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편집위원 호롱
여러분께서는 평행세계라는 말을 아십니까?
몇몇 분들께서 지금 고개를 끄덕이시네요. 네, 뭐, 유명한 말이라 다들 아실 것 같습니다. 이곳과 생긴 건 동일하지만 시공간은 다른 세계, 대충 그런 뜻이지요. 그렇다면 또 하나를 여쭤볼게요. 이곳이 바로 그 평행세계라면, 하고 상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조금 생뚱맞나요? 하지만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유 없이 아무렇게나 그러는 것은 아니에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평소와 같은데도 왠지 그날따라 생경하게 느껴질 때, 그때마다 이런 상상을 한 번씩 해보는 것이거든요.
사실 그건 굉장히 특별한 경험입니다. 당장 인터넷에 이렇게…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라고 검색해보시면 뭐가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께도 꽤나 익숙한 말이죠? 다들 이렇게나 자기 주변을 새롭게 보고 싶어 안달인데, 굳이 애쓰지 않아도 내가 다른 차원에 와 있나 할 만큼 모든 게 부자연스러워 보인다니 얼마나 특별합니까. 하지만 그게 꼭 기분 좋은 경험일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제게는 오히려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왜냐고요?
내게는 당연한 것들이 남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 데에서 비롯한 감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온갖 질문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남들에겐 당연하지 않은 것이 왜 내게는 당연한 것처럼 주어져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이들을 자격 없이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여태 이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혹은 애써 외면했을까. 얼마나 대단한 걸 가졌길래 저런 말을 하나 싶은 표정들이시네요.
아버지는 박사 과정까지 공부한 공기업 회사원이셨고, 어머니는 학·석사 학위가 두 개씩 있는 초등학교 교사이십니다. 본가는 지방 중소도시의 50평 아파트이고, 저는 성북구의 20평대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동대문구의 20평대 아파트에서 언니와 함께 살다가 하도 싸워서 3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나왔는데, 그동안 집값이 두 배 뛰었네요. 저는 이 집에서 다섯 개의 악기를 두고 달에 80씩 용돈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 고등학교까지는 본가가 있는 도시에서 다녔습니다.
여러 가지 감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 중 누군가는 분명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하셨을 것 같아요. 저는 특히 이분들의 감상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들으셨나요? 당신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평범하다고 느끼셨습니까? 혹은 제 부모의 직업이, 제가 살고 있는 구(區)와 출신지가, 제가 받는 용돈이 당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셨나요? 아니면 뭐, 차는 뭘 끌까 이런 게 더 궁금하셨을까요? 부모님 두 분이서 국산 차 끄세요.
제가 이렇게 특정 분들을 콕 집어내는 까닭은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게 저와 이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저와 이분들께 향하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런데 혹시, 이분들이라고 하면 거리감이 좀 있나요? 그럼 ‘우리’라고 해도 될까요? 에이, 가끔씩만 할게요. 지금부터는 제가 여러분, 하고 호명하더라도 그게 ‘우리’를 지칭한다는 걸 잘 기억해주세요. 물론 오늘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닌 분들께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대화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야기의 끝에서 무언가 느끼시는 게, 더 궁금해지는 것이, 또는 새로 떠오르는 고민거리들이 있을 것이라고요. 그러니 끝까지 함께 자리를 지켜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좋아요,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봅시다. 무엇으로 첫 단추를 끼우는 게 좋을까요? 제가 왜 ‘우리’에 대해 말하려는지부터 설명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우리’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스스로 어떤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현대 사회에서 웬 계급이냐. 상류층, 중산층 따위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삼 초간 생각해보세요. 삼 초, 이 초, 일 초. 생각해보셨나요? 저는 저와 여러분을 중상류층이라고 명명합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여러분께서는 아마도 부모의 각종 경제적 지원을 충분히 또는 당연히 기대할 수 있었을 터이고, 부모님의 학력 못지않게 여러분의 학력 또한 꽤 높을 것이며, 뭇사람들보다 조금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미래의 직업이나 주거지를 계획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특히 저와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과 같은 20대 사이에서, 이러한 ‘우리’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 간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사회의 불평등은 상위 1%의 최상류층 대 나머지의 격차로만 설명될 수 없고, 중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상위 10%의 사람들과 나머지 90%의 사람들 간의 격차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오늘 이야기 초반에 제가 평행세계 어쩌고 하면서 혼자 질문해보았다고 한 것들, 아직 기억하고 계시죠? “내게는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걸 왜 여태 생각하지 못했을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저의 “중상류층이라는 계급성”, 그리고 중상류층과 나머지 간의 격차, 즉 “10 대 90의 격차”에서 찾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지금부터 여러분께 들려드릴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이고, 제가 ‘우리’에 대해서 말하려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의 개인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이처럼 ‘우리’의 이야기로 소개해도 괜찮을까요? 이번에는 이 부분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볼게요.
