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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특집 '노동'] 편집위원 열음

1부: 인생은 짧고 례술은

 

달 혹은 6펜스

이 글은 예술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향한 혹자들의 통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의 통념이란 대개 이런 것이다. 예술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거 하면서 돈까지 버는, 부러운 부류. 그들이 정말 순수한 부러움을 기저로 깔고 저런 말을 내뱉는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위와 같은 시선으로부터 자명해지는 사실은 결국 혹자들에게 창작 행위는 여전히 노동으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점일 테다.


물론 모두의 머릿속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의 양태와 창작 사이에 크나큰 괴리가 놓여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기업과의 ‘근로 계약’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노동과 비교했을 때 창작 행위에 강제성이 미약하다는 지적에는 일부 동의한다. 회사원이든 예술인이든 일하기 싫으면 그냥 때려치우면 되지, 왜 징징거리냐는 식의 생산성 없는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 무언가를 창작하는 데에는 당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목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사가 시켰으니까 해야 해, 클라이언트 측에 내일까지 넘겨야 하니까 해야 해, 이번 달 카드 명세서를 보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해… 가 아닌, 하고 싶으니까 할 거야, 가 바로 창작한다는 이들의 추동력이니 말이다.


그러나 예술은 정녕 하고 싶으니까, 더 나아가 자아를 실현하고 있다는 만족감만으로 해낼 수 있는 ‘취미’일 뿐일까? 특히나 ‘매일 야근하며 월 500 VS 워라밸{Work-life balance} 보장받고 월 180’ 따위의 밸런스 게임이 유행하는 요즘, 더군다나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요즘, 워크와 라이프의 경계도, 밤낮도, 무엇보다 보장되어 있는 수입도 없이 흰 바탕―워드의 빈 화면이나 레이어 혹은 캔버스와 같은 것들―과 씨름하는 게 진정 ‘부러운 부류’라는 이야기를 들을만한 일인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 애초에 창작이 과연 ‘일’이 맞기는 하고?



좋아서 하는 ‘일’

창작이 과연 ‘일’이 맞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만약 길가던 중 누군가가 붙잡고 창작이 노동이 맞냐고 물어본다면 적어도 나는 흔쾌하게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답변의 기회가 아무개 씨에게 넘어간다면,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는… 글쎄요? 이 사회에서 예술에 대한 비당사자들의 평가는 대개 극과 극이다. 과도한 성역화 혹은 철저한 개무시. 후자를 납득시키기 위해 내게 주어진 지면을 낭비하고픈 마음은 없으나, 전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진을 가장한 일종의 가스라이팅으로 작동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창작을 노동으로 인정한다면 뭔갈 좀 쓰거나 만들고 있다는―아마 이 추상적인 대답은 요새 뭐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다 내놓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의 말에 구태여 감탄사를 내뱉을 필요는 없다. 금요일 오후엔 손가락조차 가벼워지며 월요일 새벽엔 저도 모르게 지구 멸망을 바라게 된다는 주위의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선망 어린 찬사를 건네는 이들은 많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예술인에 대해 경외를 표하는 데에는 아마 창작하는 사람은 노동이 아닌 자아실현 중이라는 은근한 동경이 깔려있을 테다.

예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자본주의와 결탁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고귀하며 소위 말해 ‘있어 보이는’ 뉘앙스. 실제로 그러한 ‘있어 보임’은 예술업에 종사하는 당사자들을 훌륭히 가스라이팅하여 스스로를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지경까지 끌고 가기도 했다.[1]


그러나 예술의 범주로 묶이는 모든 창작 행위는 비록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노동은 아닐지라도 분명한 노동이다.



예술 ⇒ 노동

예술이 왜 노동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자리하는 위치에 대해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른 노동의 정의는 ‘몸을 움직여 일을 함.’ 혹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이다. 그러나 노동의 본질에 대해 논하기에는 전자는 물론이거니와 상대적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후자 역시 불충분하다. 그러니 다소 재미없고 따분하더라도 정공법으로 이 난항을 돌파해 보자.


