즉 무엇이 폭력인지를 논하기 위해 근대성 비판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대신 윤리와 능력의 부재를 혼용한 파편화된 이론들만이 이리저리 갖다 붙여질 뿐이다.
사랑과 같이 자유 의지가 미묘한 위치의 있는 사안에서 자기 결정권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정상성의 폭력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정상성 바깥을 폭력으로 규정하여 그 목소리 마저 틀어 막는 적반하장이다. 행위자의 결정이 이미 구조화된 환경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은폐하고 모두 행위자의 책임이라고 돌리기 때문이다.
사랑의 폭력성을 섹슈얼리티 체계에서 일소하려는 많은 시도들은 특정한 사랑을 폭력으로 규정하여 사랑의 일부분을 부정함으로써 다른 형태의 사랑을 내세운다. 이러한 시도들은 사랑이 착근한 섹슈얼리티를 문화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도 사랑과 자유 의지 사이의 근본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은 매한가지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현재적 정상성에 반대하여 다른 섹슈얼리티의 주체를 정상성의 자리에 대체해놓을 뿐이다. 정상성의 구도는 바꾸지 않으면서 어떤 사랑을 부정하는 방식은 도리어 앞선 은폐된 폭력을 낳는 기제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싸한’ 사람에게 느끼는 ‘여자들 다 아는 그거’는 지극히 ‘정상적인’ 여성 동성집단의 실천 감각으로서 그와 불일치하는 개별 여성의 감각을 배제하고 차단한다. 사랑과 폭력 사이의 문제에서 방어해야 하는 것은 당사자의 소통과 행위 문제이지 자기 결정권이 왜곡되었다거나 여타 섹슈얼리티적 정체성 문제에서처럼 무슨 필연적인 착취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 따위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성/연애 정체성/지향을 가진 사람이 사랑과 폭력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비판할 때 늘 가부장제를 경유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폭력성은 당사자의 성/연애 정체성/지향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성/연애 정체성/지향은 다른 경우보다 폭력을 덜 한다라고 말하며 은근히 그의 폭력과 무엇보다 당사자의 피해를 가리는 결과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를 비난하기 위해 그를 ‘가부장적’이라고 비난하게 된다면, 이는 당사자를 폭력적이라 비난하면서 교묘히 그의 성/연애 정체성/지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의 규칙을 제시하려는 시도들은 이러한 점에서 아무리 자기 결정의 환상을 간판으로 달고 있다 해도 인셀 담론과 닮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인셀이란 “Involuntary Celibate” 곧 비자발적 독신의 약자로, 주로 연애 경쟁에서 탈락하여 연애 경험이 없는 남성들을 의미한다. 최근 몇 년간 이 단어는 자신들의 연애 실패를 여성 혐오로 연결시키는 일군의 흐름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들의 담론인 ‘레드필’은 성별에 대한 유사과학적 편견에 기초하여 사랑에 있어 ‘여자는/남자는 이렇다’를 규정하려는 것으로서, 인셀들의 초유의 관심사인 사랑을 당사자가 아니라 생물학적 차원으로 환원하려 한다.[19] 역설적으로 섹스 한 번 못 해본 인셀들의 레드필은 원나잇을 위한 픽업 아티스트들의 각종 유사과학적 연애 스킬을 재조합해 만들어졌다. 인셀들의 담론이 ‘섹스를 많이 경험해본’ 동성 집단 내 음습한 음담패설과 극도로 닮아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픽업 아티스트들은 성을 무기화하고 상대를 조종해 성적으로 물화하기 위해 당사자 없는 연애의 기술을 만들었고, 당사자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인셀들은 이 이론을 그대로 흡수해 자신들의 자학적이며 가학적인 담론으로 진화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가학적이고 강압적이라 도무지 상종 조차 하기 싫은 사람들이 어떤 이에게는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 또한 믿기 싫지만 사실이다. 