좀 전에 제가 여러분의 계급의식을 질문드렸잖아요. 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아마 다른 걸 생각하신 분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중상류층이라는 말을 이번에 처음 들어서 어쩔 수 없으셨을까요? 그보다는 아예 모르겠다고 생각하셨거나 본인을 더 낮은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아주 솔직하게, 저는 그랬어요. 초등학생 때 영어학원에서 해외여행을 주제로 작문을 하는데 저만 해외를 못 가봐서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고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아버지가 의사인 친구랑 같이 이웃 어른께 인사를 드렸는데 그분이 친구 인사만 받아주신 기억도 있어요. 그냥 그런 것들이 모여서 아, 나는 가난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조금만 뒤집어보면 나는 어릴 때 해외여행을 다닐 만큼의 경제력이 되는 집안의 아이들과 같은 사교육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우리 집이 의사 집안과 같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산다는 게 되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대학에 와서야 느지막이 깨달았답니다. 물론, 저의 기억에 유별난 구석들이 있는 것 같긴 해요. 여러분들께는 자기 혼자서만 해외를 못 가본 게 창피했던 기억보다는 일찍이 해외를 다녀온 기억이 더 흔할 테니까요. 그래도 어쨌거나 여러분께서 본인이 생각하는 어떤 기준보다는 부족한, 혹은 평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잠시 정면에 있는 화면을 보시겠어요?
이 그래프는 2015년 12월에 발표된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의 설문조사 결과입니다.[1] 보세요, 어떠신가요? 저는 박완서 작가님의 『도둑맞은 가난』이 생각났어요. 또… 중산층의 약 80%가 자신을 빈곤층으로 인식하며 고소득층의 약 4%만이 자신을 고소득층으로 인식한다는 것. 저는 이 지점에서 저의 경험이 비단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제가 저 자신에게 던진 질문과 답이 여러분께도 통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니 저는 앞서 저에게 던졌던 질문을 조금 비틀어서, “중상류층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하게 누리면서도 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까”, 하고 여러분께 다시 드립니다. 앞으로 이 질문을 ‘핵심 질문’이라고 부를게요. 아무튼 여러분, 왜 그런 걸까요? 나름대로 생각해본바, 그것은 ‘우리’가 두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당연히 ‘우리’가 ‘우리’의 위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상류층으로서 꽤 많은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잘은 모른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제가 핵심 질문에 대한 답을 “중상류층이라는 계급성”에서 찾았다는 것과 연결되어요. ‘우리’는 부모님의 학벌, 부동산, 우수한 학군, 선망받는 주거지 등 좋은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조건들을 선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대물림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말 ‘계급’이라 일컬어질 만하지요.[2] 하지만 ‘우리’ 중에서 내가 성취한 결과에 대하여, 나의 노력과 능력 바깥의 요소들이 얼마나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아니면, 나의 성실한 노력과 뛰어난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나에게 꽤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더라도 말입니다, 나와 같은 정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마음 쓰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아니면, 나보다 더 많은 기회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이건 조금 새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요…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의 친구들은 참 이상했습니다. 누구 엄마네 차 아우디더라, 기숙사에 자녀를 바래다주는 학부모의 차를 보고 가정형편을 가늠하고. 누구네 집 몇 평이래, 좋은 집에 사는 친구들을 가려내고 주목하고. 아이들은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왜 그렇게 궁금했던 걸까요? 아마 여러분 가운데서도 비슷한 말을 해보신 분이 계실 겁니다. 제 기억 속의 저 아이들은 대개 가정형편이 나쁘지 않은 아이들이었거든요. 누구네 집 어디더라, 누구네 아빠 뭐 하더라. 여러분께서는 그게 왜 궁금하셨습니까? 그걸 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셨습니까? 제 생각에는 결국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요.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평범하다’ 아니면 ‘다들 나와 같으니 난 평범하다’를 확인하는 것. 물론 이걸 의도하고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닐 테지만요.
