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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실종사건

[꼬문생각] 은희

이 모든 것들이 모여 고향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나에게 고향은 영원히 미완의 상태로 남을 테다. 어쩌면 미완이 아니라 아직 재료조차 다 찾지 못했다고 보는 게 적절할지도. 부모님은 모두 충청도 출신이고 나 역시 충주의 어느 산부인과에서 태어났지만, 내 안에 남아있는 충청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할 뿐이다. 부모님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대전의 야구팀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게 유일한 흔적이 아닐까. 15살 때까지 경기도에서 자랐지만, 그마저도 시를 넘나들며 이사를 했던 터라 정이 들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거주 기간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그곳에서의 인간관계가 희미하기 때문에 나에게 경기도는 ‘친구는 아니지만 지인’에는 속하는 사이일 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강원도로 이사를 가고, 고등학교 3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보낸 뒤,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레 살아본 곳은 많지만 정작 정붙일 만한 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상황에 놓였다.

 

10대 시절 이사를 자주 다니기는 했지만 고향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였다. 당시 나는 전국 단위로 학생을 모집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고향은 자기소개할 때 빠져서는 안 될 필수 요소였다. “내 고향은 부산이다.”, “나는 속초 사람이다.”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나에게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 없다는 것을 자각했다. 어쩌면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남들도 다 나처럼 이사를 자주 다닐 거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요즘 같은 시대에 한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오히려 거주 이전의 자유를 알차게 누리는 사람은 흔치 않았고, 그 현대인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심정이란!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라는 모 아이돌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다들 나처럼 사는 줄 알았는데 사실 나 빼고 모두 고향에 얽혀 땅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자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때부터 ‘고향’이라는 단어가 미친 듯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본가가 어디 어디에 있어”라며 (남들은 몰랐겠지만) 애써 고향이 아닌 다른 단어를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스스로 고향으로 여기지 않는 공간을 고향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얘는 대전 사람, 쟤는 서울 사람, 걔는 울산 사람… 그런데 나는? 나는 어디 사람이지? 내 이름 석 자 옆에 적을 지역 하나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붕 떠 있음을 느낀다. 어딘가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공중에 떠 있는 채로 이리저리 휩쓸리는 삶… 언젠가 한 번은 현대 소설에 역마살[2]이 낀 인물이 나오자 내 사주에도 역마살이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영화 노매드랜드 (Nomadland, 2023)에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자동차를 집 삼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펀은 자신의 유목민 같은 삶에 대해  홈리스(homeless)가 아니라 하우스리스(houseless)라고 말한다. 하우스(house)가 경제적, 물리적 공간을 의미한다면 홈(home)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에 해당할 것이다. 펀의 말을 들으며 어쩌면 나는 그녀와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은 존재하지만, 정작 정붙인 땅은 없는 그런 삶. 

 

그런데 … 굳이 고향이 있어야 할까? 하우스(house) 없이도 잘만 사는데 홈(home)이 없다고 해서 못 살 이유가 있을 리가. 그냥 적당히 붕 떠 있는 채로 어중이떠중이처럼 사는 것도 썩 괜찮은 삶이라고, 이제는 생각한다. 사주까지 의심했던 것에 비해 고민의 끝이 별거 없기는 하지만. 물론 앞으로도 나에게 고향이 새롭게 생겨날 일도 없을 테지만, 이러한 내 삶에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없는 고향을 찾으려 애쓰지는 않을 거다. 그냥 계속 이렇게 소박한 떠돌이로 사는 것도 제법 힙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은희 | a0520choi@naver.com


[1] 고향정보 표의 '고향정보'에 달렸던 각주. 
고향에 대한 사전적 정의와 필자의 개인적 인식을 바탕으로 작성. 고향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고향(故鄕):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여담이지만, 표 작성을 위해 유튜브에도 검색해 보았으나 ‘전설의 고향’밖에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네이버만을 바탕으로 작성하게 되었다.

[2] 늘 분주하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된 액운. (네이버 국어사전)


참고문헌

네이버 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main, 접속일 2024.07.30.

영상자료

Chloe Zhao (2020). Nomadland. Searchlight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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