놀랍게도 이 이론은 섹슈얼리티 체계 내에서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어버렸다. 단지 원나잇용 사교 기술로 끝나면 다행일텐데,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이 ‘내가 매력이 없어서 그렇다’ 라고 한탄하고, 왜 고백을 받아주지 않느냐는 절규에 ‘네가 매력이 없는데 급이 맞다고 생각하느냐’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연애에 있어서의 매력의 존재는 당사자를 넘어 보편적인 ‘능력’처럼 사용될 수 있는 듯 하다. 일루즈는 사랑이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 피안(彼岸)에 낭만적 유토피아를 건설했다고 말하면서도 차안(此岸)의 문화적 상징들을 그대로 가져다 쓴다며 이러한 수사 또한 함께 쓰인다고 분석한다.[20]
매력에 기반한 ‘정상적’ 연애 담론은 연애 실패자들의 담론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인셀 담론과 정상적 연애 담론은 같은 전제를 가지고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다른 척 하는 쌍둥이일 뿐이다. 사랑의 자본주의적 수사들은 성별 이분법 체계에 이념형처럼 들어맞는 ‘정상적’ 입장에서 행해진다. 마치 아무리 당사자가 행위하려 해도 이 구조를 벗어날 수 없으니 자신의 도덕적 부당함을 받아들여야 하기라도 한다는듯이 말이다. 심지어 이런 ‘눈치 없는’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한남’이라는 표현이 오용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 하다. 그렇기에 매력에 기반한 연애 담론은 인셀 담론을 욕할 자격이 없다. 이 담론은 도리어 관계에서 소외되어 인셀로 돌아선 이들을 구원도 하지 못 할 뿐더러 그들이 인셀로 돌아서도록 촉진할 뿐이다. 전제가 같은 두 이론 중 당사자의 욕망이 폭력적이니 포기하라는 담론과 그렇지 않은 담론 중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지는 뻔하다.
사랑의 궁지에 몰린 이들은 끓는 속을 안고 상황을 조금이나마 호전시키기 위해 각종 전략에 몰두한다. 이 모든 전략들이 절망적일 정도로 어떠한 답도 내리지 못 한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 하면서 말이다. 사랑은 당사자 고유의 문제이므로 순전히 나와 상대의 마음을 살펴야 하지만, 상대에게 다가갈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상대의 마음은 어디까지나 제3자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밖에 없다. 오롯이 독자적인 상대에게 몰두하는 것이 관계를 조금이나마 회복시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먼 훗날을 도모하는 최선의 방식일테지만, 이 과정을 이겨내기에 지금까지 겪어야 했던 수많은 몰이해와 무책임한 넘겨짚기 그리고 불안은 사랑하는 사람을 악순환에 빠지게 할 뿐이다.
이 악순환의 최고봉에는 이른바 ‘재회 상담’이 있다. 구글에 ‘재회 상담’이나 ‘재회 컨설팅’ 등으로만 검색해도 수많은 ‘연애 전문가’가 튀어나와 ‘사례 분석, 각종 상담, 실전’을 진행한다.[21] 이들의 연애 상담이란 당연히 어떠한 전문성도 효험도 없으며 상황만 악화시키는 정신적 학대에 지나지 않는다.[22] 이들은 이제 부적이나 타로 등 미신적인 요소까지 끌어들이며 아픈 마음을 자극해 가증스럽게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한다.[23] 그러나 사랑을 쉽게 비웃으며 재단하려 하는 제3자의 목소리들은 이 사기의 기폭제가 될 뿐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 사랑은 가망이 없다고 비웃는 목소리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사랑을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와 논리상 다를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무런 답도 내려주지 못 한다.