그러니까 저는 ‘우리’가 ‘우리’보다 더 높은 계층의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을 주로 보면서,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하여 섬세하게 질문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아마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아주 흔한 환경에서 성장해왔으리라는 점을 꼭 짚고 싶어요. 저는 이 대목에서 부자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엘리트 정치인들에 대하여 그들이 “그들의 습관, 삶의 방식, 그들만의 고유한 사회 경험에 둘러싸여 … 구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졌다”[3]라고 꼬집은 말이 떠오르네요. 사실 이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저와 같은 고대생이 많은 줄로 압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청년’이 누구인가요? 고대생이지요? 그러나 고대생이 평범한 청년일까요? 혹은, 청년을 대표할 수 있을까요?
제가 치렀던 2017학년도 대입을 기준으로 전국의 수능 응시자는 약 55만 명이었습니다. 그해 고려대학교 입학정원은 약 3천 8백 명이었고, 연대는 3천 5백 명, 서울대는 3천 1백 명이었지요. 이를 계산하면, 물론 대학에 등록하지 않고 재수를 결심한다든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어림잡아 전체 수험생의 약 2%만이 SKY 대학에 진입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SKY 대학의 입학정원에는 큰 변화가 없는데도 학령인구의 감소로 해마다 수능 응시자가 만 단위로 감소하는 추세인 데다가 수능을 응시하지 않는 또래들을 차치하더라도 아주 적은 비율이지요? 게다가 이들의 성적은 수능 성적이든 고등학교 내신 성적이든 대부분 최상위권에 포진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고대생들이 대변하는 삶의 양태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대학에 합격할 때부터 우리에게 따라붙는 고대생이란 타이틀, 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생각해도 그러하지만, 그 이전의 삶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말일 거예요. 자녀의 학력이 부모의 경제력을 따라간다는 것, 그것도 근로소득보다는 부동산 등 자산소득이 명문대 합격률과 더 관련 있다는 분석 기사가 이미 10년 전에 나왔을 만큼[4], 소득 격차가 학력 격차로 이어진다는 것은 다들 한 번쯤 들어봄 직한 사실이니까요.
자, 지금까지 ‘우리’가 모르는 첫 번째 사실을 말씀드렸고요, 두 번째는 자연히 따라오는 거예요. 바로 ‘우리’가 ‘우리’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의 풍경들을 모른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핵심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가 떠올린 중상류층과 나머지 간의 격차, 즉 “10 대 90의 격차”와 연결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와 다른 나머지 90의 사람들이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삶이 꾸려가는지 모르니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평범한 기준이 되어버렸고, 그 덕분에 ‘우리’보다 더 적은 기회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거나 배제하거나 심지어는 적대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렇지 않다면 결과에 대하여 내가 노력해서 만든 능력 덕분이라고 말하는 목소리 못지않게 그것의 자격과 기회의 불평등과 출발선에서의 격차를 논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을까요? 이 이야기는 이따가 다시, 좀 더 자세하게 하기로 해요. 이쯤에서 슬슬 “10 대 90의 격차”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 격차가 대충 어떤 건지 캐치하셨겠지만,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해서 보다 정확하게 그 성격을 정리하고 가려 합니다. 조귀동의 『세습 중산층 사회』에 따르면 10 대 90의 격차는 특히 90년대생 사이에서, ‘초(超)격차’와 ‘다중격차’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초격차란 중상류층과 나머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구조하에 있다는 것이고, 다중격차란 이러한 격차가 경제 자본의 격차뿐만 아니라 학력 자본, 문화 자본, 사회 자본의 격차까지 중첩된 결과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들은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세세한 양적 자료들은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 직접 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부모와 자녀의 학력, 세대, 직업, 성별, 지역, 부동산 등에 따른 격차가 중상류층에게서 어떻게 맞물려 기득권을 형성하고 또 세습되는지,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보여주고 있거든요. 대신 이 자리에서는 간단하게 몇 가지 사례들을 제시해보지요.
