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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름의 노동자

[특집 '노동'] 편집위원 다연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직장에 다녔다. 어느 순간 엄마가 집을 나서지 않는 날은 하루하루 늘었고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일을 관두었다고 갑작스레 내게 말했다. 마치 오늘 저녁 메뉴를 말하는 것처럼 툭. 두려운 마음을 감추려 당신은 그렇게 무심한 말투였던가.


그 어린 엄마를 잠시 떠올려본다. 직장을 다닐 때에도, 다니지 않을 때에도 항상 무언가를 쓸고 닦고 치우고 있던 엄마의 모습. 그 당시의 나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엄마가 소위 말하는 ‘경단녀’가 된 후에도, 나는 늘 당신의 직업을 ‘주부’ 대신 ‘과외 선생님’이라고 적어냈으며 그때를 떠올리면 아주 속상해진다. 학년이 점점 올라가니 무슨 과목을 가르치시느냐 친절하게 물어보는 담임 선생님도 더 이상 없었지만 자기소개서 속 나는 항상 직업 있는 여성의 딸이었다. 나는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가장 순수했어야 할 그때의 나조차도 어쩌면 세상과 똑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주부는 번듯한 직업도 버젓한 노동도 아니라는 건강하지 못한 편견 말이다.


노동이란 과연 무엇일까, 오래 생각했지만 결국 내게 가장 아름답고 애틋한 노동자의 이름은 엄마였다. 멀고도 가까운 미래에 내가 걸어갈 수도 있는 길이었다. 문득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세 여성이 떠올랐다. 살림과 육아를 책임지며 일평생 엄마로서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세 엄마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놀아? 내가? 나 안 놀았어. 돌아서면 밥 차리고, 돌아서면 청소하고 끝이 없어. 그게 살림이야. 니네는 그게 스펙이 안 된다는 데 왜 안 돼? 인내, 희생, 배려 다 배웠고 일이 얼마나 간절한지도 배웠는데.”[1]


인내, 희생, 배려... 언젠가 이렇게 중얼거리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경력도 월급도 없지만, 엄마는 태어난 생명의 이정표가 되어 세상에 보이지 않는 않지만 그 자체로 존엄한 노동을 이어나간다. ‘엄마라는 단어와 노동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냐’는 나의 질문에, 실타래 풀어지듯 술술 나오는 이들의 이야기와 공감의 몸짓은 우문에 현답이었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은 어느 때보다도 말하고 싶어하는 듯했으며, 그 속에서 나는 ‘진짜’ 노동자를 본 것만 같았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2]

인터뷰를 위해 나와 엄마(경원)는 이모(희원)와 외숙모(은희)를 집으로 초대했다.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만나는 이들이기에 그리 쑥스러운 만남은 아니었지만, 인터뷰 초반에는 우리 모두 몇 번의 멋쩍은 웃음을 견뎌내야 했다. 허나 본격적으로 녹음을 시작하자 꽤 진지한 기색이 된 세 엄마들은 그렇게 곧바로 ‘노동’에 대한 대화를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 30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가사노동의 최전방에서 고군분투한 전문가지만, 직장 경험이 있는 엄마나 외숙모와는 달리 이모는 스물셋의 어린 나이에 결혼해 전업주부로서 일평생을 보냈다.


희원: 가끔 내 친구들이 이런 말 해. 우리가 보기에 너는 30년 동안 엄마 노릇하면서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주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여기(팔목)가 아작이 났고, 그러니까 팔 다 나을 때까지 네 남편한테 밥 좀 얻어먹어도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필요 없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긴 한데. (웃음)


이모의 팔목엔 뼈 대신 철심이 박혀 있다. 두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이 더디어 음료수 뚜껑조차 잘 열지 못하는 이모는, 이제껏 그토록 힘들게 살림을 했는데도 집에서 ‘논다’는 생각에 자꾸만 작아진다고 했다.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만 같아 두렵다고 이모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희원: 몇십 년 동안 열심히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웠는데도 이렇게 아픈 몸뚱아리 하나밖에 안 남아서 슬픈 거야. 회사를 다니면 월급은 받잖아. 근데 우리는 없어. 주방문 닫는 시간도 없어, 솔직히 말해서. 퇴근 시간도 없고. 출근 시간도 없고.

