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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현실과 상상력

[꼬문생각] 서연

어떤 시도 현실에 발 딛지 않고 쓰일 수 없다. 어떤 시인도 현실을 살지 않고는 시를 쓸 수 없다. 이 말이 와닿지 않는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시는 독해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며, 실제로도 그러하다. 특히 미래파 시인들의 시들은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단번에 서정성을 읽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파편화된 경험과 인식이 독자를 마주한다. 균열 속에 갇힌 독자들은 사회과학적 에세이가 가지는 현실성이나 개연성을 시에서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시는 자꾸 어려워진다. 시 읽기의 어려움은 시와 현실을 더욱 동떨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아이러니하게도 ‘비현실'이라는 특성에 기대어 고유한 논리성을 구축하고, 균열을 통해 현실의 일부를 체험하게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한 세계를 구획하고 건설하는 일이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과 다르고, 때로는 이질적인 무언가를 생각해 내 현실에 기대지 않는 논리성을 설계하는 과정이 바로 시를 짓는 과정이다. 시인들은 일상 속의 균열을 느끼고, 사물을 새롭게 인식해 ‘낯설게’ 만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그 파편적인 감상을 제공한다. 일상 속의 균열을 ‘느껴야’하고 사물을 새롭게 ‘인식’해야 하며 현실에 존재하는 언어로 출력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시는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자신이 무엇을 딛고 서 있는지 검토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이 더해진다. 그리하여 시인의 해석으로 재구성된 체험은 독자에게 와서 다시 해석의 대상이 된다. 즉, 시 안에서 시인의 상상력, 나아가 나의 상상력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시를 현실적인 합리성의 토대 위에서 다르게 해석하고, 개인의 체험을 기반으로 시의 세부를 구체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결국 시가 우리에게 가장 어렵지만 정확한 체험을 제공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는 생면부지인 누군가의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에 맺혀 있다가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다
투명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이 없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분주히 주변을 지나친다
나를 통과하다 넘어져 뒤를 돌아보곤 다시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당신의 눈빛을 되돌려줄 수 없지만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이 있다


맹재범 「여기 있다」  


맹재범의 「여기 있다」의 물방울을 단번에 노동자라고 인식한 이유를 내가 읽고 있는 노동 서적에 돌린 것을 기억한다. 현실을 투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어떤 노동자의 전신이 기계에 갈려 나간다. 높은 빌딩 위에서 떨어진다. 지하철 사이에 그의 몸이 갇힌다. 압력 때문에 날아든 가스관 뚜껑에 맞아 즉사한다.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다. 배에서 나오지 못한다. 좁은 곳에서 압사당한다. 사회 구조에서 발원하는 신체적-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미처 나열하지 못한 수많은 경험이 시민으로서, 그리고 독자로서의 우리를 조금 더 민감하게 만드는 듯하다. 맹재범은 냉면 가게를 운영하며, 자신과 냉면을 먹는 소비자들이 너무나 다른 공간에 있음을 짐작했다고 말했다. 노동 환경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 같았고, 자신과 같은 마음을 느끼는 노동자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즉, 이러한 맥락에서 시는 자기표현의 양식을 초월해 누군가의 현실을 재현하는 도구가 된다. 이렇게 나의 현실은 너의 현실이 되고, 생면부지인 누군가의 현실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알 수 없는 타인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 시 안에서 재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는 개연적이지 않지만, 현실적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시는 사치스러운 언어라고.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불친절하기에 ‘배운’ 사람들만 그 의중을 알아챌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건 맞으나, 시는 누구보다 낮은 언어를 쓰는 문학이다. 흑인 전사로 불렸던 시인 오드리 로드는 흑인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관해 썼다. 잠깐의 꿈도 꿀 수 없이 바쁜 일, 그렇게 혹독한 삶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땅, 그리고 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것을 마주하려 애썼다. 그 참혹함을 마주해야만 우리는 이 상처를 딛고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로드는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으로 인해 공격받고, 당황하고, 슬프고 억울해 끝내 화가 났을 때도 그저, 짧지만 굵은 말들로 시를 써 왔다. 참혹하고 당황스러운 인생에서도 움츠러들기보다 내지르기를 택했다. 대개 흰색이던 유니콘을 검정으로 상정하는 대범함, 그리고 이 대범함에서 ‘흑인 여성'으로서 갖는 원통함이 드러난다. 


블랙 유니콘은 탐욕스럽다

블랙유니콘은 성마르다

블랙유니콘은 오인되었다.

그림자로

또는 상징으로

차디찬 땅을 헤치며 끌려 다녔다. 

내 분노를 향한 조롱이

안개처럼 흩뿌려진 곳을,

유니콘의 뿔이 놓이는 건 그녀의 무릎 위가 아니라

커져 가는 

달 구덩이 깊숙한 곳이다

블랙 유니콘은 가만 있지 못한다

블랙 유니콘은 수그릴 줄 모른다

블랙 유니콘은 자유롭지

않다. 

