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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정체성

[특집 '트랜스젠더'] 편집위원 해진

한국인 학우님들, 안녕하신가요? 혹은 중국인 학우님들, 러시아인, 미국인, 아르헨티나인 학우님들 안녕하신가요? …… XX인 학우님들, 안녕하신가요?


여러분은 스스로가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 XX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시나요? (이하 모두 한국인으로 통일합니다) 한국 국적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 여권이 그를 보장하나요? 하지만 내 주민등록증, 내 신분에 관한 서류가 위조되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요? 그렇다면 혹시 한국인 같은 생김새가 내 정체성을 보장해주나요? 혹은 한국의 영토에 산다는 것이요?[1]


이런 질문들은 너무 어렵네요….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 몸에 한국인이라는 표식, 한국인이라는 단어가 박혀 있지도 않은데 말이예요.


이 글은 성별 정체성, 나아가서는 정체성의 불안정성을 다룹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나요?


성소수자에 대한 개선된 인식, 그러나 트랜스젠더는?


성소수자는 더 이상 우리에게 완전히 유리된 존재가 아니다. 많은 편견 속에서도 영화 〈아가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드라마 〈마인〉, 〈이태원 클라쓰〉에서 볼 수 있뜻 여러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윤희에게〉가 청룡영화상을 수상하는 등[2] 이들은 실제로 대중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한편, 정치권에서도 성소수자 국회의원 후보가 출마하고 성소수자 정책이 논의되기 시작하며 이들 집단은 이전보다 더 많이 조명받고 있다.[3] 실제로 성소수자들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성소수자 정체성을 나타내는 명칭 없이 변태적이라는 뉘앙스를 담은 ‘호모’ 등의 멸칭으로 불려왔으나, 이후 서구 인권 담론의 유입과 각종 시민 단체의 노력을 통해 제대로 된 이름을 얻었고 가시화되었다.[4]


그렇다면 그들 중에서도 트랜스젠더는 어떠한가. 혹시 그들을 떠올렸을 때 동성애자, 양성애자 등 다른 성소수자들보다 익숙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가?[i]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드는가? 혹여라도 있을 그러한 생경함과 불편함이 비단 일부 사람들만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동성애가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분류표(ICD)에서 제외된 것은 1992년이나, 트랜스젠더가 제외된 것은 2018년으로 그 둘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5] 미국정신의학회(APA)에서도 동성애가 완전히 삭제된 것은 1987년이었지만, 트랜스젠더가 장애가 아닌 하나의 상태로 분류된 것은 2013년에 들어서였다.[6] 특정 항목을 질병 분류에서 제외하거나 비장애화하는 결정은 각 학회와 기구를 구성하는 전문가 및 의료기관 종사자의 투표에 의해 이뤄진다. 결국 이러한 결정은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에 관한 학문적 연구의 진전과 더불어 의사 결정자들의 인식 변화까지 함께 요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의 비병리화, 비장애화 결정 사이의 큰 기간차는 트랜스젠더와 그 외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차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며, 우리는 이를 통해 대중의 인식에도 유사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i] 물론 이것이 동성애자, 양성애자는 트랜스젠더가 아님을, 혹은 그 역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트랜스젠더이면서 동성애자, 양성애자일 수 있고 그 역 또한 가능하다. 다만 이 글에서는 논의를 위해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기준으로 트랜스젠더와 다른 여러 성소수자 분류를 구분하였다. 


트랜스젠더는 보다 차별받는다.


실제로 성소수자 전반에 대해 상당한 인식 개선이 있었음에도 트랜스젠더만 유독 혐오 행위를 더 많이 마주한다는 연구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7] 로라 마일스는 다른 성소수자에 비해 트랜스젠더가 훨씬 더 적대적인 사회적 시선을 경험하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법적 보호와 권리 보장 또한 특히 부족하다고 지적한다.[8]

우리나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학생이 시스젠더 성소수자 학생에 비해 신체적 폭력 및 따돌림을 각각 5.6배, 3배 더 많이 경험했다고 응답했다.[9]


한편 같은 설문조사에서 시스젠더 성소수자 학생의 경우에도 응답자의 성별 표현에 따라, 그러니까 외관상 드러나는 성별과 지정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 차별 경험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결과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는 지정 성별 및 성별 규범과 성별 표현 간의 불일치가 성소수자가 겪는 일상적인 차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10] 주의할 것은, 이것이 트랜스젠더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트랜스젠더는 지정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아 외모 등의 성별 표현 또한 지정 성별과 불일치하는 경우가 잦다. 따라서 지정 성별과 성별 표현 간 불일치가 차별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는 사실은 오히려 이들에 대한 혐오나 몰이해, 오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행해질 수 있는지, 또 그들이 겪을 고통이 얼마나 일상적일지를 보다 잘 알려준다.


21세기에 접어들며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개선되었고, 그들의 존재 또한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태도와 인식만은 어쩐지 뒤쳐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 도대체 왜 이럴까.