경원: 정년도 없고.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도 못해. 집안일은 진짜 완전한 무임금 노동이잖아. 물론 어떤 대가를 바라는 건 절대 아니야. 그렇지만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누가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나중에 어쩔 수 없는 허무함이 오는 거지.

은희: 근데 집안일이 돈으로 따지면 진짜 어마어마하다는 말 어디서 들은 적 있어. 실제로 이혼 재산분할도 가사노동이랑 육아노동 기여도를 각각 계산해서 청구한다고 하던데. 


외숙모의 말처럼 무급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지표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무급 가사노동은 한 해 500조에 달하는 경제적 가치를 지닌다. 지난 6월, 통계청은 「2019년 가계생산 위성계정(이후 무급 가사노동가치 평가)」를 발표했다. 이는 식사 준비, 의류관리, 청소 및 정리, 반려동물 및 식물 돌봄, 가족 돌봄 등에 투입되는 가사노동 시간을 화폐가치로 평가한 결과물로, 2019년 가사노동가치는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25%를 차지했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의 가치가 우리나라 전체 경제규모의 4분의 1에 이르는 것이다.


결국 식탁을 차렸던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빵 굽는 이’가 아닌 아주 보통의 아내나 어머니들이었다.[3] 유구한 가부장제의 역사 하에서 ‘사회’에서 돈을 버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가정에 머물며 가사노동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들의 가사와 돌봄은 오랜 세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설거지, 세탁, 화장실 청소, 기저귀 갈기 등의 집안일이 창조성도 필요 없고, 명예도 돈도 되지 않으며, 일생을 바쳐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육체노동이라는 전근대적 인식은 현재에조차 만연해 있다.


시간이 지나 산업화로 인해 노동환경은 급격히 변화했고 그로 인한 돌봄의 공백은 여성의 가사와 돌봄을 임금노동의 영역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마들은 치열한 ‘노동’으로 집안을 살핀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여성의 노동을 당연시 여기는 구시대적 사고는 우리 사회 곳곳에 은밀히 존재하며 이들의 노동을 소외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세 엄마 역시 그런 사고로 인한 벽을 느낀 적이 있는지 궁금해 나는 곧바로 다음 질문을 이어 나갔다.


다연: 그럼 엄마로, 주부로 생활하면서 주변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특별히 억울하고 화가 났던 순간들이 있어?

희원: 음…시댁 얘기도 우리 다 할 말 많지. (일동 웃음) 우리 세대가 사실 낀 세대야. 우리 나이, 그러니까 지금 중년인 여자들 대부분에게는 시댁도 집안일의 한 부분이었거든. 시부모님한테도 잘해야 되고, 제사하면 쫓아가서 음식 해야 되고. 남자들은 마루에서 놀고 있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며느리를 보면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세대. 지금 세대는 지원(딸)이 말만 들어봐도 시댁에 대한 부담이 많이 없어진 것 같긴 해. 그게 당연한거지. 며느리는 사실 손님이잖아. 그냥 내 아들이랑 결혼한 사람이지, 우리 집에 일을 하려고 들어온 존재가 아니거든.

은희: 근데 우리 부모들은 약간 그렇게 생각을 하지.

경원: 외숙모(은희)는 (시댁하고) 7년을 같이 살았으니까 더 했지, 뭐. (너네) 이모(희원)도 3년 가까이 살았어. 나도 2년 정도 있었고. 그러고 보니까 우리 셋 다 똑같네.