사랑이 현실의 저편(彼岸)에서 현실의 언어를 쓰며 답을 내리지 못 하는 사이, 현실(此岸)은 사랑을 대신할 수많은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다. 유사 사회적 관계의 사랑으로 연애를 모방하는 아이돌 문화는 이러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바, 작가 도우리는 이렇게 정리한다:
<코스모폴리탄>의 이예지 에디터는 칼럼 ‘뉴진스가 시대의 새 얼굴이 된 이유’에서 뉴진스를 ‘영 리치 브이로거의 현신’이라고 명명했다. “풍요로운 집안에서 듬뿍 사랑받고 자라나 구김 없는 딸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무해’한, 시대가 가장 열망하는 얼굴이 된 것”이라며 “‘강남 8학군 출신’이나 ‘가정교육 잘 받은’ ‘아빠가 교수’인 게 아이돌을 자랑하는 수사가 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니까 뉴진스는 더 큰 ‘시대관’을 담은 것이다.[24]
이제 연애는 아이돌 문화를 모방한다. 매력의 새로운 지표는 ‘능력’, ‘금수저’, ‘사랑받고 자란 티’를 거친 ‘자기애’로 치닫고 있다(도우리, 2023). 누군가는 상대의 재력을 또 상대의 가정 환경과 그에 따른 성격적 특성을 매력의 지표로 삼는다. 이 매력은 기념일을 잘 지키는가, 선물을 어떤 것을 하는가 등으로 연애 안에서 구체화된다. 사랑의 문제는 이제 자격의 문제가 되었다.
낭만적 사랑은 오늘날 위기에 처했다. 사랑이 절차가 되고 연인이 자격이 되면 사랑의 역설은 도무지 풀릴 수가 없다. 오늘날의 연애에서 아이돌이 연인을 모사하는 것을 넘어 이제 연인이 아이돌을 모방한다. 연인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한다. 몇 번이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가 이제 연애를 그만둔다. 사랑은 이제 지쳤다면서 말이다.
오늘날 낭만적 사랑은 점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연애에서 결혼으로 넘어가는 사랑의 과정 마저도 믿을 수 없다. 실제로 연애에서 결혼으로 넘어가는 가족제도는 근대적 가부장제 핵가족 재생산 구조가 무너지며 존립의 위기를 맞고 있다. 경제적 사유는 부부의 사랑을 식히고, 가치관의 충돌은 이혼에까지 넘어간다. 결혼 생활은 선택의 과잉에 무너지고 “결혼의 지복이었던 것들을 포기하고 그것을 새로운 꿈과 바꾸”(벡·벡-게른샤임, 1997)려 한다.
그러나 위기를 맞은 것이 사랑의 수행 양식인지 사랑 자체인지 묻는다면, 아무리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해도, 사랑이 죽지는 않았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벡·벡-게른샤임(1997) 은 루만과 같이 사랑을 근대적 현상으로 규정하며, 근대화를 개인화 즉 규율과 통제 대신 선택지와 책임이 증가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선택지의 증가는 규범의 부재로서 개인에게 존재론적 혼란과 불안을 일으키므로, 이러한 개인적 위기들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고독의 두려움을 무너뜨리는 사랑이 등장했다는 것이다.[25] 역설적으로 선택의 과잉은 사랑이 근대 사회의 매체로 대두된 배경이기도 했다. 사랑은 “가까운 세계와 먼 세계의 차이를, 곧 ‘개 인적으로만 유효한 경험, 평가, 반응 방식’과 ‘익명적으로 구성되고 모두에게 유효한 세계’의 차이”(루만, 2009: 33)를 전제로 한다. 개인과 사회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 가족이나 기능 체계 속 역할에서 찾을 수 없는 자기정체성을 확인해야 하는 근대인에게, 반려자는 사랑하는 “타인의 자아 중심적 세계 설계를 확증”(루만, 2009: 39)해준다.