 

언캐니 밸리: 왜 트랜스젠더는 다른 성소수자보다 더 차별, 더 혐오받을까?

 

‘혐오’란 “국제법에서 인정하는, 보호돼야 할 특성을 실제로 가지거나 혹은 가진 것으로 인식되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격앙되고 불합리한 비난, 적의, 증오의 감정(아티클19, 2015)”을 뜻한다.[11] 혐오는 이처럼 다양한 부정적 감정을 수반하고,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 또한 적대감, 불쾌감, 미움 등의 감정을 수반한다. 이 글에서는 혐오자들이 말하는 이러한 복합적인 부정적 감정, 나아가서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몰이해나 뒤쳐진 인식을 보이는 자들이 트랜스젠더를 보며 가진다하는 소위 ‘이상하다는 느낌’ 등을 설명하고자 한다. (분명히 하건대 이후 나오는 설명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정당화하거나 트랜스젠더 혐오자를 옹호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단지 그를 분석하고자 함이다.)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ii]는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제안한 개념으로, 인간의 형상을 닮았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혹은 인간으로 확정할 수 없는 대상을 통칭한다. 아래 그래프는 어떤 대상이 인간과 닮은 정도에 따라 그 대상을 마주하는 인식자가 느끼는 친밀감 및 익숙함(이하 친밀감)의 수치를 보여준다. 여기서 친밀감의 수치는 일정 수준까지는 대상이 인간을 닮을수록 늘어나지만 그 지점을 넘어가면 급락한다. 이 급락하는 구간이 바로 언캐니 밸리이다.[12] 언캐니 밸리에 위치한 존재를 볼 때 인식자는 인간이라는 개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을 맞닥뜨려 대상이 인간인지 비인간인지 명확히 판단하지 못하게 되며, 이렇게 ‘구분’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는 순간에 다다렀을 때 모종의 불안감과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13] 예컨대 아래 언캐니 밸리의 예시 이미지를 참고하라.


[ii] 언캐니(Uncanny)는 ‘이상한, 묘한’, ‘초자연적인’, ‘으스스한’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는데, 모리 마사히로가 제안한 언캐니 밸리 개념은 주로 ‘불쾌한 골짜기’라 번역된다. 이 글에서는 불쾌감뿐만 아니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느낌, 어딘가 이상한 느낌, 모종의 불안감 등을 모두 포괄하기 위해 불쾌한 골짜기 대신 언캐니 밸리라는 단어를 그대로 쓴다. 때때로 가독성을 위해 ‘언캐니’ 대신 ‘불안, 불쾌’라는 단어를 쓸 때도 있는데, 독자가 이 단어에 대해 앞서 언급한 다양한 뜻 모두를 가졌다고 읽기를 바란다.


〈그림1〉 마사히로 모리의 〈’언캐니 밸리’ 그래프〉

[14] 출처: Masahiro Mori (1970), https://web.archive.org/web/20070302104914/http://www.androidscience.com/theuncannyvalley/proceedings2005/uncannyvalley.html 


그래프 상에서 x축은 어떤 대상의 ‘인간과의 유사성’을 나타낸다. 그 수치는 0%에서 100%까지로, 오른쪽으로 갈수록 그 정도가 크다.  y축은 어떤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친밀감’인데, 위쪽으로 갈수록 그 정도가 크다. 실선으로 표시된 그래프는 ‘정적’인 대상을, 점선으로 표시된 그래프는 ‘동적’인 대상을 나타낸다. 실선으로 표시된 ‘정적’ 대상은 인간과의 유사성이 커질수록 그에게서 느껴지는 친밀감이 점차 상승하다 유사성이 60% 부근일 때 극댓값을 가진다. 이 지점에 ‘동물 인형’이 적혀있다. 인간과의 유사성이 60%을 넘어서면 ‘정적’대상의 친밀감은 점차 하락하다 80% 부근에 이르면 음의 값으로 극솟값을 가진다. 이 지점에 ‘시체’와 '의수'가 적혀있다. 인간과의 유사성이 80% 부근보다 커지면 다시 ‘정적’ 대상의 친밀감은 상승해 그래프는 인간과의 유사성 60-80% 구간에서 마치 골짜기와 같은 모습을 띤다. 이 구간의 그래프 위해 '언캐니밸리'가 적혀 있다. 점선으로 표시된 '동적' 대상 그래프도 '정적' 대상의 것과 그 형태가 유사한데, 다만 친밀감의 극댓값과 극솟값의 편차가 더 크다. 동적대상에 속하는 '공업용 로봇'은 '동적' 대상 그래프 상에서 친밀감 수치가 낮은 유사성 0-10% 부근에, '휴머노이드 로봇'은 유사성의 증가에 따라 친밀감의 수치가 점점 높아지는 구간의 일부인 유사성 50% 부근에 적혀있다. 유사성의 증가에 따라 친밀감의 수치가 오히려 낮아지다, 그래프의 극소가 위치하는 유사성 80% 부근에는 '좀비'와 '의수'가 적혀있다. 유사성이 약 80%보다 크면 친밀감의 수치는 점점 높아지는데, 이 구간에는 순서대로 일본 전통 인형극에 쓰이는 '분라쿠 인형'과 '건강한 인간'이 적혀있다. 