가장 먼저 저를 이야기해볼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석사 이상의 고학력자이자 서울 아파트 두 채와 지방 아파트 한 채를 보유한 다주택자이시고, 저와 언니는 소위 인서울의 상위 10개 대학에 진학하였으며, 이에 필요한 금전은 모두 부모님께서 지원해주셨고, 학업과는 별개로 각자 개인 악기와 레슨 경험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지방의 일반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비수도권 출신에다가 고등학교에서의 3년간 수학 인강을 제외하고는 수능을 위한 사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어쨌든 전체적으로 중상류층의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궤적을 그리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딘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여겨지는 요소가 있었을지언정 중상류층으로서의 제 삶은 여전히, 중상류층 부모의 경제력과 학력이 그 자녀의 학력과 거주지, 그리고 문화생활과 취향에까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해보죠. 우리가 대학을 다니는 20대 청년들이니까 학력 자본의 세습을 말해볼까요? 정찬민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1학기 SKY 대학생 중 국가장학금 신청자는 48%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나머지 52%의 학생들은 아마도 국가장학금 수혜 자격이 없는 9, 10분위일 것이라는 뜻이지요. 또 해당 자료에서 정 의원은 소득 격차에 따른 학력 격차 추이를 추적하기 위해 지난 4년간의 대학 신입생 소득분위 비율을 분석하고 있는데요. 2017년부터 2020년까지 SKY 대학 신입생의 9, 10분위 비율은 41.1%에서 55.1%까지 꾸준히 오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같은 기간 서울대학교만 따지면 그 비율은 43.4%에서 62.9%까지 계속 올랐고요. 반면 비 SKY 대학에서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7.9%에서 25.6%까지의 변화를 보였어요.[5] 이러한 분석 결과는 입시, 그러니까 학력 자본의 획득이 부모의 경제력에 크게 의존하며 그 정도가 해를 거듭할수록 강화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여태 다중격차를 위주로 설명해 드린 듯하니 이번에는 초격차를 짚어볼까요? 어떻게 격차가 점점 벌어지느냐. 가만히 있어도 집값이 오르는 서울과 집값이 떨어지는 지방 간의 격차를 떠올리면 간단해요. 제가 3년 전에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올 때는 그래도 지방 본가의 가격이 이 집의 50%를 웃돌았는데요, 서울 집값이 쭉쭉 오르는 동안 지방 본가 집값은 계속 떨어져서 이제는 25%밖에 안 되어요. 그리고 이 서울 집이 만약 강남권에 있는 집이었으면 격차는 더 벌어졌을 거예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통계에 따르면, 노동자 평균 임금이 1988년 월 36만 원에서 2016년 월 241만 원으로 5.7배 상승하는 동안 비강남권 아파트와 강남권 아파트의 값은 각각 18.7배, 43.1배 뛰었다고 해요. 30년 전 임금에 비해서 비강남권은 126배, 강남권은 264배 상승한 격입니다.[6] 같은 서울인데도 강남권의 부동산 가격 상승 정도가 압도적이에요. 서울에, 그것도 강남권에 집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격차, 그리고 부동산에 투기할 자본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격차는 이렇게 증강됩니다. 그리고 우리 20대 중상류층의 부모인 86세대들이 보통 이 서울 아파트 신화의 주인공들이시지요. 이들과 나머지 86세대 간의 격차가 그 자녀 세대인 20대에게로 넘어와 더 큰 격차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고요.