노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인 마르크스{Karl Marx}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자연을 변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노동으로 보았는데, 이때 ‘인간의 행위’는 무언가의 변형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생산적이며 또한 창조적이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와 같은 말이 최고의 칭찬으로 여겨지는 현대 사회에서 마르크스의 견해가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정의한 ‘노동’과 창작 행위는 결코 대치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케케묵은 마르크스를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창작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은 그 자체로도 창조적이지만, 예술은 또한 보다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창출해내기도 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생산직 노동자의 노동을 통해 생산된 상품이 (시장에 내놓아짐에 따라) 사회의 새로운 가치로 소비되듯, 예술 노동자 역시 비슷한 매커니즘을 통해 사회와 관계하게 된다. 예술인이 창작한 작품은 종이, 무대, 캔버스 등의 도구 위에 실재하게 되는 결과물 외에도 그것이 향유되는 과정에서 정동{affects}을 파생시키는데, 이렇게 생겨난 정동을 매개로 창작자와 감상자는 상호작용한다. 이 과정을 통해 예술인의 작품은 ‘사회적 자본’의 가치를 지니게 되며, 이때 예술은 예술 이외의 의미로도 지극히 ‘창조적’인 활동이므로 완벽하게 노동의 위치를 점유한다.


마르크스가 정의한 노동을 통해 적어도 이론적인 관점에서는 예술에 대해 노동이 필요조건이며, 어쩌면 창작이야말로 노동의 본질에 가장 합당한 노동 행위라는 데에 납득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장식 상품이 갖는 사용 가치를 기준으로 ‘일정한’ 재화를 지불하는 반면, 예술품에 대해서는 각 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하게 되고 예술가는 그 가치에 따라 각기 다른 보상을 받는다. 일반적인 상품과 다르게 예술품은 사용 가치가 아닌 그것이 지닌 ‘예술적’ 가치에 의해 진가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피상적인 개념을 떠난 실질의 노동과 창작을 바로 대응시키기에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현대의 노동은 재화와의 결탁으로 과하게 상품화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노동의 가치가 시간과 결부되어 당장의 시급이나 연봉 등으로 치환되는 것이 당연한 최근의 ‘일반적인’ 노동 시장에서 창작이 가진 측정 불가능의 성격은 다루기 까다로운 종류의 돌연변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생산과 교환이 매번 일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노동의 범주로부터 배제할 경우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예술이야말로 자본주의 내부 모순의 적폐를 가장 노골적으로 확인시켜주며, 심지어는 자본주의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해방의 계기를 마련해준다고 말한다. 예술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많은 돈을 긁어모을 수는 없으나 배금주의(拜金主義)에 빠진 사회를 직시하게끔 하는 노동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떠올리는 통상적인 형태의 노동이 사회를 잘 굴러가게 하는 하나의 톱니바퀴로써 사회를 구성한다면, 예술이 지닌 가치는 무수한 톱니바퀴가 모인 총체를 조감하는 데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회는 제각각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사회구성원들은 늘 사회의 방향타를 더 나은 방위로 놓아두기 위한 투쟁 상태이다. 이때 예술은 현실을 복제하여 작품에 담는 모방의 방식을 통해 자잘하게 은폐되어 있던 사회의 면면을 고발하는 수단으로써 기능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 속 예술의 의의는 여기서 발생한다. 예술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거울 앞에 선 누군가의 정동을 이끌어냄으로써 상품 사회에서 값으로 매겨질 수 없는 창조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예술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는 한편 자본과 결탁되지 않는 생산―정동이나 언어, 관계와 같은 것―의 가능성을 확인시킴으로써 기존의 사회가 가치를 이해해 온 방식에 대한 재고를 요한다. 돈으로 정확히 환산되는 것만이 노동이라는 인식의 확산은 예술은 노동이 아니라는 논조의 가스라이팅이 미치게 되는 범위를 예술업 종사자들뿐만이 아닌 ‘일반적인’ 노동자로까지 확대시킨다. 시장에서 등가교환 되지 않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는 이야기만을 반복할 경우 우리는 견고한 물신화 아래 갇히게 되니 말이다. 즉 노동의 본질, 그리고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토대로 하여 예술은 창조와 더불어 무한 확장성이라는 가치를 지니게 되기에 사회가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바쁘시겠지만, 다시 길 가던 아무개 씨를 소환해보자. 예술은 ‘일’이 맞냐는 질문에 불특정 아무개 씨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저거 내 n시간치 시급’의 지독한 계산법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아무개 씨가 예술인이든, 회사원이든, 무직이든 혹은 아직 직업을 가지려면 한참은 먼 초등학생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므로 법전과 철학 책을 뒤져가며 예술가가 노동자냐 아니냐 하는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야 예술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는 쪽이 훨씬 시급하겠지만… 현실은 정말이지 녹록지가 않았다. 이에 예술인들은 다시 법전을 뒤져가며 제도로나마 자신의 노동자성을 인정받고자 기나긴 투쟁을 시작했다.



