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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로 ‘스프’를 나누자

[꼬문생각] 윤정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 vs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두 명이 된다’

인터넷 밈에 빠삭하진 못해도 이 질문이 몇 년 전부터 의견이 분분한 논쟁거리였다는 것 정도는 안다. 주변 이들이 말하길 대문자 F(사실 MBTI와는 무관한 논쟁거리일 수도 있지만)인 나는 어떤 논리로 생각해보아도 그저 결과가 슬픔이 반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으나, 어떤 한 순간을 경험하기 전까진 이 문제나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다.

사람 사이 슬픔의 공유에 대해 처음 제대로 생각해본 계기는 푸바오가 만들어주었다. 한국 최초의 자생 판다인 푸바오는 사육사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그 사랑이 가득한 영상과 그에 담긴 서사는 커다란 판다 열풍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엄마는 ‘바오패밀리’를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실은 엄마가 무언가를 ‘덕질’한다고 할 수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뇌과학적으로는 베이비 스키마{Baby Schema}라고 하던데, 판다의 인기비결은 간단히 말해 그들이 귀엽고 또 귀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엄마는는 가장 순수하고 악의 없는 판다의 모습에 이끌렸더랬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듯 요즘 세상이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어서 무해함이 일종의 트렌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받던 푸바오도 여느 나라의 판다들과 같이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떠나는 날이 오자 엄마를 비롯한 많은 판다 팬들은 눈물을 흘렸다. 사랑받으며 걱정 없이 살던 순수하고 천진한 동물이, 아무것도 모른 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에, 또 유대감을 나눴던 사육사 할아버지와 떨어지게 되는 모습에 엄마는 슬픈 감정이 들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 모든 생각들은 인간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지만, 어쨌든 많은 이들이 떠나는 푸바오를 보며 슬퍼했던 건 사실이다. 그 무렵 나도 영상이나 관련 기사 등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적잖이 놀랐다. 자유로운 감정공유의 매개로 작용하고 있을 줄 알았던 인터넷 세상에선 예상과 다르게 푸바오를 떠나보내는 이들이 흘리는 눈물을 조롱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댓글이 가득했다. 사람 사이에서 공유되는 슬픔에 대해 그때서야 골똘히 생각해봤다. 어떤 이유의 슬픔이든 함께하지 못하거나, 함께하길 꺼리거나, 더욱 심각하게는 타인의 슬픔을 조롱하는 현실이 속상하기만 했다.

연말연시 유독 크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때로는 감정보다 상황에 대한 해석이 훨씬 앞서고 중요한 순간도 있지만, 작금의 한국은 ‘슬픔 상실의 시대’ 같다. 서로에 대한 헤아림이나 이해보다는 끝없는 ‘우리’와 ‘그들’의 구분과 타자화가 더 익숙한 듯 하다. 행복하고 설레는 개인의 시간이 슬픔의 공유로 방해받는다는 인식을 자주 발견하고 씁쓸했다.[1]

사실, 일이년 전만 생각해보아도 나조차도 스스로가 느끼기에 부정적인 것들은 피했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학부생이기도 하고 ‘내가 하는 일들로 스스로가, 또는 주변 이들이나 이름 모를 타인 누구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게 내 삶의 큰 목표이자 과제’라고 늘 되뇌곤 했으나 나도 타인의 슬픔에 무관심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쁘고 행복한 소식, 좋은 것들만 거리낌 없이 보고, 나도 모르는 새 부정적이거나 슬프고 어딘가 불편한 무언가를 마주하기를 꺼렸다. 갈수록 강박적으로 스스로가 느끼기에 좋은 것들이나 긍정적인 것만 보고 들으려고 했는데, 급기야 좋지 않은 소식을 보기 싫어 기사 읽는 것까지 꺼리기도 했다. 이런 내 모습을 자각한 순간에는 꽤나 큰 충격을 받았고, 이 점은 작년 여름방학 내내 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고민의 시간을 통과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던 무렵,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북토크를 들으며 운명적으로 김기태 작가님의 말씀을 만났다.

이제 나는 안다. 우리 모두는 이 세계에 아주 깊이 연루된 사람들이라 어떠한 현실이든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2] 그래서 우리가 귀를 열고 눈을 뜨고 피부로 느껴야만 마음껏 손잡고 서로의 슬픔을 보듬어주면서 ‘우리’라는 이름으로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서로에게 자주 연대의 손을 내밀면서 슬픔을 함께하다보면 우리는 또다시 연결되고, 그렇게 연결된 우리가 다시 슬픔을 함께하고 … 그렇게 끊임없이 슬픔을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너무나 메마른 관계로 타인의 슬픔에 좀처럼 공감하지 않는 사회, 끝없는 타자화로 ‘우리’와 ‘그들’ 사이의 싸움만이 가득한 사회, 추모와 애도에 인색한 사회,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적대시하는 사회가 아니길 바란다. 타인의 슬픔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3] 우리가 서로의 슬픔에 인색하지 않으면 좋겠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게 슬픔을 나누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는다면, 내 답은 이렇다. 슬픔이 반이 되든, 두 배가 되든, 우리가 ‘스프’ 정도는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서로 ‘스프’를 나누자.


윤정ㅣyunssul@naver.com




[1] 심리학에서 이야기 하는 감정의 전염이나 물결효과에 따르면 사람 사이의 감정은 전이된다. 더 구체적으로는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인 감정보다 더 쉽게 전이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론에 근거해 본다면, 부정적인 감정이 쉽게 전이되어 사회적 슬픔이 증가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지배적인 상황을 우려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자연스레 부정적인 감정을 안게 된 이들을 멀리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2] 작가님 책에 냉소가 필요한 이유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 작가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현실에 대한 비판과 탈주는 소설이 해줄 수 있는 역할 중 하나이다. 그러나 현실세계 사람들은 이 세계 내에 깊숙하게 연루된 사람들이기에 ‘어떻게 현실에 적응해서 생존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개인적으로 탈주가 아니라 내파에 관심이 많다. 탈주는 개인적인 개념(혼자서도 가능)으로 보이지만, 내파는 여러 사람이 함께해야만 할 수 있는 집단적인 개념(함께 개미굴 파듯이)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스스로의 소설이 그런 부분에서 오히려 냉소적이기보다는 이상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걸 그리다보면 냉소적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이 드러나는 것 같다.”

[3]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신형철, 2018: 28)라는 말에 매우 공감한다.





참고문헌

신형철 (2018).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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