희원: 나는 같이 살고 이런 걸 떠나서, 명절이 다가오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어. 전 부쳐 가야 되는 거, 잡채 같은 거 해 가야 되는 거. 이건 정말 당연한 거고, 남자는 손도 까딱 안 하고 진짜 상에 있는 반찬 하나 안 갖고 와. 하다못해 빈 그릇 하나 안 옮겨. 그럼 우리는 그걸 몇 번이고 쟁반으로 나르고, 혼자 20인분 설거지를 했거든. 그걸 점심 저녁 내내 했지. 어쩌다 한번 남자가 부엌에 오기만 하면 남자인데 왜 주방에 부르냐고 하고, 남자는 발도 들이지 말라고 하고.

은희: 나는 시댁뿐만 아니라, 그냥 가사노동 자체를 당연시하는 사람이 너무 싫어. 가끔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하는 사람들 있잖아. 하다못해 일부 영화, 드라마 같은 거 볼 때도 화가 나. 집안일이 그렇게 당연한 거라면 빨래해주고, 방 청소해주고, 회사 갔다 오면 밥은 왜 해 줘. 집에서 살림하고 육아하는 거나, 밖에 나가서 돈을 버는 거나 둘 다 해보니까 스트레스는 똑같이 받던데. 그리고 애에 관한 모든 건 엄마 탓으로 돌렸잖아. ‘누구 머리 닮았어, 저거.’ ‘엄마가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저래?’ 이렇게. 아니, 애는 엄마만 키워?

희원: 야, 얘(은희) 또 욱한다. (웃음)

은희: (아랑곳하지 않고) 당연히 여자니까 현모양처여야 하고 조강지처여야 하고. 그게 참 힘들지 않았어요, 다들? 돈을 벌고 안 벌고의 차이를 떠나서 집에서 일하는 건 일 아니냐고. 이런 생각을 할 때 좀 속상해지지.


실제로 국제노동기구(ILO)는 2013년 무급 노동을 4가지 유형으로 정의했다: 무급 연수, 자원봉사, 가정이나 가족이 소비할 물품을 생산하는 활동, 마지막으로 무급 가사 및 돌봄을 포함해 가구 또는 가족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중 뒤의 둘이 무급 가사노동에 포함되며, 국가의 경제 수준과 상관없이 전세계적으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평균 2.5배 더 많은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4]


주부의 가사노동은 자본을 끊임없이 순환하게 만드는 상품으로서의 ‘임금노동’과 분명 다르다. 예컨대 로크와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고전 경제학자들은 부의 정당성을 노동에서 찾았다. 그들의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상품 교환의 기준, 즉 가치는 그 상품에 투하된 노동량과 맞먹는다.[5] 지금과 같은 ‘임금 중심 사회’에서는 돈을 지급받는 노동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주요 노동양식이며, 이렇듯 노동의 유용성을 임금으로만 판단하는 현대의 사유는 곧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엄마라는 존재는 자본주의의 아름다운 예외가 되어 세상에 존재한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의 1장은 저자의 곤혹스러웠던 경험에서부터 물꼬를 튼다. 저자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지 2주차일 무렵이었다. “야, 너 요즘 집에서 논다며?” 큰애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빨래를 개고 있던 와중 한 친구와의 전화 통화를 그는 오랫동안 생각한다. 당황스러움과 불쾌함, 찝찝함이 섞인 그때의 감정에서부터 천연덕스럽게 “아, 내가 말 안했나, 나 회사 그만두고 집에서 논다고?”라고 말하기에 이르기까지 주부 내지 엄마라는 그의 정체성은 자타에 의해 굴곡지게 공격받았을 테다.


슈퍼우먼 증후군[6]: ‘워킹맘’의 속사정

육아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이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창립된 비영리단체 '정치하는 엄마들' 조성실 공동대표는 언젠가 "워킹맘이라는 표현이 정말 싫다"고 말했다고 한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가사와 육아를 경시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는 ‘워킹맘’ 대신 '취업모'라는 단어를 썼지만, 여전히 나의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를 특수한 단어로 정의내리는 것은, 엄마의 디폴트 상태를 무직의 주부라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왜 밖에서 일을 할 때조차 ‘엄마’라는 정체성이 따라 붙어야 하는가. ‘워킹맘’으로서 평생 살아온 외숙모에게 그로 인해 힘들었던 점은 없었는지 궁금해졌다.


