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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다이트붐기다리다지친이야기

[꼬문생각] 유진

생각해 보면 그간 나는 인디언식 기우제를 지내고 있던 거지. 러다이트붐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고대문화건 SNS건 확신에 찬 글을 남발하고 다녔던 거다. 그래도 나는 언젠간 성공하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러다이트붐이 진짜 올 때까지 #러다이트붐은온다 할 거니까. 

근데 러다이트붐은 안 오고 연예인 붐은 잘만 온다(붐이에요!). 그리고 나는 무척이나 조급해진다. 나는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는 4학년 막학기이며 어머니 아버지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고 계신다. 졸업이 목전인데 사실 뭘 할지는 잘 모르겠다. 트와이스 노래를 틀어서 ‘여자니까 이해해주길…’을 몇 번이고 들어도 솔직히 위로가 되지 않는다. 여자니까 이해해주고 뭐고 나는 지금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리고 그건… 생전 느껴보지 못한 공포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그냥, 글이나 좀 쓴, 헛소리에 인문학적 논거를 인용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문대생이다. 그나마 문대생이라는 타이틀도 곧 없어진다. 8학기를 전부 수료하고야 말았기 때문에.

문득 침대에 누워서 생각한다. “나는 이제 뭘 하지?”

 

1. 기업 취준하기: 그러나 별다른 스펙도 없고 재능도 없고, 사주에서 회사원은 절대 아니라며 ‘회사원이 되면 노조위원장이 되고야 마는’ 반골기질 팔자라길래 포기했다.

2. 러다이트붐을 위해 한 몸 바쳐 운동하기: 장난하냐? 대답할 가치도 없음.

3. 대학원가기: 돈 없는 학부졸업생 되기 vs 돈 없는 대학원생 되기, 나는 전자가 나았으므로 바로 포기했다.

(중략)

99. ??? 준비하기: 결국 이건가? 나도 결국엔?

 

그렇게 됐다. 그냥 그렇게 됐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아도 내가 뭔가 큰 게 될 줄 알았던 홍대병자도 결국 그렇게 됐다. 그런데 사실 이때까지도 정신 못 차려서, ‘이건 그냥 한번 해보는 것’뿐이라며 자기위안했다. 차피 이거 안 돼도 다른 거 하면 된다며, 믿는 구석 없으면서 쿨한 척 하기. 그런데 까보면 사실 그렇게 남들이랑 똑같이 되기 싫다며 떵떵거렸으면서 ‘one of them’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뿐.

누군가 내게 ‘??? 준비하세요?’ 물어보면, 갑자기 아닌 척 이런 거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척 ‘아 사실 제가 원래 대학원을 준비하려 했었는데요, 그냥 뭐~ 요즘 다들 그러잖아요. 한번 준비 조금 해보는 거죠. 잘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뭐.’라고 대답한다. 사족이 쓸데없이 길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 변명을 하고 있다. 이건 사실 개쫄린다는 반증이다. 이 텍스트를 해석하려면 온전히 반대로 읽어야 한다. ‘아 사실 제가 원래 대학원은 못 갈 것 같은데요, 그래서 ??? 준비하려고요. 안 되면 저 아무것도 할 거 없어요. 제발 제가 꼭 가야 해요.’ 이게 진짜다.

시험장에서도 사실 현실감각이 없었다. 오죽하면 진지하게 시험을 앞두고 마지막 점검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왜들 그리 다운돼있어’ 하고 싶을 정도다. 내가 시험을 본다는 자각이 사실 별로 없다. 풀면서도 감각이 뭔가 이상하다. 시험 VR 체험하는 것 같은 그런 감각? 사실 마지막 논술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창 너머 뺵빽히 들어앉은 동그란 머리통들을 보며 이 중에 몇 명이나 ??? 갈까, 생각하다가 약간 정신이 아파졌다. 

그렇게 내 짧은 ??? 준비기간이 끝났다. 매겨보고 뭐, 마땅치 않으면…이라곤 했는데 사실 그렇지 않잖아요? 안절부절못하다 설빙에서 애플망고빙수 기다리는 사이 후딱 채점했다. 그리고 밤새 정신아픔이 타임. 이 사람들은 미쳤어, 지금 왜 굳이 등수를 세어보고 있는 거야? 성적도 안 나왔는데 지금 뭔 의미가 있어? 생각하면서도… 정신차려보니 ’30 / 40 / gpa 99 라인 어디까지 잡을 수 있을까요?’(예시입니다)를 작성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갈까 말까 갈까 말까 나는 갈 수 있을까 망상이 무한히 진동하다 종내에는 한 가지 결론으로 수렴. 온 몸을 감싸는 기시감은 마치 이게 예정된 운명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게끔 한다. 

 

여러분, 저는 로준생이 되었습니다.

 

문대생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전공이 마중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유진 | gamjabat_@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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