예술인이자 노동자

문화예술인들은 자신이 갖는 예술인으로서의 자아와 노동자성이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고 최근에서야 예술과 노동을 병치하기 시작하였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은 아니다. 예술인들이 자신의 노동자성을 인지하기까지에는 ‘예술은 원래 배고픈 것’이라는 무책임 아래 묵인되었던 수많은 가난과 그로 인한 죽음들이 자리했다.[2] 안타까운 죽음은 거대한 무언가를 감춘 수면에 큰 파동을 일으켰다. 예술하는 사람은 가난해야 마땅하다는 인식은 단순한 자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삶 자체를 갉아먹을 수 있는 수렁임을 터놓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문화예술인들은 ‘예술 노동자’[3]라는 보다 직관적인 이름으로 자신들을 호명하며 이미 누렸어도 한참을 누렸어야 할 노동자로서의 권리 및 처우 개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생존에 대한 위협이 (소위 말해 ‘돈 안 되는 예술’에 속하는) 순수 예술에서부터 방송, 영상 등의 비디오아트까지 사회의 다양한 예술업 종사자들을 한데 묶어 뭉쳐낸 것이다.


그러나 예술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노동자성을 자각한 것과는 별개로 예술업 종사자들에 대한 사회의 인식 개선은 내내 부진하였다. 물론 일련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전망은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특정 죽음을 계기나 동력의 위치에 놓아야 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어찌 됐든 최고은 작가의 부고를 계기로 법안 발의 후 별다른 진전 없이 2년 간 계류하던 「예술인 복지법」[4]이 2011년 제정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한국예술인복지재단도 설립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때의 복지 정책들은 현장이나 실태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도출된 일종의 대증요법에 불과하였다. 법안의 제정 목적이 예술인의 권리 보호와 복지 증진에 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2011년 최초로 제정되었을 당시의 「예술인 복지법」에서는 처음 법안이 발의되었을 당시 제안된 주요 쟁점이었던 고용보험과 관련된 혜택 조항이 누락되어 있었으며,[5]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복지법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즉 예술 노동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도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제1장 총칙’에서부터 ‘제6장 벌칙’까지의 구색을 갖추고는 있지만, ‘제3장 사회보장’에서는 기존의 「산업재해보상보험특별법」에 기대어 정작 새로운 복지 지원의 도입을 미루며, 대부분의 서술은 ‘제4장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집중되어 있음을 본다면 차라리 이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내부 규율로 이해하는 것이 명쾌하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명분만을 마련하는 데 그친 법에 만족하기에는 예술인들은 이미 동료의 죽음을 목도한 후였다. 바로잡지 못한다면 다음은 또 다른 동료, 어쩌면 나의 차례인지도 몰랐다. 따라서 예술인들은 예술 노동자들 역시 고용 노동자들과 마찬가지의 합당한 기준으로 근로기준법과 고용보험의 수혜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예술인 복지법」의 개정을 요구했고,[6]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예술 노동자들의 요구안을 반영해 2017년 새로운 고용보험제도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새 정부의 예술 정책이라며 들고 나온 고용보험제도안 역시 고용보험의 가입대상을 ‘프리랜서 예술인’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지칭하는 등의 어폐는 여전했다. 예술 노동자의 특수한 고용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이들을 ‘프리랜서’로 통칭할 경우 이들은 자영업자에 준하게 되어 고용보험에 임의가입하게 되며, 보험료 역시 예술인이 전액 부담하게 된다. 이는 고용보험 가입을 의무가 아닌 선택에 맡김으로써 예술인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사용자 측이 보험금 분담을 하지 않도록 한다는 등의 문제점을 낳는다. 결국 개정안이 말해주는 것은 교체된 정부 역시도 예술 노동자들이 놓인 노동 환경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다는 사실뿐이었다.[7]