사랑에 희망이 있다면 이 포섭되지 않는 개별성, 끊임 없는 시도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사랑은 결코 충족과 같은 것으로 치환될 수 없다(벡·벡-게른샤임, 1997).” 사랑은 오히려 결코 고정될 수 없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랑은 사회적 관계의 제어 수단으로서 기존 종교 등의 규범이나 여타 기능·조직 체계와 달리 사랑하는 사람 간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친밀 관계 (Intimbeziehung)는 “삶의 모든 상황에서 파트너를 계속 함께 고려”하는 “준거의 보편성”을 갖지만, 이것이 사랑의 논리로 모든 것을 포섭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은 자본주의의 소도(蘇都)일 뿐 사랑을 통해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근대인으로 하여금 바뀌지 않는 세계를 견딜 수 있게 한다.
사랑의 반짝이는 순간들은 무엇에도 포섭될 수 없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그 순간은 순간일 뿐 포섭될 수 없다. 문화로서의 섹슈얼리티는 정상성을 상정하여 정상성에 부합하는 이념형적 인격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랑받는 사람은 개별 인격, 섹슈얼리티에 포섭되지 않은 인격이다. 사랑을 규율함에 있어 섹슈얼리티는 인격을 제공하지만, 정작 사랑은 이 인격 밖으로 이어진다. 사랑이라는 소통은 주어진 인격을 통해 닿을 수 없는 이에게 닿으려는 시도이다.
촉망받는 독립 음악가 정우는 「척애」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별처럼 쏟아진 나의 님, 병처럼 쏟아진 나의 맘
조금만 힘주어도 성마른 눈빛이 부서져
이른 밤 널 버려도 모를 테지
당신은 기억도 못 하는 언제의 일들만 안고서
나 영원한 잠에 들어[26]
척애(隻愛)는 짝사랑의 한자어로, 직역하면 외짝사랑이나 외쪽사랑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짝사랑에 빠진 이에게, “나의 님”은 “별처럼 쏟아진” 것이고 “나의 맘”은 “병처럼 쏟아진” 것이다. 짝사랑은 “이른 밤 널 버려도 모르”는 상대에게 “당신은 기억도 못 하는 언제의 일들만 안고서” 드는 “영원한 잠”이다. 이런 점에서 정우의 가사는 사랑의 본질적인 타자에의 지향을 보여준다. 한 쌍(雙)의 연인이 탄생하려면 먼저 한 짝(隻)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타자 되기이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에게 체험을 행위로 받아 뜬금없는 감정을 품는다는 점에서 타자가 되지만, 더욱 중요하게도 사랑받는 자 또한 사랑을 받는다는 그 자체로 타자화된다. 사랑이란 주관적 자아가 객관적 자아로 나아갈 때 객관적 자아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당사자들은 섹슈얼리티가 제공한 인격이 아니라 그 바깥의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객관적 자아 혹은 타아(他我, Alter Ego)는 타자와 자아 사이의 경계이다. 그러나 사랑은 이 객관적 자아 너머를 향한다. 경계를 넘으면 폭력일 수밖에 없다. 난생 처음 보는, 나조차 몰랐던 이름을 나를 경유해 부르며, 대뜸 사랑해달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섹슈얼리티에 의한 폭력의 제어와 개별성 간의 관계는 뒤집힌다. 섹슈얼리티 또한 개별의 사랑을 포섭할 수 없다. 섹슈얼리티는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사랑을 나눠 그 일부를 폭력으로 불릴 수 있도록 한다. 곧 폭력이 폭력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정당화 기제를 거쳐 사회적인 추인으로 명시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력을 논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상대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폭력으로 규정되어왔던 이것은 진짜 폭력일까?
개인은 상상 속의 관중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윤리를 체득한다. 폭력이란 이 상상 속 관중이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에 있어 중요한 것은 상상 속 관중이 아니라 사랑하는 타자의 시선인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저 멀리로부터 와서 나를 수동적으로 지배하는 타자 말이다. 이 타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갈구한다. 즉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을 완전한 타자로 보고, 동시에 사랑받는 사람에게 타자가 되어 ― 사회적 규범과 일단은 관계 없이 ― 사랑받을 요건을 갖추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에게 사랑스럽게 보이고 싶어 한다. 이 말은 사랑의 시선이 사랑받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시선의 방향은 역구조동사 gustar가 만드는 Me gustas tu의 여격어 Me(나에게)와 주어 tu(네가)의 방향과 일치한다.