일자리에 따른 임금 격차 역시 중상류층과 나머지의 격차를 벌리는 주요 요인입니다. 예컨대 대기업 근로자와 중소기업 근로자의 월 평균 임금은 2배 이상 차이가 나고[7], 지난해 10월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월 평균 임금 차이는 152만 3천 원으로,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4년 이래 최대치를 찍었습니다. 같은 해 상반기 계약이 만료된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율은 6.6%에 그쳤고요.[8] 게다가 중소기업, 저임금 일자리일수록 근로자들의 근속연수가 짧아 연공을 인정받기도 힘들지요. 결국 첫 일자리에서의 임금 격차가 해를 거듭하며 더 커지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누가 주로 대기업 또는 정규직 노동자가 되며 누가 주로 중소기업 또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그 답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부모님께서 여러분의 교육에 십분 투자하시고, 여러분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오시고 한 거잖아요, 그쵸.
이쯤에서 “10 대 90의 격차”를 ‘다중격차’와 ‘초격차’로 이름 붙여 설명하는 것의 의미를 짚어봅시다. 그것은 생각건대 이런 것일 겁니다. 격차가 다차원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의 삶 전반에 중상류층으로서의 특권이 녹아들고 있다는 뜻이고, 그 격차가 스스로 몸집을 불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 이상의 결과를 누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대부분의 중상류층 사람들은 너와 나의 차이를 노력과 능력의 차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기실 능력을 배양하는 계급의 차이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알게 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아야겠지요. 하나, 중상류층과 나머지의 격차가 정말 능력의 차이를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을까? 둘, 대체 그 능력이란 무엇이며 셋, 현재 그것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은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우리’는 이 격차를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모습이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당장 이웃 나라인 일본만 해도 중소기업의 연봉이 대기업의 80%를 넘는다 하니까요.[9]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의 모습이 꼭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해도, 왜 다른 사람들까지 이 격차를 당연하고 공정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걸까요? 이제 드디어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말에 그 비밀이 숨어있거든요.
부자와 가난한 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인서울 대학과 지방 대학… 우리 사회에는 온갖 격차들이 있습니다. 네, 이제는 싱거운 말이지요? 이러한 격차들이 개인의 능력 차를 정확하게 대변한다는 믿음이 바로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입니다. 능력주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지위 따위와는 상관없이 각자의 성과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지는 게 공정하다는 믿음인데, 우리 사회에서 이 믿음은 열심히 노력하면 능력을 키워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되면서 동시에 현재의 위치가 각자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맹신을 아주 강하게 생산하고 있거든요. 약간 헷갈리시나요? 지금까지 계속 계급과 격차가 세습된다는 말을 한 것 같은데, 그 선천적인 계급에 따른 격차를 ‘타고난 지위와 상관없이 성과를 중시한다’는 능력주의가 정당화한다니까요. 하지만 말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 이제는 불평등한 계급을 정당화하게 된 능력주의가 실제로 한때는 ‘계급을 뛰어넘는 힘’이었거든요. 능력주의는 귀족, 평민, 노예의 신분과 같이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선천적인 요소보다 개인의 노력에 기초한 성공을 귀중하게 값 매겼으니까요.