몇 차례의 법 개정 동안 ―능력의 부족인지 의지의 부족인지는 모르겠다만― 본질에는 접근조차 못한 채 겉핥기식에 머무는 제도와 전혀 나아지지 않는 노동 현실에 절망한 예술 노동자들은 같은 해 ‘문화예술노동연대’[8]를 출범시켜 예술 노동자들의 특수노동 형태를 제대로 고려하여 고용보험제도를 개정할 것을 적극적으로 정부에 요구하였다. 이때의 주 요구는 ‘예술인의 노동자성 인정, 노동시간에 기획 및 연습 시간 포함, 사용자의 보험료 분담, 수급자격요건 수정, 고용보험 당연가입’ 등 현장의 애로와 직결된 것들이었다. 문화예술노동연대는 정부와 문체부, 사용자 단체를 포함한 문화예술계, 고용노동부(이하 노동부) 산하의 고용보험제도 개선 TF와 지속적으로 간담하였고 그 결과 2018년 노동부에서는 예술인 고용보험 도입을 위해 고용보험제도 개선안을 발표한다.[9]


이번에야말로 전망은 고무적이었다. 실제 예술 노동에 종사해 본 경험이 있는 인원이 간담회에 참여하여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으며, 그 결과 그간 「예술인 복지법」과 고용보험의 고질적인 맹점으로 꼽히던 적용 대상, 보험료 부담 등의 문제가 개선 및 반영되어 「고용보험법」과 「고용산재보험료징수법」, 「예술인 복지법」 개정안이 각각 새로이 발의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정된 2020년 버전의 예술인 고용보험제도에는 2021년 6월 기준 3만 명 이상이 가입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법안의 적용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낙관할 수는 없다. 실업급여를 수급하기 위해서는 계약 기간과 해당 기간의 보수지급액을 계약서에 분명히 명시해야 하는데, 건수마다 각기 다른 고용인과 계약서를 작성하는 예술 노동자의 특성상 모든 고용 상황에서 상기한 실업급여 조건을 챙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군다나 크라우드펀딩 등 보수를 특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작품을 준비하는 경우나 회사와 계약하지 않은 상태로 작품을 준비하는 습작생, 연습 시간이 예술 활동에 포함되지 않는 극단 소속 배우의 경우 등은 아예 가입 대상에서 빗겨난다.[10] 지난 9월 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에서는 법의 적용을 받는 예술인의 범주에 ‘예술 활동을 업(業)으로 하기 위해 교육·훈련 등을 받았거나 받는 사람'까지 포함하고 있어 예술인 고용보험제도의 대상이 아니었던 예비 예술인 등도 수혜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실제 시행까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다만 확실히 고무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십 년에 걸쳐 자신의 노동자성을 쟁취해 낸 예술 노동자들의 지구력과 예술을 향한 집념이다. 예술 노동자들이 초반의 비난―”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와 같은 논조의 것―을 감내해가며 굳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확보하고자 한 것은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다시 말해 예술인의 권리를 증진하기 위한 모든 법률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보편적인 권리이자 지속적인 예술을 위한 자립 수단 중 가장 최소한의 것이다. ‘예술인이기 때문에’ 특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이기에’ 이정도는 요구하는 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이해받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예술과 노동이 유리될 때 예술과 삶은 양립할 수 없게 되며, 이때의 결과는 둘 중 하나로 날 수밖에 없다. 예술이 죽든지, 예술인이 죽든지. 돈과 가오가 양립할 수 없다는 헝그리 정신은 구시대의 것이 된 지 오래고,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던 예술의 원형―이라고 믿는 것―을 갖다 버릴 때가 이미 한참도 전에 도래했다. 우리는 예술인들이 굶어 죽기를 자원하며 예술을 택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한다. 예술인 없이는 예술도 없다. 굶어 죽은 시체더미에서 피운 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2부: 글로소득