사랑이란 그렇다면 타자 되기의 상호화에 다름 아니다. 사랑에 있어 섹슈얼리티는 참고항일 뿐 두 사람의 상호성이 더 중요하다. 나는 내 의지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타자화되어 사랑받을 준비를 하게 되며 동시에 그이를 완전한 타자로서 바라본다. 앞서 사랑은 근본적으로 짝사랑이라고 논한 바, 사랑은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것이다. 타자되기가 폭력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폭력적이든 어쩌든, 그이로 인해 그이를 사랑하게 된 사람은 스스로도 그이에게 그이처럼 자신을 사랑하게 하기를 바란다.
여기서, 사랑은 근본적으로 타자 되기라는 점이 나타난다.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윤리적 기준이 됨으로써 타자가 된다. 그렇다면 사랑이 폭력인지 아닌지 묻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타자/자아-도식 너머에 사랑이 존재한다면, 아무리 사랑이 계급화되어도, 아무리 사랑이 위기를 맞아도, 아무리 사랑이 착근된 문화를 비판해도, 사랑은 늘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타자 되기로서의 사랑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애당초 사랑에 있어 대상-주체 도식이 성립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을 통해 양자는 경계를 함부로 넘고 비개연적인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타자 되기로서의 사랑을 통해, 욕망하는 자아와 욕망당하는 타자는 그 경계가 무너진다. 욕망당하는 타자는 욕망하는 자아의 시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타자 되기에 나선다. 반대로 욕망하는 자아는 욕망당하는 타자의 사랑에 휩쓸려 어디서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투르게네프의 『짝사랑』과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사랑해’의 번역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자신과 욕망당하는 타자로서의 자신의 접점을 간명하게 표현한다. 『짝사랑』 원본에서 여주인공 아샤가 고백하는 ‘사랑해’에 해당되는 단어는 ‘Ваша’이다. 영어로는 yours에 해당하는 이 단어를 의역하면 ‘난 네 거야’ 가 될 것이다. 러시아어로 이는 ‘사랑해’의 관용어구에 해당한다. 연애 담론이 동아시아에 처음 수입되기 시작하던 1916년, 후타바테이 시메이는 이를 “死しんでも可いいわ” 곧 “죽어도 좋아”로 번역한다. 두 단어 모두, ‘나는 너를 사랑해’의 욕망의 대상-주체 구분이 철폐되어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하므로 나는 네 것이다. 당신의 허가나 맥락이 있든 없든 말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므로 나는 죽어도 좋다. 당신은 내 죽음이 자신때문이라니 의아하겠지만 말이다.
『짝사랑』의 여주인공 아샤의 이름이 그 자체로 ‘짝사랑’이라는 뜻임을 생각한다면, ‘사랑해’에 대한 이 두 개의 번역은 더더욱 의미심장해진다. 타자와 자아 사이 경계가 무너진다고 그 둘이 같은 인격이 되거나 서로를 투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사랑은 짝사랑이고, 사랑은 아무리 해도 다가갈 수 없는 반려자가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영원히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끊임 없이 멀어지는 상대에게 더욱더 끊임없이 다가가는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이자 사랑의 이야기 그 자체가 된다.