그건 모든 사람에게 성공의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능력주의는 개인이 일궈낸 성과에 주목해왔던 것이고요. 또한 성과의 평가는 공정하게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만일 같은 결과를 두고도 누구는 귀족이라서 더 후하게 평가받고 누구는 노예여서 박하게 평가받는다면 그것은 공정한 것이 아니게 되고, 능력주의의 정신은 위태로워졌을 거예요. 그렇게 능력주의를 지탱하는 공정성은 투입에 대한 산출의 비율로 계산되어, 나의 비율이 남의 비율과 일치할 때 공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생략된 것에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누구나 같은 정도의 자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리 너는 귀족이야, 너는 평민이야 하는 과거의 계급 딱지가 무력해졌더라도 각 개인이 처해 있는 사회적 맥락, 가정 형편, 성별, 주거지 등에 따른 투입 가능한 자원의 ‘차이’는 여전히 실재하며 오히려 점점 강화되어 왔습니다. 이 자원들이 자녀에게로 귀속되며 차이는 세습되고 사실상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는데, 오늘 내내 제가 말씀드린 "중상류층의 계급성"과 "10 대 90의 격차"는 이의 발로이지요. 그러나 공정과 결과를 강조하는 능력주의 시스템은 이러한 사실을 지나칩니다. 이제는 새로운 계급 질서가 과거의 그것을 대체하고 있는데도 그로 인해 부상하는 새로운 차이를 정교하게 따져 묻지 않아요. 동등한 사람에게 동등한 몫을 분배하는 것이 공정하다고는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동등함과 다름을 판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능력주의를, 공정함을 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이들을 생각하고 계신가요?
저는 여기 계신 모두가 ‘평등’을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사람들이 평등보다 공정을 더 선호한다고 하더군요. 공정하게 배분한 결과인 것 같으면 결과의 불평등을 용인할 정도로 말입니다.[10] 저는 이 말에 퍽 공감했습니다. ‘우리’는 출발선에서의 격차는 내버려 둔 채 능력을 따지고 ‘우리’가 보기에 공정한 과정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데 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에 따라 차별받는 게 바람직한 능력주의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그렇게 불평등을 공정한 결과로서 용인하는 것이 정답인 양 가르칩니다. ‘동등하게 주어지는 기회’라는 능력주의의 전제가 어긋나버린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요.
물론 여러분께서는 이렇게 되물어보실 수도 있습니다. 중상류층이 남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어쨌거나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능력을 개발해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고. 계층의 이동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다면, 능력주의는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냐고.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런 사람은 극소수라고. 오히려 극소수에게나 허용되는 그 사회적 이동이 그 홍보 효과로써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불평등을 감내하게 만든다고. 이 사회의 능력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믿게 한다고.[11]
깊은 물 속에 사는 물고기는 자기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법입니다. 수면 위로 떠 올라야, 수면 위의 세계를 마주해야 비로소 그 자신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세계와 능력주의와 공정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사회가 존중하고 칭송하는 이 ‘능력’이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필 이 시대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내가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사실 그보다도 그러한 능력을 개발하기 용이한 조건을 타고났다는 것은 실로 우연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공정보다 평등을 더 크게, 더 자주 이야기할 책임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비대한 격차를 생산하고도 그를 은폐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으로 모자라 그를 정당화하는 믿음이 만연한 이 사회에서 ‘우리’가 특히 이득을 얻고 있다면, 그 구조적인 불평등을 보정할 책임은 누구보다도 구조의 수혜자인 ‘우리’에게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만약 격차에는 동의하면서 격차를 강화하는 기제는 외면한다면 이는 기회의 불평등을 묵과하면서 결과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것이고, 체계의 불공정성을 강화하는 것이며, 부당한 수익을 올리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께서 정말로 능력주의를 믿고 노력과 능력에 따른 보상의 공정함을 믿는다면, 한 영역에서의 불평등이 그대로 다른 영역의 출발선이 되지 않도록 기회의 불평등과, 결과의 평등과, 여러분이 가진 것들의 자격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오직 하나의 기준으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고 공정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걸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의 기준만을 두고서 단순히 “넌 ‘우리’만큼 자원을 투입하지 않았잖아, 넌 ‘우리’만큼 노력하지 않았잖아, 넌 ‘우리’와 같은 능력을 만들어내지 못했잖아, 그러니까 너와 ‘우리’의 결과가 다른 것은 당연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느냐 아니냐로 공정을 따지는 협소함을 뛰어넘고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요?