다연: 외숙모는 채림(은희의 딸) 언니가 태어난 이후로 계속 일을 했잖아. 가사노동을 온전히 부담하는 게 벅차진 않았어?

은희: 힘들었지. 일이랑 가정 사이에서 항상 안절부절했어. 직장에서의 내 역할을 차치하고서라도, 집에 오면 해야 할 빨래, 설거지, 밥하기... 온갖 집안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그뿐이니. 며느리로서, 부인으로서, 엄마로서 해야 되는 일들이 차고 넘쳤으니까.

그땐 ‘그러니까 누가 바깥일 하래?’ 이런 식이었어. ‘너 집안일 열심히 하기 싫어서 (일하러) 나가는 거잖아’ 이런 분위기. 맞벌이를 하든 말든 여자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게 당연히 여겨지는 그런 분위기. 그러니까 뭐든 다 열심히 해야만 했어. 완벽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지.

경원: 그러니까 이런 거지, 외숙모랑 외삼촌이랑 똑같이 일을 하는데도, 집에서 외숙모가 일하는 건 당연하고 외삼촌이 하는 건 도와주는 거라 하는 거. 그게 잘못됐다는 거야.


실제로 여성들은 노동의 이중 부담에 취약했다. 이중 부담이란 여성이 직장에서 유급 노동을 한 뒤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가사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오래전부터 고정된 사회적 풍토로 인해, 남녀가 직장에서 같은 시간을 일하더라도 무급 노동의 부담은 주로 여성에게 돌아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사회활동을 하는 엄마를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선도 분명 존재한다. “엄마가 일을 하면 애는 누가 키워?”, “애가 어렸을 땐 엄마가 옆에 있는 게 정서상 좋다던데.” 책임지지도 않을 오지랖이 날아다닌다. ‘무책임한 엄마’라는 딱지는 ‘나는 나쁜 엄마’라는 죄의식과 자책으로 변질되어 엄마들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다.

“우리 문화는 남자들이 집 밖에서 활동적이며 헌신적인 삶을 보내는 것은 당연시하면서, 여자들이 사방의 벽으로 둘러싸인 집 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면 나쁜 엄마, 나쁜 사람 취급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많은 직장 여성들은 고개를 숙이고 다닐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이나 성과에 대해 침묵한다. 일에 대한 열정도 표현하기를 꺼린다.”[7]


은희: 나도 여기저기서 싫은 소리 많이 들었었지. 근데 사실 지금 많이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해. 여자들이 이전보다 직장에 많이 다니는 만큼 남자들도 상당히 많이 가정일을 하고 있어. 이게 지금 시대의 흐름인 것 같아. 요즘 집안일 잘 안 하는 여자들도 되게 많잖아. 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인드도 확실히 우리랑 다르고.