사랑에 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사랑은 타자/자아-도식 너머에 존재하는 소통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자에 대한 체험을 자아의 행위로 처리하는 소통 매체이다. 따라서 사랑은 언제나 개인적 맥락 너머에서 일방적으로 ‘선을 넘는’ 소통일 수밖에 없다. 그 기반의 열정(Passion)이라는 감정에 부응하여 언제나 수동적(Passiv)인 감정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사랑은 의도하지 않은 바대로 타자를 해석하고 타자의 지평에 들어서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 곧 타자의 경계를 넘을 수 있도록 용인하는 매체이다. 역사적으로도 사랑은 체계가 받아들여 주지 않는 감정을 처리하기 위한 기제로 시작하였다. 지금도 사랑이 품은 뜨거운 마음은, 이 사랑을 말은 하고 싶은데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 끊임 없이 보고 싶다는 것, 결코 이 욕망이 충족되어 완료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있다. 결국 사랑은 언제나 일방적 짝사랑일 뿐일지 모른다.
사랑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처음에 던졌던 이 질문은 근본적으로 다시 던져져야 한다. 수동적 정동인 사랑이 권력의 작용인 폭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언제나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에만 성립한다. 사랑이라는 경계 넘기는 허용된 침범인 바, 거꾸로 이 허용의 범위와 절차를 정함으로써 섹슈얼리티 체계가 완성된다. 이 체계 내에서 특정한 방식과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섹슈얼리티의 정상성을 낳는다. 사랑은 특정한 형태에서 폭력과 등치됨으로써 스스로 관리 및 조절하고 이로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으로 형상화된다. 섹슈얼리티 체계에서 폭력을 일소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사랑을 일부분 부정함을 표방하며 다른 형태의 사랑을 내세움으로서만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시도 속에서 어떤 사랑을 부정하는 방식은 도리어 은폐된 폭력을 낳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오히려 사랑은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몰입하는 것이라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열정의 한가운데 있을 뿐 열정을 지배하지 못한다. 감정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인은 그 앞에서 수동적이며 그 끌림에서 벗어날 힘이 없다. 사랑에서 주체성은 이러한 감정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다. 파도 속에 서 있는 것처럼 연인은 사랑의 감정의 파도를 타거나 그 파도에 휩쓸릴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사랑이라는 바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연인은 사랑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뜨겁게 유영할 뿐이다. 연인이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연인을 선택한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설레기도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짝사랑이기에 취약하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도리어 그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이 사랑에 대한 이해를 구체적 어긋남의 지점을 찾아 대안을 모색하는 데에 적용해야 한다면, 그 단서는 이성애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행 지배적인 이성애 섹슈얼리티 체계에는 이미 상호 타자화된 두 동성 집단이 있다. 이성애적 연애에서 욕망의 주체와 객체는 이성애 중심주의를 경유함으로써 분리된다. 각 집단은 상호 연애 불가능한 동성 집단을 만들고 이들의 문화 — 혹은 ‘뒷담화’ — 를 중심으로 타자인 상대 성별을 해석하려 한다. 비단 이성애자들에게서만 이러한 모습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문화는 모방을 전제로 하기에, 동성애적 연애에서도 이와 같은 성 역할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레즈비언의 부치와 펨 혹은 게이의 탑과 바텀이 실재하고 당사자들이 이 문화를 즐겁게 이용한다 해도, 동성 간 연애를 이들로 밀어넣는 것은 동성애에 대한 무례한 물화이자 편견에 불과하다.
연애적/성적 끌림/지향을 둘로 거칠게 나눠 비교하는 이점은 바로 욕망의 타자와 주체가 무너지는 지점을 확인하는 데에 있다. 현재로서 주류 섹슈얼리티와 어긋나 이성애적 역할에 포섭되지 않은 동성애적 연애의 지점들은 적어도 이성애적 연애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욕망의 타자/주체-구별로부터 자유로운 면이 있어 보인다. 여기서 욕망되는 대상으로서의 미덕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미덕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점들은 이성애 관계에서도, 나아가 어떠한 사랑에서도 있을 수밖에 없다. 마치 ‘내 거야’(‘Ваша’)와 ‘죽어도 좋아’(‘死しんでも可いいわ’)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부터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자신은 욕망당하는 타자로서의 자신과 동일하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실마리가, 내집단 문화 적응에의 압박을 넘어, 사랑을 개별자 하나하나를 탐구하는, 마치 타자에의 접근을 통한 진리에의 탐구 (바디우, 2010)[27] 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으리라고, 희망을 가져봐도 좋을 것 같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상대 너머의 상대까지 사랑한다. 짝사랑은 이 경계 넘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타자 되기를 관용함으로써 비로소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사랑 하나하나에는 그러므로 타자 되기라는 체계 외부로부터의 가능성의 씨앗이 있고, 현행 섹슈얼리티 바깥의 가능성들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모두 퀴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사랑의 순간들은 여전히 매우 전복적인 가능성을 품는다. 폭력과 윤리화, 몰이해와 소비주의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언제나 그 너머에서 이 모든 것을 이긴다.
