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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물어봤다 러다이트붐언제오냐고

[꼬문생각] 유진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제가 무척 싫어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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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나와 로스쿨의 궁합을 본 이름점이다. 출처: https://www.yuksul.com/name.html


어느 봄과 여름 사이, ‘리’로 시작해서 ‘트’로 끝나는 어떤 시험을 준비할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침 일찍 아메리카노를 원샷해 버리고, 언어이해 영역을 일찍 끝낸 뒤 화장실에 가는 내 소소한 루틴을 수행하던 중이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또렷하게 느껴졌던 시야로, 어떠한 기사를 똑똑히 보고야 만다. 모 유명 법무법인에서 도입한 법률 AI가, 2년 차 변호사보다 낫다는 기사를…….

나는 이 감정을 여러 번 겪어 봤다. 내 마지막 마지노선인 맥도날드에서 키오스크를 마주했을 때, 처음 통계 프로그램을 돌렸을 때,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돌리는 코드를 나보다 AI가 더 잘 짠다는 사실을 목도했을 때.

누구는 가는 길마다 꽃길이라던데. 왜 나는 가는 길마다 기울어지는 걸까? 가장 처음 했던 행동은 눈 비비기(애석하게도 3년 전 라섹을 마친 눈이 아주 건강하다는 사실만 재확인했을 뿐이다). 그다음은 지금 그냥 훅 튀어버릴까 고민하기(또한 애석하게도 귀중품이 모두 스터디룸에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기울어가는 배에 올라타기. 왜냐하면 기울어가는 배고 뭐고 지금 내가 위치한 이 현실이 불구덩이였으므로.

그렇게 나는 《고대문화》 153호와 154호 그 어드매 로스쿨생이 되고야 만다. 어쩌면 미래의 내가 수없이 말리고 싶어 할 선택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나는 꽤나 간절했고, 반쯤 로시오패스[1]가 되어가면서도 이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수없이 자기 위로했다. 별 논리는 없고 ‘설마하니’만 무한히 반복되는 변명거리였다. 설마하니… 법이란 건 정말 복잡하고 어려운 논리학인데, 고작 기계 따위가 인간보다 더 잘하겠어?

제가 정말 싫어하는 또다른 격언이 있습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처음으로 민법 사례형 답안[2]을 썼다. 충격적일 정도로 구조가 엉성했고, 와중에 중요 조문들을 엉성하게 외운 탓에 아주 어렴풋하게만 맞는 답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사안 포섭이 완벽하게 같잖았다. 적어도 잘 읽히는 글은 내 특기라 생각했는데도, 과하게 긴장한 탓에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덕분에 이도 저도 아닌 횡설수설에 그쳤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AI가 나보다 훨씬 낫겠지. 여기서조차. 일단 말은 번드르르하니 잘하니까, 내가 들었던 강의 전체를 학습시키면 분명 나보다 훨씬 정확하게 법을 적용할 수 있을 거다. 지금은 법률 AI가 거의 도입되지 않았지만, 차차 법무법인에서 도입하기 시작하면 가장 아래에 있는 변호사들부터 줄겠지. 그러면 곧 거대 자본이 손을 뻗쳐서 이를 대중화시키겠지. 쇼츠나 릴스에는 ‘요즘 AI 근황ㄷㄷ’로 올라와서 몇십만 조회수를 기록할 거고. 콧대 높은 법조인들을 비꼬며 값싼 AI로 이제 개혁할 때가 됐다는 댓글들이 수십 수백 개가 달릴 거다.

나는 또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 어쭙잖은 인문학도, 기계를 다루는 솜씨도, 키오스크에서 빅맥 세트를 주문하는 모양새도, 그리고 법을 공부하는 실력도 쓸모가 없다.


문과대에는 따뜻한 인문학과 세상을 무한히 비판하는 학우들과 뜨거운 러다이트운동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버리고 나는 여기서 무얼 얻고 있는 걸까요?


유진 | gamjabat_@korea.ac.kr



[1] 로스쿨과 사이코패스를 합성한 신조어이다. 주로 로스쿨 입학을 위해 이기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 사람을 뜻한다.

[2] 특정 법적 문제 상황에 대한 쟁점과 사안 포섭을 한 편의 짜임새 있는 글로 담아내는 것으로, 논술형 답안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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