대학을 다닌 지난 4년간, 재학생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학생회에 대한 불만을 여럿 보았습니다. 학생회가 자꾸 관심도 없는 의제를 가져와서 강요한다고, 학생회가 너무 정치적이어서 싫다는 의견들이었지요. ‘학생회의 위기’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지금, 이들이 비단 소수의 의견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조민 시위’에 있어서는 학생회에 주최자의 역할을 기대하더군요. ‘우리’는 여러 의제 가운데서도 잠재적인 경쟁 대상이 불공정한 방법으로 이득을 얻는 것에 특히 민감해지는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협소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준이 하나일 때, 우리는 그 기준을 충족한 대상과의 상호작용 안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분명 발화되어야 하는 더 넓은 세계가 있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의 불공정 역시 지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서는 더 넓은 공정함을 말하는 것이 평등에 대한 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을 유추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 말이 여러분께 어떻게 다가가나요? ‘우리’가 투입한 것에 비해 적은 성과를 얻어야 한다는 건가, ‘우리’가 가진 것들을 포기하라는 건가, 그건 역차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여러분께서 무언가를 포기하시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무언가를 더 하시길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구조에 뛰어들고 우위를 점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경쟁이 제로섬 게임의 양상으로 펼쳐지고 승자독식의 구조가 유지되는 이상, 누구라도 자원분배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저도 부모님께서 집을 사면 돈을 벌고 전·월세로 살면 돈이 나가는데, 집을 살 돈이 있는 사람 중에 누가 집을 사지 않겠냐 하시는 걸 듣고 순간 말문이 막혔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가 불평등에는 동의하면서 불평등의 개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불평등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저는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현재와 과거에 대하여 더 질문하고 회의하기를, 그리고 미래의 변화에 대해서 더 고민하고 개입하시기를 바랍니다. 특권에 상처를 내지 않는 정치적 입장은 불평등을 정당화할 뿐이고[12], 자원의 재분배를 동반하지 않는 개혁은 없다고 합니다.[13] ‘우리’가 능력에 따른 차별이 공정하다는 것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믿고 있다면 이는 복잡한 맥락을 표백한 덕분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고, 오늘의 이야기를 곰곰 반추해보세요.
後日談。
어, 부재중 찍혀 있어서... 정말? 너 못 본 것 같은데? 아, 녹화로 봤다고. 고마워. 나 긴장해서 목소리 엄청 떨렸던 것 같은데. 응, 당연히 괜찮지. 나야 영광이지.
글쎄. 그냥 한번 생각하니까 계속 하게 되더라. 대학 와서 4년 동안 배운 게 꼬투리를 잡으면 물고 늘어지는 거라 그랬나? 그치, 공감하지 너도. 근데 다들 너처럼 궁금했을 것 같긴 해.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찾고 있는지 몰라. 나는 왜 이걸 고민하는 걸까, 왜 이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이 과정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지. 왜냐하면 나, 이번에 발표 준비하면서 어떤 책[14]에서 “질문하는 힘”에 대한 말을 봤거든. 같은 책에서 “일상이야말로 그 모든 혁명이 실패하는 원인”이라는 말도 봤는데, 그 일상에 질문을 던지는 게 변화의 시작이라는 맥락이었던 것 같아. 책에서 읽을 땐 되게 멋있어 보였는데 이렇게 말하니까 엄청 뻔한 것 같네… 그래도 이 말이 내게 많은 용기를 주었어. 나의 고민과 이야기도 모두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했으니까.
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우리 사회의 교육 시스템이 정말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 정도? 전에 우리 학교에서 조민 시위 했었잖아, 알지. 그때 우리 과 선배가 대자보 썼던 것도 알아? 입시제도의 공정성만을 따지는 건 충분하지 않다고, 더 근본적인 교육 기회의 평등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어. 그런데 이번에 읽은 책에서 이런 말이 나오더라. 영유아기에서부터 공공 보육이나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비친다는 것은 역으로, 한국에서 교육을 통한 계층 재생산이 매우 어린 시기부터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15] 이거구나 했지. 중상류층의 사람들이 질문해야 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아이고, 그건 아니야. 나도 잘 모르는데 이번에 책 좀 읽었다고 뭣 좀 아는 것처럼 구는 거지. 그리고 알아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어. 그래야 계속 공부하고 관심 가지고 그럴 것 같아.