편집위원 망명자 | kreten.ekzilit@gmail.com
[1] 헌법재판소 1990. 9. 10. 선고 89헌마82 전원재판부 결정
[2] 헌법재판소 2002. 10. 31. 선고 99헌바40, 2002헌바50(병합) 전원재판부 결정
[3] 표준국어대사전 ‘폭력’ 항목
[4] 표준국어대사전 ‘강요’ 항목
[5] 김경호 (2015).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경험하고 의미화 하는가? 111-135.
[6] 김지영 (2016). 오늘날의 정동 이론. 360-373.
[7] 랄로 ‘어깨 넘어 배운 트페’
[8] 앤서니 기든스 (2003).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친밀성의 구조변동. 제여매 (2014). 성과 ‘성 담론들’ 367-393. 에서 재인용.
[9] 쥘리아 크리스테바 (2010). 사랑의 역사. 김경호 (2015).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경험하고 의미화 하는가? 111-135. 에서 재인용.
[10] 미셸 푸코 (2018). 성의 역사.
[11] 김미경 (2017). 친밀성의 구조변동과 가족구조의 변화: 바우만의 문제의식과 루만의 인식론을 통한 접근. 75-101.
[12] 정성훈 (2014). 매체와 코드로서의 사랑, 그리고 사랑 이후의 도시. 119-143.
[13] 루만은 기능 분화의 등장 배경으로 세계의 중심 새 로마가 낙성(落城)하고 세계의 원리인 성경이 대중에게 읽히기 시작하던 근대 초기를 지목한다. 인쇄술의 발달로 서면 매체를 통한 소통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소통이 거부되고 무시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대면 소통으로 앞사람을 무시하는 것보다 종이에 쓰인 글을 읽지 않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아니오-코드의 양면(즉, ‘예’와 ‘아니오’)이 대칭화 되었을 때 이 대칭성을 다시 비대칭화하기 위해, 즉 ‘예’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정성훈, 2014) 성공 매체들의 독립 분화가 일어난다. 이에 따르면 사랑 또한 상징적으로 일반화되어 독립분화된 소통 매체의 일종이다.
[14] 그런 의미에서 모찌는 후기 자본주의적 현대 사회의 스펙타클적 생산물(드보르, 2014; 드보르, 2017)로서 연인 간의 사랑을 연인의 총체적 관계로부터 분리하고 이로서 연인의 관계를 착취한다. 두 사람의 모습을 환유하는 모찌 둘이 춤을 추는 이모티콘은 연인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될 때 자신들의 연애를 자신들에게 구경거리로 만들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모찌라는 캐릭터는 매우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헤어진 연인에게 대화 영구 보존을 빌미로 돈을 뜯어내는 비트윈 앱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스펙타클에 관한 논의로는 다음을 참조: 기 드보르 (2014). 스펙타클의 사회. 유재홍 (번역). 문예출판사. 기 드보르 (2017). 스펙타클의 사회에 대한 논평. 유재홍 (번역). 문예출판사.