〈그림2〉 레인 래빗의 〈언캐니 밸리: 휴고〉

출처: 플리커, https://flic.kr/p/8vGSbj 

그림 중앙에는 인형의 머리가 어떤 막대에 꽂혀 떠 있다. 인형의 머리는 구불구불한 갈색의 머리카락으로, 길이는 귀 바로 밑까지 온다. 인형의 눈썹과 속눈썹은 펜으로 그린 듯 진하며, 초점이 맞지 않는 인형의 두 눈은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하다. 인형의 입꼬리는 조금 올라가 미묘한 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인다. 인형의 두 볼은 꽤 붉다. 전체적으로 어딘가 기괴한 느낌이 든다. 


이제 언캐니 밸리 이론에서 설명하는 불쾌를 트랜스젠더에게 느끼는 그것과 함께 생각해보자. 여기, 자신의 지정 성별이 그의 성별 표현과 유리되어 ‘보이는’ 누군가가 있다. 이때 그를 마주하는 사람들은 그의 성별을 자신이 미리 알고 있는, 바로 그 지정 성별로 쉬이 귀결지을 수 없다. 언캐니 밸리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진 순간 대상을 응시하는 자신의 판단이 유보 상태에 놓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상황에서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분법적 성별 관념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상대의 지정 성별에 대한 판단을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령, 상대의 지정 성별을 여성으로 알고 있지만 그의 성별 표현이 자신이 떠올리는 지정 성별 여성의 그것과 다르다면 성별 이분법에 익숙한 인식자로서는 그의 지정 성별을 명확히 판단하는 것이 힘들 것이다. 이때 사람들이 응시하는 상대와 상대의 성별은 그들의 인식 체계 안에서 일관되게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A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때 A는 세상과 자신 외부의 대상들을 인식하는 ‘인식 주체’로 상정된 누군가이다. 지금 A는 자신 앞의 B를 보고 있다. 그런데 어쩐지 B의 성별 표현이 A가 미리 알고 있던 B의 지정 성별과 다르다. 혹은 B의 성별 표현이 여자인지 남자이니 명확히 할 수가 없다. 이때 A가 바라보는 B는 남성과 남성 아닌 것, 남성과 여성 간의 경계가 흐려진 바로 그 지점에 서있는 것이다. 마치 언캐니 밸리에 다다른 것처럼. 이렇게 흐려진 구분 속에서, ‘유사’ 언캐니 밸리 속에서, A는 B에 대해 불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만약 그가 (이후 설명되는) ‘인식론적’ 편의를 위해서 남성과 여성의 경계 및 B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그렇게 그는 혐오자가 된다.


이것은 크리스테바의 비체(abject) 개념과 연관된다. 비체는 존재하지만 언어 구조 속에서 의미를 획득해 명확히 가시화되지 않는, 가시화되지 못하는 것들을 일컫는다. 이에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언어로 칭할 수 없는 것, 나아가 공동체 내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문재인 대통령에 의하면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것들 또한 같은 선상에 있다)[15] 이들은 현존하는 인식 체계 아래서 제대로 포착될 수 없고, 따라서 개념 및 경계의 모호성과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만약 개념과 경계가 진정으로 본질적이고 안정적이라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를 통해 설명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비체가 우리에게 불쾌감이나 역겨움을 유발한다고 주장한다.[iii]


[iii] 마사히로 모리의 언캐리 밸리 개념 이전에 프로이트의 언캐니(Unheimlich) 개념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사실 크리스테바의 비체는 이 둘 중 전자보다는 후자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 프로이트의 언캐니 개념은 마사히로 모리의 것처럼 사람과 로봇, 즉 생명인 것과 아닌 것의 경계에 놓인 대상에 대한 불쾌감을 다루기 보다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언캐니 개념과 언캐니함의 발생에 대해 다룬다.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언캐니’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있어서는 주로 ‘낯선 두려움’으로 번역되는데(이하 ‘언캐니함’), 프로이트는 이 ‘언캐니함’이 단순히 대상이 낯설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친밀한 동시에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발생한다고 말한다. 즉, ‘언캐니함’은 그러한 대상을 통해 ‘친밀한 나’ 안에서 ‘낯섦, 타자, 이질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유발되는 것이며, 바로 이때 나와 외부, 이분법적 경계, 주체와 대상 등의 체계가 무너진다. 여기서 주체와 대상은 단순히 나와 나 아닌 것, 움직일 수 있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비생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념· 구분· 경계의 내부와 외부를 뜻하기도 한다. 비체 개념은 바로 이 내외부의 경계게 있어 분명하게 의미화 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부재하는 것도 아닌 대상을 칭한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비체가 인식 주체의 안정된 정체성과 그의 인식 체계에 위협을 가하며, 이때 그가 불쾌, 공포감, 혐오감 등을 느낀다 말한다. 