그렇다. 퇴근한 엄마가 퇴근한 아빠의 밥을 차려 주는 것이 더이상 당연하지만은 않다. 나 또한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개키는 아빠의 모습에 무척 익숙해져 있다. 근래 들어 남녀 간 무급 가사노동에 참여하는 시간차는 분명 줄어들고 있고, 미디어 등에서도 남성이 가사 및 돌봄노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허나 통계는 세상이 변화했다고 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말한다. 지난해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0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보면 맞벌이 가정 여성의 가사 시간은 3시간 7분으로, 남성(54분)보다 2시간 13분 더 많았다. 남편 외벌이 가정에서는 여성의 가사 시간이 5시간 41분, 남성의 가사 시간은 53분이었으며, 무엇보다 황당한 것은 아내 외벌이 가정에서도 여성은 2시간 36분, 남성은 1시간 59분 집안일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전에 비해 남성이 가사노동에 참여하는 시간이 증가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가사노동은 명백히 ‘여성다움’의 노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주부들의 가사노동 시간은 폭증했고 이는 직장에 다니는 여성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도시를 봉쇄하며 전 세계적으로 학생 17억 명이 영향을 받아 원격 수업과 가정 수업을 병행해야 했다. 그리고 학생 10명 중 1명 꼴인 2억 2천400만 명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맞벌이 부모들은 유급 직장을 계속 유지하느냐, 집에서 자녀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으며 선택을 내려야 하는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실제로 노동시장 내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큰 타격을 받았다. ILO에 따르면, 코로나 19이후 55개국의 남성 2천920만 명과 여성 2천94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8] 언뜻 비슷해보이지만,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남성보다 훨씬 낮은 현실을 감안할 때 코로나19로 인한 실업 충격이 여성에게 더 많이 가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내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여성 취업자 감소 폭은 13만 7천명으로 남성(8만 2천 명)의 1.6배였다. 특히, 취업자수 감소 폭이 큰 상위 3개 업종인 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 교육서비스업에서 전체 취업자에서만 40만 5천여 명이 줄었는데 그 중 여성이 62%를 차지한다. ILO는 이처럼 고용시장에서의 남녀 간 불평등이 팬데믹 상황에서조차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으며,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가는 이유로 코로나19로 발생한 돌봄의 공백을 메우는 책임이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차별적으로 집중되는 사정을 거론한다. 이처럼 코로나19는 기존의 성차별적 가사분담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고민상담을 해주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젊은 아빠를 우연히 보았다.[9] 살림이 재밌는 ‘내조의 왕’ 꿈나무라 소개된 그의 고민은 남자 전업주부에 대한 냉랭한 눈초리. 그가 다가가면 중단되는 어린이집 엄마들의 대화와, 그를 받아주지 않는 맘카페 커뮤니티의 높은 벽이 그를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차가운 시선과 곱지 않은 말들로 마음 고생하는 26살 아빠의 모습은 여전히 부부 중 한 명만 임금노동을 해야 한다면 꼭 남자여야 한다는 사회의 인식을 여실히 드러낸다. 변했다고 자부하기엔 아직 너무 이르다.


엄마의 돌봄은 사랑이자 노동이다

한 명의 아기가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는 데에 필수적인 돌봄노동[10]은 엄마가 아닌 조부모나 아버지, 혹은 다른 가족이나 생판 남으로부터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는 각자의 사정이나 가정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허나 그 돌봄이 대부분 엄마들의 몫으로 생각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엄마의 ‘돌봄’이란 정말 노동이 맞는 걸까.


일반적으로 돌봄노동은 시장노동과 다르다고 여겨진다. 시장노동에 비해 돌봄노동을 개념화하고 측정하는 것이 어려운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살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씩은 돌봄의 경험을 하며, 그로 인해 습득된 돌봄은 보편성을 갖는다. 둘째, ‘돌봄노동’이라는 용어 자체의 불확실함이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돌봄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며, 노동강도의 편차 또한 사람마다 너무 상이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돌봄까지 노동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이러한 돌봄노동의 큰 편차는 이모의 경험에서 잘 드러난다.


희원: 난 지금까지 제일 힘들었던 게 언제였냐면, 지원(딸)이가 방학 특강 수업 할 때. 걔가 여섯시 반까지 출근이었어. 그럼 내가 4시 반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하고, 아침을 먹이고 또 도시락을 싸. 내가 미금역에 걔를 내려주면 걔는 전철 타고 가고, 나는 새벽 기도를 갔단 말이야. 그때 1년이 나는 최고로 힘들었어. 새벽에 교회 가서 앉아 있으면 참기름 냄새가 내 온몸에 아주 창피할 정도로 많이 나. 당연히 밥을 하고 바로 왔으니까. 그때 너무너무 힘들더라고.