어, 나는 아이리스 영이었나, 그분 책을 좀 읽어보려고. ‘책임’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책임이라는 게 약간 막연한 말이긴 하잖아, 특히 그게 어떤 거시적인 책임일 경우에는 더더욱. ‘구조적 불평등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책임’ 같은 건 사실 다른 공범도 많고, 법적 책임과는 다르게 문서화되어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요구되는 것도 아니니까. 이때 그 책임을 어떻게 요구 또는 요청할 수 있을까 나도 고민이 많았는데, 아이리스 영의 ‘정치적 책임’ 개념이 그 답을 해주는 것 같더라고. 응 맞아,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책임을 영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내 발표와 연관 짓자면 변화를 만들어낼 힘과 권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그리고 구조로 인한 특권을 누리고 있을수록 더 많은 정치적 책임이 요구된다고 해. 그치, 그래서 나도 읽어볼 참이야.
무슨, 내가 할 말인데 그건! 아무튼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다. 응, 우리 계속 이렇게 서로의 동력이 되자. 나도 오늘의 마음을 잊지 않을게.
편집위원 호롱 / jhsjhs0929@gmail.com
[1] 고소득층 절반 "나도 빈곤층"…사회안전망 부족해 많이 벌어도 불안. (2015.12.29.). 경향신문.
[2] 『세습 중산층 사회』 4장 참고. 짧게 말하자면,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넘어가는 오늘날에는 근로소득이 자산 형성에 기여하는 정도가 줄어들면서 기존에 자산을 가지고 있던 중상류층의 지위가 세습에 가까운 것이 된다.
[3] 강준만 (2019). 56. 앞말은 정치학자 이브 생토메르의 말이고, 뒷말은 사회학자 피에르 로장발롱의 말이다.
[4] 집값 따라 서울대·연고대 갔다. (2009.04.20.). 프레시안.
[5] [2020국감] '학벌 대물림' 심화…SKY 의대 신입생 74%가 고소득층. (2020.10.12.). 이데일리.
[6] 강준만 (2019). 72.
[7] 임금근로자 월평균 소득 309만원…대·중기 격차 2배 넘어. (2021.02.24.). 연합뉴스.
[8] [연중기획-끊어진 계층이동 사다리](3)中企서 대기업 이직 ‘바늘구멍’… 비정규직 탈출 꿈도 못 꿔. (2021.02.01.). 조기자닷컴.
[9] 강준만 (2019). 11.
[10] 김태심 (2020). 135.
[11] 강준만 (2016). 325-326.
[12] 김현준 (2020). 66.
[13] 문재인 정부를 흔든 ‘공정의 역습’. (2018.03.05.). 시사IN.
[14] 강준만 (2019).
[15] 조귀동 (2020).
참고문헌
단행본
강준만 (2019). 바벨탑 공화국. 인물과사상사.
조귀동 (2020). 세습 중산층 사회. 생각의 힘.
논문 및 저널
강준만 (2016). 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 사회과학연구, 55(2), 319-355.
김태심 (2020). 공정한 불평등?: 체제 정당화와 재분배 선호. 평화연구, 28(1), 129-167.
류동민 (2016).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위기. 황해문화, 90, 45-58.
박효민 (2019). 능력주의(meritocracy)를 넘어서 : 능력주의의 한계와 대안.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539-550.
기사 및 온라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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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필재 (2021.02.01.). [연중기획-끊어진 계층이동 사다리](3)中企서 대기업 이직 ‘바늘구멍’… 비정규직 탈출 꿈도 못 꿔. 조기자닷컴. Retrieved from https://chogija.com/entry/연중기획-끊어진-계층이동-사다리中企서-대기업-이직-‘바늘구멍’…-비정규직-탈출-꿈도-못-꿔?category=835058
천관율 (2018.03.05.). 문재인 정부를 흔든 ‘공정의 역습’. 시사IN. Retrieved from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