경계 짓고, 대상을 명확히 구분해내려는 시도는 왜 발생하는가?  


이것은 아마도 A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에너지를 줄이고 싶기 때문이겠다. 인식론적 부담을 덜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쟁 상황에서 적군을 순수한 악으로, 자신을 순수한 선이라 상정하면 그 적군이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 이유와 맥락이 있을 거라는 점 등 그가 순수한 악이 아니라 암시하는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상대가 복잡한 내막을 가진 사람임을 철저히 무시한다면 적군을 공격하는 행위는 훨씬 단순해진다. 상대가 순수 악이라면 나의 행위에 대해서, 그리고 상대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반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순수한 악인 상대와의 대립 속에서 순수 선인 ‘나’ 또한 명확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선과 악의 경계가 절대 모호하지 않다는 생각, 곧 그 둘을 분리해내는 사고 아래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나의 정체성을 굳힐 수 있는 동시에 세상살이가, 삶이 편해진다.[16]


“특정한 사람인 한 인간의 살해가 아니라 어떤 계급에 속한 구성원의 살해였다. 나는 이것이 린치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어떤 흑인을 -이 흑인을- 보지 않는다. 나는 하나의 검둥이를 본다. 혹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흑인이 존재한다면 서 있을 그 공간에 내가 보고 싶은 것이나 보아야 할 것을 투사한다(데릭 젠슨, 2004: 160-161).”[17]


이것을 상대의 지정 성별과 일관된 성별 표현을 찾으려는 A의 예시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A는 자신의 인식 체계 아래서 안정적으로 상대의 성별을 결정짓고 싶어한다. 그것이 편하며, 또 삶의 평화를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외부 대상의 경계를 구획 짓는 활동은 곧 ‘나’의 경계와도 관련되어 있다. ‘나’에 대한 인식도 결국은 나의 인식 체계 아래서 이뤄지는 활동이며, ‘나’ 또한 일종의 구분, 경계 짓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상대의 성별 정체성을 고정시키려는 행위는 정체성이 고정될 수 있다는 어떤 실체라는 것을 전제하며, 이는 동시에 ‘나’의 정체성 또한 고정할 수 있게 해준다. A는 이 전제를 수용한 상태이므로, 여기서도 ‘나’의 정체성 굳히기의 시도가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상대의 정체성이 불안정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의 정체성 또한 불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왜 성별에 있어 상대의 성별 표현을 통해 하나의 지정 성별을 유추하려 하고, 왜 지정 성별에 부합하는 일관된 성별 표현을 찾고자 하는가? 


지금까지 기존의 인식 체계 안에서 잘 포착되지 않는 대상을 볼 때 느끼는 불쾌감에 관해 살펴보았다. 또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모든 것을 기존의 인식 체계 아래에 정합적으로 끼워 넣으려는 노력이 생각을 더 편하게 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것 또한 알아보았다. 그런데 왜 특히 성별에 대한 판단에 관해서는 그것의 기준이 ‘지정 성별’이 될까? 즉, 왜 상대의 성별 표현을 통해 하나의 지정 성별을 찾으려 하고, 왜 지정 성별 아래에서 일관된 성별 표현을 기대하는가?


그것은 어떤 사람이 물질적으로 ‘실재’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고, 그 신체가 지정 성별을 그의 ‘진짜’ 성별로서 결정한다는 생각이 통념으로 정착했기 때문이겠다.[iv]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A는 상대가 그의 ‘진짜’ 성별 아래 통일된 성별 표현을 할 것이라 (그리고 그 역 또한) 기대하고, 만약 이가 어긋났을 때 앞서 말한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만약 어떤 이가 자신의 ‘진짜’ 성별인 지정 성별에서 벗어나 '부유하는', '허구의' 성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거나 혹은 그에 따른 성별 표현을 하면 A는 그가 물질적으로 실재하는 성별을 무시하고 자신의 허구적 인식, 선택을 통해 성별 정체성을 구성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iv] 지정 성별이 생물학과 해부학의 영역인 '물질적으로 실재'하는 신체를 근거로 판단된다고 여겨지는 것인데, 이에 지정 성별은 여성,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의 개념과 동일하다고 간주된다. 이 글에서는 독자의 이해를 위해 내용에 맞게 지정 성별과 ‘생물학적’ 성별을 때로는 병기, 때로는 분리해 표기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앞서 말한 트랜스젠더와 다른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그로 인한 차별의 정도차이가 설명된다. 성적 지향에 있어서 소수자인 경우에는 (예를 들어 동성애나 양성애) 그것이 신체라는 물질적 기반에 부착되어 있지 않기에, A는 상대의 성적 지향이 ‘성애적 문제’로서 그에게 덧붙여진 속성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는 그가 신체라는 물질적 기반에 이미 ‘실재’하는 ‘진짜’ 성별에 대해 혼란을 경험하므로, A가 본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체성 인식은 일종의 비정상인 것이다. 즉, A에게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체성은 그가 선택해서 형성한 것, 나아가서는 오류로 인한 선택이며, 결코 ‘진짜’인 지정 성별에 가닿을 수 없는 ‘가짜’ 성별이다.


