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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

편집장 현정

선을 그어 자, 여기부터가 여름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선을 그린 건 바로 그 곤충일 것이다.


올해의 여름이 도착했다는 걸 느낀 건 그때였다. 창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데 아주 작은 곤충이 시야 안으로 날아들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래도 그 곤충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할 수 있다. 새까만 몸통에 반투명한 날개가 두 개 있었고 꽤 커다란 눈이 빛났다. 이렇게 회상할 수 있는 건 그때의 내가 그를 내쫓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 손짓도 하지 않고 그 곤충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하던 것을 했다. 바깥에는 이제 마냥 새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가로수 잎사귀들이 푸르게 익어갔고, 길어진 해 덕인지 개들과 사람들이 유독 많이 걸어 다녔다. 어렴풋이 온기가 느껴지는 공기 속에 생명의 농도가 높아졌음을 감지했고, 그건 곤충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반가웠다. 그리고 잠시 후, 문득 미래가 궁금해졌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일 년 전의 나는 곤충이 내 쪽으로 날아들 때 단호하게 그를 쳐냈을 것이다. 죽일 결심을 하진 않더라도 손을 휘휘 흔들며 나보다 수백 배는 더 작은 곤충을 떨어뜨려 놓았을 것이다. 무섭다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자라 버렸기에 방어라는 말로 숨어 버리지도 못했으나 곤충이라는 낯선 것이 기어 다니는 게 그냥 신경 쓰였다. 몸 한구석이 불편하게 간지러운 기분이 막 들었다. 그래서 손등을 휘두르고 종이로 쳐 내고 약을 뿌렸다. 곤충은 급히 도망치거나 우연한 척 죽었다.


올해의 나는 지난 가을과 겨울과 봄을 살아 내며 어쩌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이유라고는 없는 불쾌를 휘저어 작지만 큰 죽음을 야기하는 나쁜 버릇에서 풀려났으니 말이다. 작년의 내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살짝 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년의 나는 어떻게 반성하며 곤충을, 또 여름을 맞이할지 궁금해졌다. 이건 꽤 산뜻한 질문이었다.


완연한 여름의 증거로 당신을 맞을 이 책 안에는 우리의 살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우리는 글을 쓰며 자꾸 내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계절 몫의 슬픔을 꾸역꾸역 삼키면서도 다시 뱉어내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얼마만큼 슬픈지 확인하고 기록한다. 그걸 원료로 같은 슬픔의 반복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상상한다. 오래된 미래에 있을 우리를 그려 본다.


이미 너무 오래, 지겹게 반복된 슬픔들을 만날 때는 그런 관찰과 창조의 시도들이 마냥 무용해 보인다. 그럴 때는, 그럴 때는. 어떻게 하지. 여기에 대한 답을 나는 갖지 못했다. 경쾌한 질문도 아닐뿐더러 묻는다고 주어질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제아무리 해가 긴 여름이라도 위도 37도의 나에게는 어김없이 밤이 온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걸 기억하며 어둠을 바라본다. 그 어둠은 길고 무겁다. 어떤 극작가는 한여름 밤을 꿈의 무대로 쓰기도 했다던데, 여름밤의 산책이 그렇게 달다던데. 그런 제안들이 어둠을 이겨내보라며 속삭인다. 너는 할 수 있다고, 그러니 꾹 참고 잘 해 보라고. 그러나 그런 서사가 오늘의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정말 가능한지, 밤길을 조심하라 한 것은 당신들이 아니었는지, 그런 질문들이 자꾸 입 안에서 맴돈다. 그래서 결국, 어둠 속에 늘어지고 흘러내리는 슬픔과 그저 나란히 누워 있다. 그때 분명해지는 건 오로지 별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에. 살고 싶지 않은 날들이 있기 때문에 살고 싶은 마음이 더 소중해진다. 그런데도, 어쩌면,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자꾸 당신에게 권한다. 백야가 있는 곳으로 도망치지 않고 당신에게 말을 건다. 부족한 자원으로 빚어낸 이야기들을 귀한 당신이 받아 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자꾸만 살고 싶어지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미래에서도 무사히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미래에서는 우리의 글이 아주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린 채 있기를 바란다. 머뭇거리며 적어 내던 희망들이 당연한 기반시설이 되어 있기를 희망한다. 그곳에 있을 미래의 윤리에게서 새로운 꾸중을 듣고 싶다. 그리고 진심으로 죄송해하면서, 그러나 반갑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갱신된 윤리를 기억하고 실천하며 거기에서도 슬퍼할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라본다. 다만 더 사소한 것에 슬퍼하고 있기를, 더 미약한 것에 슬퍼하기에도 넉넉한 기력을 가지고 있기를 꿈꾼다.


그리고 그 미래에는 당신 너머의 당신도 있었으면,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의 말로 쓰인 이 글을 영원히 읽지 못했을 당신, 이 글이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쓰였다면 더 쉽게 읽어냈을 당신, 눈으로 읽기보다는 손끝이나 귀로 들었어야 할 당신, 서울에 있는 대학의 이름을 달고 나온 이 글이 너무 멀게 느껴졌을 당신, 더는 새로운 이야기를 읽을 힘이 없었던 당신 말이다. 당신들의 얼굴을 하나씩 그리며 지금의 우리가 낡은 집합이 되어 미래의 우리는 여기 없는 당신들을 안아내기를, 그리고 여기 맞은편 혹은 옆에 있는 당신들까지 칭해 내기를 소망한다.


내가 알아낸 그 미래로 가는 방법 겨우 한 가지는, 오늘을 사는 것이다. 자꾸 슬퍼하고 죽고 싶고 뒤돌아보고 가끔은 주저앉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며, 결국 살기로 결정하는 것,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 말이다. 나의 오늘을 끊임없이 넓혀 내일까지 가 보고 너의 오늘, 너와 나의 오늘, 너희의 오늘, 너희와 우리가 만나 만든 새로운 우리의 오늘까지 살아 보는 것. 그리고 매일 조금씩 나아지며 살아가는 것, 축적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 오로지 거기서 다음 날을 맞을 힘도 얻어 보는 것. 그건 마냥 녹록한 일이 아님을 깊숙이 공감하면서도 당신과 당신의 당신들에게 부탁한다. 최선의 잘못들을 써 두고, 애써 궁금해하며 우리 오늘이 된 미래에서 만나자.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늙은 가로수를, 자유로운 개들과 사람들을 상상하겠다. 곤충 이름들을 배워 두겠다. 그렇게 오늘을 살겠다. 여기 놓인 글들이 광을 내며 닳아 있을 날을 기다린다. 내일의 잎사귀는 한 빛깔 더 깊어져 있을 것이다.


편집장 현정 / byulgo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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