오드리 로드 「블랙 유니콘」 


‘블랙 유니콘'은 탐욕스럽고, 성마르지만 결국 오인된 무언가다. 열등하고 미개하며, 폭력적이라 오인된 흑인의 정체성처럼 말이다. ‘그림자'처럼 누군가의 뒤꽁무니를 쫓기도 하고, ‘상징'으로서 이리저리 치이는 흑인의 삶은 ‘유니콘’으로 표현된다. ‘유니콘'이 현실에 존재하는 동물이 아님을 생각했을 때,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비현실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삶의 한구석을 잘 담아낸다. 개인의 분노가 조롱거리가 되었던 시대.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간다. ‘블랙 유니콘'은 그리하여 ‘가만 있지 못’하고 ‘수그릴 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분노로, 슬픔으로, 꽉 막힌 막막함으로 시를 써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블랙 유니콘'은 ‘자유롭지/ 않다'라는 마지막 마디로 시는 끝이 난다. 분노로 시작하여 제약으로 끝나는 이 시는 마냥 희망적이지도 않고, 현실의 무언가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 속에 숨은 뜻은 무엇일까?


유니콘의 상징인 ‘뿔'이 주인인 ‘그녀의 무릎'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커져가는 달 덩이 깊숙한 곳'에 놓인다는 것은, 주인인 ‘그녀'이자 ‘블랙 유니콘'의 고유함은 결국 그녀만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다른 곳에 놓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마지막 행의 ‘자유롭지 /않다'라는 서술이 들어맞는다. 결국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흑인의 정체성, 나아가 주류로 평가받지 못하는, ‘블랙 유니콘'과 같은 ‘별종'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영원한 제약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제재는 너무나 현실적인 무언가가 된다. 비현실적인 제재와 개인적인 경험을 촘촘히 쌓아 논리를 만들면, 딱 들어맞는 현실의 한 부분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노와 슬픔, 막막함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로드는 훗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침묵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녀는 수많은 차별과 증오의 얼굴, 고됨과 슬픔의 얼굴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냈다. 그녀의 시는 침묵 대신 택한 수많은 분출의 기록이다. 분출했기 때문에 쓸 수 있으며, 쓸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수많은 로드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외부의 시선에서 시는 개연적이지 않으나, 안으로 들어가 읽다 보면 상당히 촘촘하다. 세계를 직조하는 일은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 촘촘함이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감각하게 한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무게의 슬픔과 육신의 연약함, 혹은 삶의 굴곡과 불행한 체험. 잘 보이지 않아 감각하지 못했던 타자가 분출한 기록을 읊어가며 현실의 누군가를 제대로 바라보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시를 읽는다. 우울한 노동자(맹재범, 「여기 있다」, 버림받아 절규하는 여자 (최승자, 「Y를 위하여」), 손목이 잘린 노동자(박노해, 「손무덤」) 죽어버린 조성환 (김기택, 「조성환의 죽음」), 외국인 노동자(김이듬, 「말할 수 없는 애인」)를 읽는다. 그리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는 계속해서 나에게 가깝고 또 먼, 아주 모르지는 않고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닌 존재를 읽는다. 삶을 관통하는 필수적인 분투, 희망, 그리고 행복을 읽으며 삶을 구성하는 토대에 대한 생각까지. 이제 ‘제대로’ 읽을 수 있다. 현실을 딛고 피어나는 상상력의 힘은 가히 대단하다. 


시는 세상의 논리로 말하려 하지 않는다. 시 안의 고유한 세계로부터의 분출을 통해 논리성을 획득한다. 때로는 분출되는 단어와 울음은 우리를 괴롭고 불쾌하게 만든다. 어쩌면 정돈되지 않은 날것의 언어가 우리의 현실에 가장 충실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모든 인간의 삶이 말갛고, 숭고하기만 하겠는가. 시도 그러하다.


서연 ㅣwaveandwavy@gmail.com


참고문헌 


단행본

맹재범 외 (2024). 2024 신춘문예 당선시집, 문학마을. 

최승자 (1984). 즐거운 日記, 문학과 지성사.

박노해 (1984). 노동의 시집, 풀빛.

김기택 (1999). 사무원, 창작과 비평사. 

김이듬 (2011). 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 지성사.


기사 및 온라인 자료

이다혜. (2018. 08. 16.). 침묵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한겨레. Retrieved from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57983.html 

잠자냥 (2021. 02. 03) 시는 사치가 아니다 흑인 여성 시인 전사의 외침 [브런치] 접속일 2024. 08. 08 Retrieved from https://brunch.co.kr/@socker/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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