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이모의 돌봄은 그저 자녀가 딱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외면하지 못했기에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똑같은 상황에서 이모와 같이 행동하지 않은 다른 엄마가 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 없다. 돌봄노동의 강도는 그 집안의 환경, 엄마 본연의 성격, 혹은 엄마의 시간적인 여유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애정의 차이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모성이란 여자의 본능’이란 명제는 근대에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며,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생성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아이를 품는 엄마들이 참 많지만, 엄마의 희생과 헌신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문화나 최대치의 모성을 엄마에게 강요하는 사회가 계속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애정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돌봄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노동으로 볼 것이냐를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돌봄노동을 개념화하고 측정하는 것이 어려운 마지막 이유는, 돌봄이 금전적 동기나 경제적 효율성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에 의해 작동된다는 점이다. 앞서 애정의 정도가 엄마마다 다르다고 했지만, 어쨌든 그 노동을 추동하는 것은 ‘모성’, 즉 '정서'의 작용이다. 흔히 ‘감정노동’이라 불리는 감정의 억압과 통제는 대부분의 임금노동에서 고객의 갑질,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허나 엄마가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스트레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엄마의 경우 자녀로 인한 ‘감정노동’이 노동의 주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희원: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회사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뉴스 많던데, 나는 주변에서 아이 입시 끝난 다음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들 종종 봤어. 얘기도 많이 듣고. 우리 같은 중년 여성들도 스트레스로 병 걸리고 죽는 경우 되게 많거든.

경원: 그런 사람 정말 많아. 나도 다연이 중고등학생 때 완전 우울증 걸렸었잖아. 주부이자 엄마로서 하는 청소, 설거지, 빨래, 밥...이렇게 내가 몸을 써서 하는 노동은, 물론 힘들지만 상대적으로 괜찮아. 근데 자식 키우면서 속 썩는 건 개인적으로 너무 벅찼어. 학교에서 다연이가 뭘 잘못해서 내가 대신 불려 갈 때나, 사춘기 때 얘가 나한테 쏟아내는 감정들을 나 혼자 받아낼 때 정말 힘들었지. 얘가 어떤 일로 속상해하면 내가 얘의 몇 배로 감정이 피폐해지기도 했고. 그건 내가 몸 쓰는 거의 몇 배 정도 되는 아주 강도 높은 ‘일’이었어.

왜, 똑같은 노동을 해도 끄떡없는 사람 있고 조금만 일해도 힘든 사람 있듯이 엄마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 똑같은 애를 키워도, 엄마의 성향에 따라서 나같이 이렇게 좀 더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키우는 사람도 있잖아. 너를 키웠다고 해서 다 나처럼 힘들어하진 않았을 것 같아. 사람마다 가지는 힘듦의 그릇이 다 다르니까.


초등학생 때였던가. 우리 아파트 14층에 살던 아주머니가 아들 둘이 아침밥을 먹는 도중 베란다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는 일이 있었다. 사춘기 아들들과 혼자 부대끼며 발생하는 감정소모로 인한 극단적 선택이었다고 이후 알음알음 들었지만 아파트 내에선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이 사회는 엄마들의 정신적인 노동을 굉장히 가볍게 생각하고 있으며, 희생이라 불릴 만한 돌봄은 ‘유별나다’ ‘유난스럽다’는 말 아래 너무도 쉽게 가치를 상실한다. ‘맘충’이라는 말 또한 지나치게 아이에게 헌신하는 어떤 엄마의 모습만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엄마와 여성을 싸잡아 비하하는 폭력이다. 하루가 다르게 묵직해지는 아이를 돌보느라 노상 손목보호대를 차고 있는 ‘82년생 김지영’은, 실수로 카페 바닥에 음료를 쏟자마자 그렇게 ‘맘충’이 되고 만다.