이는 미디어가 한국 최초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트랜스젠더 연예인인 하리수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미디어 속의 그는 언제나 '트랜서젠더' 및 '여자'와 관련된 키워드와 함께 등장하였으며,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자'와 같은 말로 소위 '여성성'이 강조된 채 묘사되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미디어가 하리수의 여성성을 부각할수록 그가 여성임은 끊임없이 부정되고 있었다. ‘진짜’ 여성이 아닌 하리수가 여성의 무언가를 경험하고, ‘진짜’ 여자보다 더 여성적인 외양을 가졌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이에 오히려 그가 ‘가짜’ 여자라는 생각이 은밀하게 드러났던 것이다.[18] 다음은 2001년 〈박상원의 아름다운 얼굴 170회〉에서 하리수와 진행한 인터뷰 질문 중 하나이다. “처음 여자 옷을 입었을 때의 느낌은(MBC, 2001.11.23.)?”


이처럼 만약 사람들이 사회적 통념 아래 지정 성별을 ‘진짜’의 것이라 인식하고 그것 아래에서 일관된 성별 표현을 찾는다면. 그리고 이 지정 성별이 성별 정체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만약 이러한 일련의 생각에서 벗어나거나, 특히 이분법적 성별 체계 아래 자신의 지정 성별에 부합하지 않는 성별 표현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A가 불쾌감을 느끼며 그를 혐오하고 차별한다면.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우리는 다음을 주장해야 한다.


첫째, 지정 성별, 혹은 그것의 기반으로 여겨지는 생물학적 기반은 그것과 동일한 성별 정체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둘째, 생물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되는 지정 성별은 ‘진짜’ 성별이 아니다.


지정 성별, 혹은 지정 성별의 기반으로 여겨지는 생물학적 기반은 특정한 성별 정체성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글의 첫머리에서 제기되었던 질문을 돌아보자. 한국 국적이 나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정시켜 주는가? 그게 아니라면, 나는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나 어느 정도는 서양인인 한국인인가? 우스꽝스럽지만, 이를테면 내가 한국에서 15년, 미국에서 5년 살았다면 나는 75% 한국인, 25% 미국인인가? 여기에 명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확실한 대답이 어려운 이유, 이것은 아마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외모, 국적, 성장한 환경, 언어 등의 복합적인 요인들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출생 후 해외에 입양된 이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사이드 바이 사이드 프로젝트〉(Side by Side Project)[19] 출연자들의 말에서 이를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한 인터뷰이는 자신이 한국에서, 한국인 부모 아래 태어났으나 입양 후 호주 뉴캐슬에서 생활하며 한국인이 아닌 호주인으로서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말하는 한편, 또 다른 인터뷰이는 입양 당시 백인이 대부분이었던 밀워키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무엇으로도 정체화 할 수 없었다 얘기하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기억, 자신의 외모, 생물학적 부모 등등의 이유로 국적은 미국일지언정 자신을 한국인이자 흑인으로 정체화한 사람도 있다.[20] 만약 인간의 유전자나 신체에 ‘한국인임’이 태생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면 외국으로 입양간 이들은 사실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니고 있는 호주인, 미국인 등의 정체성은 모두 가짜라 말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외모, 혈통, 국적, 성장한 문화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강조하건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속성이 특정한 정체성(이 경우에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성별 정체성에 대해서도 유사한 추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또한 생물학 및 해부학적 속성과 그에 기반했다고 여겨지는 지정 성별이 특정한 성별 정체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성이 성별을 지정한다는 생각은 성별에 관한 본질주의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며, 성별 정체성이 하나의 자아 인식임을 생각했을 때 우리는 오히려 그것이 생물학적 속성을 비롯한 다양한 요소나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거친다고 보아야 한다.[21] 물론, 복합적인 요인들이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의 성별 정체성 인식을 형성하는지 그 구체적 과정을 알기란 어렵다. 하지만 단 하나의 요인, 특히 생물학적 기반이 특정한 정체성으로 귀결되지 않음은 명백하다.[22]


이것이 물질적 기반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앞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동북아시아에 기원을 두었다고 여겨지는 유전자가 있음을, 그리고 소위 ‘아시안적 외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생물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되는 지정 성별은 과연 ‘진짜’인가?