[15]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분석한 루만의 전제는 사회 체계 이론으로, 이 관점에서 사회 체계는 소통으로 구성된 체계이다. 소통은 타자와 자아 사이의 의미의 차이를 통해 성립하며, 의미는 ‘지시의 초과분’으로 나타난다. 무한한 세계에 맞선 유한한 체계는 의식이 그러하듯 제 나름의 구분을 통해 지시의 초과분을 처리해 세계 그 자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자신의 요소로 만든다. 인간의 의식이 환경과 구분되어, 나름의 구분과 분류를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유의 복잡성을 형성하며 역설적으로 세계와 합일할 수 없게 되듯이, 타자와 자아 또한 서로 다른 복잡성을 가져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비단 사랑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체계로서의 소통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러하다. 사회 체계 자체가 정보 중 통보를 골라 소통을 시도하는 타자와 소음 중 하나를 골라내어 통보로 이해하는 자아를 연결하여, 이중의 우연성을 자신의 복잡성 삼아 이를 소통으로 구성해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소통할 수 없으며, 오로지 소통만이 소통할 뿐이다. 사회 체계는 이처럼 자기준거적으로 행위를 행위로 행위자를 행위자로 구성해어 스스로에게 귀속하며, 이들의 현재화된 행위 너머의 가능성들을 체험으로 받아 잠재화한다. 이에 관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 니클라스 루만 (2020). 사회적 체계들. 박여성, 이철 (번역). 한길사.
[16] 타자의 행위를 자아의 행위로 받는 정치와 법률은 상대의 권력 행위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권력 행위에 나선다. 타자의 행위를 자아의 체험으로 받는 경제 체계에서 다른 이의 거래는 경제적 주체에게 당장은 효용 계산을 수정하는 데에 그치게 한다. 타자의 체험을 자아의 체험으로 받는 학문 체계에서 학자는 객관적이고 차가운 제3자의 입장에서 연구를 하고 학술공동체 또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를 받아들인다. 반면 타자의 행위를 자아의 행위로 받아들이는 사랑에 있어서, 타자를 체험한 자아는 뜬금없이 이를 사랑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가슴이 두근대며 행위에 나선다. 이에 관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 니클라스 루만 (2014). 사회의 사회. 장춘익 (번역). 새물결.
[17] 앤서니 기든스 (2015). 사회학의 핵심 개념들. 김봉석 (번역). 동녘. p.279-p.285
[18] Marshall Cavendish Corporation (2010). Sex and Society. Marshall Cavendish.
[19] 로라 베이츠 (2023). 인셀 테러: 온라인 여성혐오는 어떻게 현실의 폭력이 되었나.
[20] 에바 일루즈 (2014).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박형신, 권오현 (번역). 이학사.
[21] 현실에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없었다… ‘재회 컨설팅’에 소비자 피해 속출 (2021.07.30.). 조선일보.
[22] 실연남녀 두번 울린다"…'재회상담' 주의보 (2023. 11. 22.). 매일경제.
[23] 다시 만나고 싶어요”…재회 상담 찾는 청년들 (2024. 01. 09.). 쿠키뉴스.
[24] 도우리 (2023, 12월 14일). “뉴진스에는 광야 같은 세계관이 왜 없을까”. 한겨레21 1449호.
[25] 울리히 벡, 엘리자베스 벡-게른샤임 (1997).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 정상적인 혼란. 강수영, 권기돈, 배은경 (번역). 새물결.
[26] 정우, 2020. 「척애」 『bright #9』 MPMG.
[27] 알랭 바디우 (2010). 사랑 예찬. 조재룡 (번역).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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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령 및 보고서
헌법재판소 1990. 9. 10. 선고 89헌마82 전원재판부 결정
헌법재판소 2002. 10. 31. 선고 99헌바40, 2002헌바50(병합) 전원재판부 결정
기타
정우, 2020. 「척애」 『bright #9』 MPMG.
랄로 ‘어깨 넘어 배운 트페’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Rc8CSYe6INs
표준국어대사전 ‘강요’ 항목
표준국어대사전 ‘폭력’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