흔히 돌봄 제공자를 ‘사랑의 포로’라고 표현하곤 한다.[11] 돌봄은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돌봄을 주고받는 이들 간의 관계적, 이타적 특성들로 인해 다른 일과는 차별되는 속성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돌봄노동은 감성적이고 감상적이며 비이성적인 일이라고 저평가받기도, 숭고한 영역으로만 미화되어 그 속에 고립되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을 내보이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돌봄노동을 받으며 자라왔다는 사실은 너무나 아이러니 하다. 돌봄은 분명 경험과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다. 아무리 베테랑의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기에 수많은 엄마(혹은 다른 돌봄 제공자)들은  지금도 각종 책과 인터넷, 의사나 전문가를 통해 그 해결책을 강구하는 중이다. 깨끗한 집, 근사한 저녁밥, 혹은 예의 있게 잘 자란 누군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돌봄의 손길이 머물렀던 그 모든 것들이 돌봄노동의 가치를 증명한다.


은희: 엄마가 되고 나니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참 많아. 그 중에는 엄마의 돌봄도 분명 포함이겠지. 만약에 내가 배우라면. 단어 하나만 던져줘도 울 수 있는 단어는 ‘엄마’야. 아마 이건 사람마다 다를 거야. 어떤 사람에게 아빠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단어일 수 있겠지만 나한텐 엄마가 그래. 요즘 내가 키운다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엄청 많이 우는데, ‘아, 엄마기 때문에 아이를 위해서 저렇게까지 하는구나’, ‘엄마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이런 걸 새삼 또 느껴. 차를 들어 올리는 힘을 가지는 게 엄마잖아.

물론 엄마는 힘들어. 집안일도 집안일이지만, 애 키우면서 애하고 씨름하는 게 너무 힘든데, 여전히 얘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하지. 노동이지만 한다고. 평생, 내 힘이 닿는 데까지는.

희원: 그치만 정말 힘들어도, 언젠가 치유될 수 있는 노동인 것 같기도 해. 나를 힘들게 했던 자식들로부터 다시 또 치유를 받는거지.

경원: 맞아. 최대치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불확실한 치유의 노동. (웃음) 너를 돌보고 키우면서 잘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확실한 치유였어 나한테는.


시장에는 수요와 공급을 움직이고 이를 자동으로 규제하는 힘, 즉 ‘보이지 않는 손’의 경제가 있다. 하지만 세상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힘이 존재한다. 사랑·의무·호혜 같은 가족 가치에 기반을 둔 또 다른 힘, 바로 ‘보이지 않는 가슴’[12]의 존재다. 밤새 우는 나를 등에 업은 채 꼴딱 밤을 지새운 어느 밤의 어린 엄마는 분명 한 명의 노동자였다.


에필로그

‘엄마는 과연 노동자일까?’ 스스로의 오랜 물음에 대해 늘 당연하다며 답하였지만, 그 확신 너머에는 언제나 약간의 찝찝함이 자리했다. 계산될 수도 없는 세상의 수많은 집안일을 어떻게 범주화할 수 있는가. 자녀에 대한 관심과 욕심과 사랑과 희생에서 비롯된 선택적 행동들을 과연 돌봄‘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 돌봄노동을 치유의 노동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 결국 치유라는 이름의 희생과 헌신을 또다시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에 답하기에 나는 너무도 무지했고 무력했다.


이 글은 나의 질문들에 대한 조금은 부족한 답변이다. 다시 나에게 묻는다. 엄마는 과연 노동자일까? 나는, 적어도 나는 노동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다.요리책을 보며 서툴게 남편의 저녁을 준비하던, 나를 알기 이전의 엄마. 치울 거리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지저분한 집구석에 주저앉아 엉엉 울던 엄마의 어떤 순간들. 마침내 쭈글쭈글한 아이를 안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엄마’라는 노동은 여전히 내게 가슴 뜨겁게 울컥한다.