 

하지만 생물학, 해부학적 증거에 근거한 물질적 기반의 실재를 완전히 긍정하고자 하는 것 또한 아니다. 만약 생물학적 기반과, 그것에 기반했다고 여겨지는 지정 성별을 완전히 인정하게 되면, 그것이 ‘진짜’ 성별 정체성이며, 트랜스젠더는 ‘가짜’ 성별 정체성을 가졌다는 통념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물질적 기반에 부착된 지정 성별, 곧 ‘생물학적’ 성별의 실재를 인정해버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어떤 관념이 '실재’한다는 믿음을 부정하자는, 최소한 그러한 관념에 기대어 어떤 대상의 진짜와 가짜임을 논하지 말자는 제언을 던지며, 이와 함께 ‘사과’라는 단어와 물질적인 과일 사과의 예시를 들고자 한다. 사과라는 단어, 이를 i라 하자. 그리고 어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과일 사과, 이를 ii라 하자. 우리는 i를 말하면서 ii를 가리키고자 하며, 거꾸로 ii에 대해서도 일상적으로 그를 i라 칭한다.


이것은 언어학에서의 기표와 기의 개념에 해당한다. 기표란 가리키는 것이자 상징이며 기의란 가리켜지는 것, 곧 상징되는 바이다. 사과의 예시를 여기에 적용해본다면 i는 기표이고 ii는 기의이다.


우리는 i에 대해서 그것이 ii라는 물질적 실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며, 마찬가지로 유니콘에 대해서는 유니콘이 물질적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것이 ‘있지 않다’고 혹은 ‘가짜’라고 생각한다.

i를 통해 ii를 잘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기표와 기의의 부착이 잘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i를 말하거나 들을 때 찾으려 하는 것이 i의 의미라는 점이다. 이때 우리는 i의 의미가 ii라 생각하면서 i, i의 의미, ii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동시에 i가 '진짜', '실재하는' 사과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를 생물학적 증거, 그리고 그에 기반했다고 여겨지는 지정 성별, 곧 ‘생물학적’ 성별에 대해서도 적용해볼 수 있다. 즉, 기표인 i는 생물학적 성별에 대응하고, 기의인 ii는 생물학적 증거에 대응한다. 이에 따르면 ‘생물학적’ 성별은 i가 진짜인 것과 마찬가지로 ‘진짜’인 성별이며, 이것과 유리된 성별 정체성은 마치 가짜라는 생각이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생물학적’ 성별은 가시적인 물질적 실체를 가졌다고 생각되기에, i가 ii와 잘 부착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성별’(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어)은 각 성별에 맞는 신체적 특징, 특히 성기 등에 부착된다. 이를 통해 기표의 진실성 및 기표가 가리키는 기의는 정말 당연하고 명백한 것처럼 보이게 되며, 이는 동시에 ‘생물학적’ 성별과 생물학적 증거의 연결 또한 강화시킨다. 하지만, 다음을 생각해보자.


첫째, 생물학적 증거에는 남성,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이 새겨져 있지 않다. 따라서 아무리 우리가 남성, 여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그것들로 분류될 법한 생물학적 증거 전반을 칭하려 한다 해도 언제나 그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엇나갈 수 있다.


둘째, 우리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어, 즉 기표를 얘기할 때 찾으려고 하는 것이 과연 물질적인 것인지를 되돌아 봐야한다. 사실 원본, 진짜로 여겨지는 ‘생물학적’ 성별을 떠올리면서도 우리는 구체적인 누군가의 몸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형상을 지닌 관념적인 몸을 떠올린다. 예컨대, 남성의 물질적 신체를 가리키려 할 때도 우리는 정작 특정한 형태의 어깨, 골반, 신장, 근육의 형상을 떠올린다. 여성인 사람이 남성 호르몬 수치가 높아졌을 때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아 소위 ‘생물학적’ 여성으로 복귀하려는 의료 행위에서도 이를 또 한 번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어떤 의료적 치료의 목적이 있는 경우는 배제한다) 우리는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을 말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남성과 여성의 형상을 언제나 함께, 혹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짜’, ‘원본’이라 생각하는 생물학적 성별 또한 생물학적 증거와 탄탄히 연결되어 있는 듯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말은 세상을 담을 수 없다.

 

너는 나의 애인. 저것은 사과, 저것은 하늘 아닌 구름. 나는 다른 어느 것도 아닌 한국인 남성…. 이렇듯 외부 대상을 명확히 구분하고 자신 또한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상정해 살아가면 스스로 편안할 수 있다. 이것은 ‘저쪽의 적’과의 분리를 통해 생각의 부담을 덜어내려는 시도, 그리고 ‘저쪽의 나 아닌 다른 것’과의 구분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굳히려는 시도와 맥을 함께 한다. 하나의 체계 아래에서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딱딱 경계 지어지며 나눠 떨어지는 세계는 얼마나 고요하고 깔끔한가. 더군다나 내가 사과라 부르는 바로 저것이 조금은 딱딱하며, 빨갛고, 둥그런 형태로, 실제로 존재하는데 어떻게 이 물리적 실재가 진짜가 아니겠는가? 고요하며 깔끔한 데다 ‘진짜’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 생물학적 성별 또한 신체와 성기라는 물리적 실재를 바탕으로 ‘진짜’로 존재하는 것, 깔끔히 분류될 수 있는 것, 나아가 한 사람의 성별 정체성을 명확히 지시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 너무나 평화롭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정체성은 특정한 물질적 실체와 직결되지 않고, 나아가 물질적 실체라 일컫어지는 그것 또한 ‘완전하게 실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언어/기표를 통해 가리키고자 하는 비언어/기의의 부착이 단단하지 않다는 말과 같다.


인식론적 평화를 위해 단단한 정체성과 ‘진짜’인 정체성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왔으나, 이제 한 정체성의 명확한 경계, 그리고 원본과 가짜의 구분은 지워져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생물학적 근거를 가진다고 생각되는 성별 개념 또한 여태껏 그 효용과 경제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인정되었으며 일정한 타당성을 가졌다 여겨졌으나 사실은 그 개념이 지시하는 바, 그리고 그 개념의 경계가 흐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트랜스젠더도 이러한 인정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니, 당연히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별 정체성이 생물학적 증거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소에 의해 형성됨을, 동시에 흔히 생물학적 기반에 의해 ‘진짜’ 성별이라 생각되는 ‘생물학적’ 성별 또한 실은 불안정한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사과'라는 단어와 실존하는 빨간 열매가 가지는 관계가, 또한 우리의 신체와 정체성 사이의 관계가, 나아가서는 우리의 정체성 자체가 사실은 불안정할 수도 있을 가능성을 수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단단한 땅 위를 걷는 삶, 나의 피부로 둘러싸인 안정된 나를 버리고 기꺼이 불안정의 세계로 뛰어들라. 현존하는 모든 인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느슨하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타자와 세상을 보라. 우리, 그리고 우리의 인식이 가진 불안정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록 고요하고 깔끔하며 평화롭지 않을지언정 이전의 딱딱하고 무채색이었던 세계 속에서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를테면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몸짓. 우리가 이 느슨함과 불안정함을 껴안는다면,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 그들의 존재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자연스럽고도 선명히 다가올 것이다.


말은 정체성을 담을 수 없고, 나아가서는 세상을 담을 수 없다. 세상은 우리가 ‘세상’이라 부르는 것보다 훨씬 크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사실은 무엇보다 우선하여,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가 이 문단을 증명한다는 말로 글을 마친다.



편집위원 해진 / jnnnterm@gmail.com

 




        Q. 트랜스젠더의 성별재지정수술[23]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성별재지정수술 혹은 성확정수술은 트랜스젠더의 생물학적 신체 혹은 특징을 그의 성별 정체성에 맞게 변형하는 것이다. 이 글에 따른다면 이것을 단순히 '생물학적 요소들이 성별 정체성을 지정하는데, 후자가 전자와 다르기에 전자를 변형시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트랜스젠더의 현실적인 문제, 혹은 디스포리아를 해결해 정신적 안정을 도모하거나, 트랜스젠더가 원하는 신체 특징을 구현하는 수단 등으로 이해해야 한다.



Q.정체성의 불안정성을 받아들이면 트랜스젠더가 스스로 확정한 정체성을 인정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그러니까, 정체성의 ‘허구성’이 강조된다면 트랜스젠더가 마치 허상의 것에 매달리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 정체성은 불안정한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을 통해 성별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 그리고 트랜스젠더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코기토적 나, 즉 이성적 사고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순수한 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젠더, 인종 및 수많은 사회· 경제적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포스트 모더니즘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하는 바로, 나는 ‘나’가 아니라 언제나 ‘젠더화된 나’로 존재한다.[24] 좀 더 급진적으로는, 젠더화된 내가 아니면 우리는 인간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소위 ‘암컷, 수컷’인 개를 두고 여성이나 남성이라 칭하지 않는다.[25]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체성은 불안정한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성별 정체성을 가진 '젠더화된 나'로 존재하기에, 그것이 아무리 불안정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성별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꼭 정신분석학적 측면이 아닌 일상적 생활에서도 이해가능한 문제이다.

트랜스젠더 또한 정체성이 얼마나 불안정한가와는 별개로 한 인간으로서 언제나 ‘젠더화된 나’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는 그저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지정 성별과 일치하지 않는 것뿐이다.  



[1] 이는 『한국의 정체성』(탁석산, 2000) 28-31쪽의 내용과 질문을 재구성한 것이다.

[2] ‘윤희에게’ 임대형, 묵묵히 전하는 감독상 수상 소감 (2021.02.09.). SBS Entertainment.

[3] 성소수자 정치인 및 정책에 관해서는 〈한겨레〉의 “교사· 정치인· 퀴어활동가 … 김기홍의 ‘보이기 위한 싸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기자협회〉의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 진보신당 최현숙씨”를 참고하였다. 

[4] 서동진 (2005). 66-87.

[5] WHO,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는 정상적인 삶의 형태로 규정 (2021.04.12.). 미디어 오늘.