나는 누구이고 왜 여기에 놓여있는지에 관한 고민이 또다시 꼬리를 물 때, 결국 당신이 행한 노동의 세월에 먹먹한 부채와 감사를 느끼며 긴 생각에서 깬다. 내가 바로 그 노동으로 가꾸어 낸 자랑스러운 생명이라는 결론과 함께, 그러므로 뭐든 살아내자는 다짐의 꼬리를 매듭지으며.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 더 다정하고 멋진 내가 되어 당신을 영원히 치유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끝으로, 엄마를 포함한 모든 가사 내지 돌봄노동자들의 지위가 사회 안에서 온당히 보장받는 세상이 하루빨리 찾아오기를 바란다는 소망으로 강고한 세상을 두드려본다. 부디, 이 글을 읽을 누군가의 자녀에게도 그 노동이 다시금 가닿을 수 있기를.

 


[1] 로맨스는 별책부록 (2019). tvN. 2화

[2] 정아은의 가사노동에 대한 책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2020)의 제목을 차용했다.

[3] 낸시 폴브레 (2007). 39.

[4] 뒤이어 나오는 “슈퍼우먼 증후군 : ‘워킹맘’의 속사정”에 더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5] 박영균 (2009). 193.

[6] 주부의 역할과 직장에서의 역할을 모두 잘 해내려는 여성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스트레스성 증상. 즉 모든 일에 완벽해지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지쳐서 나타나는 증후군으로 눈 질환, 두통, 불안감 등의 증상을 호소한다.

[7] 레슬리 베네츠 (2011). 196.

[8] ILO Monitor: COVID-19 and the world of work. 5th edition

[9] 무엇이든 물어보살 (2021). KBS Joy. 107화

[10] ‘엄마’의 노동을 소재로 하였기에 돌봄을 말할 때 유·무급 돌봄노동 중 무급 돌봄노동으로 범위를 좁혀 서술하였다.  돌봄노동은 통상 환자나 노인, 장애인과 어린이를 돌보는 등의 활동을 모두 포함하지만, 이 글에서는 보다 엄마의 돌봄에 집중하기 위해 육아의 측면을 집중해서 다뤘음을 미리 밝힌다.

 [11] P. England. (2005). 381-399.

[12] 낸시 폴브레 (2007).



참고문헌

단행본

낸시 폴브레 (2007). 보이지 않는 가슴. 윤자영 (번역). 또하나의문화

레슬리 베네츠 (2011).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고현숙 (번역). 웅진윙스.

박영균 (2009). 노동가치. 책세상.

정아은 (2020).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천년의 상상.

함선유 (2021). 돌봄을 정당하게 대우하라. 한편 5호: 일, 민음사. 115-131.

Eisnitz, Gail A.(2006). Slaughterhouse. Prometheus Books. 


논문 및 저널

이숙진 (2012.02.). [심층분석1] '노동‘으로서의 돌봄. 월간 복지동향 제 160호. Retrieved from https://www.peoplepower21.org/Welfare/873577

England, P. (2005). Emerging theories of care work. Annu. Rev. Sociol, 31. 381-399


기사 및 온라인 자료

김미영 (2021.03.08.). [코로나19 성별 격차 더 벌리나] 타격은 여성이, 지원은 남성이 더 받아. 매일노동뉴스. Retrieved from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643

박용하 (2021.07.20.). “여성 고용, 코로나로 남성보다 타격···가정폭력·직장 성차별도 더욱 심화”. 경향신문. Retrieved from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107202107025#csidx6f5e6cbd5249511abca448297a4b921

윤효원 (2020.12.03.). ILO “일하는 엄마들의 무급돌봄 문제 심각”. 매일노동뉴스. Retrieved from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130

이경미 (2020.09.02.). 맞벌이 여성 가사시간 아직도…‘남성의 3.4배’. 한겨레. Retrieved from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960377.html

이창곤 (2021.01.10.). “무급돌봄노동 가치, GDP 대비 최대 3%”. 한겨레. Retrieved from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978031.html

ILO Monitor: COVID-19 and the world of work. 5th edition Retrieved from https://www.ilo.org/global/topics/coronavirus/impacts-and-responses/WCMS_749399/lang--en/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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