[6] 미국정신의학회는 트랜스젠더를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에서 제외하지는 않았으나, DSM 6판 개정 전에 쓰였던 ‘성주체성 장애’라는 명칭 대신 장애 아닌 ‘상태’를 지칭하는 성별 위화감(젠더 디스포리아)를 채택하였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낙인과 차별 종식을 위해 트랜스젠더 항목을 아예 DSM에서 제외하자는 의견 또한 있다. [출처: 같은 기사, 미국정신의학회. 트렌스젠더, 성별 정체성과 성별 표현 [팜플렛]. Retrieved from https://www.apa.org/topics/lgbtq/transgender.]

[7] 로라 마일스 (2018).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 21.

[8] 같은 책. 48.

[9] 국가인권위원회 (2014). 28-30.

[10] 같은 글.

[11] 아티클19(Article19)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국제인권단체이다.

[12] Masahiro Mori (1970). 33-35.

[13] Zoe Anne Laks (2015). 154-168.

[14] 논문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에 나온 그래프를 글쓴이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15] 문재인 대통령 “차별에 반대하나, 동성혼 합법화는 사회적 합의 필요”. (2019.11.19.). 비마이너.

[16] 중국인을 혐오하면서 그들과 구분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발견하거나, 발견하려 하는 등 타자로부터 하나의 정치한 집단을 결속하려는 움직임이 이것을 통해 설명되기도 한다. 각주iii를 읽으면 이해를 도울 수 있다.

[17] 데릭 젠슨 (2004). 160-161.

[18] 이진 (2013). 127-135.

[19] 자세한 내용으로는 〈사이드 바이 사이드 프로젝트〉 웹사이트 https://sidebysideproject.com/about의 소개 내용을 참고하라.

[20] 이는 〈사이드 바이 사이드 프로젝트〉의 출연자 중 aus8787, chi6061, ny3763 출연자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21] 로라 마일스 (2018). 44.

[22] 같은 책. 164-165.

[23] 성별재지정수술이라는 용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본 글 앞의 "‘100% 인간’에 닿기 위한 안내서"를 참고하라.

[24] ‘젠더화된 나’에 대한 설명은 김은주의 강의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함께 읽기〉(2019, 아트앤스터디)와 『젠더 트러블』의 293-326쪽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25] 같은 강의, 같은 책.



참고문헌

단행본

데릭 젠슨 (2004). 거짓된 진실- 계급, 인종, 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 이현정. 아고라.

로라 마일스 외 (2018).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 정진희. 책갈피.

주디스 버틀러 (2008). 젠더 트러블. 조현준. 문학동네.

탁석산 (2000). 한국의 정체성. 책이음.


논문 및 자료집

서동진 (2005). 인권, 시민권, 그리고 섹슈얼리티. 경제와 사회. 통권(1), 66087.

이진 (2013). 성소수자를 향한 한국 주류 미디어의 시선-1990년부터 2012년까지의 미디어 재현을 중심으로-(석사학위논문,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국가인권위원회 (2014).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 조사.

Masahiro Mori (1970). The Uncanny Valley. Energy, 7(4), 33-35.

Zoe Anne Lask (2015). Derelict Dolls and strange spaces: the horror of the uncanny valley in the films of Roman Polanski. Studies in Eastern European Cinema, 6(2), 154-168.


기사 및 온라인 자료

강혜민 (2019.11.19.). 문재인 대통령 "차별에 반대하나, 동성혼 합법화는 사회적 합의 필요". (2019. 11. 19.). 비마이너. Retrieved from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4060 

고승우 (2021.04.12.). WHO,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는 정상적인 삶의 형태로 규정. 미디어 오늘. Retrieved from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2893 

김예리 외 (2020.10.11.). TV가 외면한 목소리 유튜브에 울려 퍼지다. 미디어 오늘. Retrieved from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9719 

임재우 (2021.02.26.). 교사· 정치인· 퀴어활동가… 김기홍의 ‘보이기 위한 싸움’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 Retrieved from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984633.html 

장우성 (2008.03.27.).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 진보신당 최현숙씨. 한국기자협회. Retreived from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17145 

김은주 (2019).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함께 읽기〉 [철학 강의]. Retrieved from http://www.artnstudy.com/KOREALIB/LectureL/Lecture.asp?M.enuCode=SEARCH&LectureIdx=ejkim003&Apage=1

아티클19 (2015). ‘혐오표현’ 해설 [자료집]. 김대엽· 김주민. Retrieved from https://hrc.snu.ac.kr/board/academic_material/view/1731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2014). Transgender, Gender Identity and Gender Expression [온라인 팜플렛]. Retrieved from https://www.apa.org/topics/lgbtq/transgender

Freud, Sigmund (1919). The “Uncanny”. (MIT edu., Trans.) Retrieved from https://web.mit.edu/allanmc/www/freud1.pdf


영상자료

‘윤희에게’ 임대형, 묵묵히 전하는 감독상 수상 소감 (2021.02.09.). 접속일 2021.06.06. SBS Entertainment. Retrieved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YDGyQIjSfPw

Morey, Glenn (2018). Side by Side Project. Retrieved from https://sidebysideproj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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