글, 시발(始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미가… 있을까… 의미… ㅇ……. 예술인의 권리에 대한 법률들을 잔뜩 뒤져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글을 쓰다가 잠든 탓인지 꿈에서도 원고를 썼고, 우습지만 이번 가을호 내지 색깔도 봤다. 잠에서 깬 후, 꿈에서 봤던 가을호는 청록색이었는데 실제로는 무슨 색이려나 생각하다가 문득 스스로의 처지가 무척 고달파졌다. 자나깨나 글만 생각하는 삶이라니. 아마 마감을 앞둔 요새의 밤낮 없는 처절함은 몇 년 후, 아니 어쩌면 그 후로도 쭉 이어질 나의 인생의 프리퀄쯤에 해당할 지도 모른다.

1부의 서론에서 했던 막대한 거짓말 하나를 시인한 후 정정하겠다. 이 글은 사실 예술업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혹자들의 통념이 아닌, 필자의 이기적이고도 숙명적인 고민으로부터 출발한다. 나, 글 써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11]

만일 필자가 1부의 서론에서부터 ‘예술은 노동이 맞다’는 관점에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고 느끼신 독자가 계시다면, 제대로 읽으셨다는 말씀을 드린다. 당연히 예술은 노동이어야죠. 제가 그걸로 밥 벌어야 하는데 예술이 노동이 아니면 어떡해요. 사실 나는 마르크스가 노동을 뭐라고 정의했는지 예술이 어떠한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지보다는, 앞으로 내가 정말 글을 쓰며 살아간다고 할 때 직면하게 될 실질적인 문제들이 훨씬 궁금함을 고백한다.


이렇게 된 거 대놓고 편을 들어보겠다.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영위 중인 예술 노동자들에게는 창작의 고통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스트레스를 차치하더라도 저마다의 고충이 존재할 테다. 어차피 모두가 힘든 처지에 줄 세우기가 의미가 있겠냐마는, 지표가 가리키는 가장 불우한 예술가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글 쓰는 사람들이다. 문체부가 실시한 「2012 문화예술인실태조사」에 참여한 표본 200명의 문인 중 ‘문화예술활동 관련 월평균 수입’이 100만 원 이하라고 답한 비율은 자그마치 91.5%로 설문에서 상정한 10개 분야 중 예술로만 밥 벌어먹기 가장 힘든 예술 분야에 등극했다.


〈그림 1〉 「2012 문화예술인실태조사」

물론 해당 설문이 10년 전에 실시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조금이나마 개선되지 않았을까 낙관해볼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최근의 작가 생태계에는 밥벌이, 그러니까 금전적인 문제 이외에도 작고 소중한 문인들을 잡아먹는 포식자가 차고 넘치는 실정이다.

그러니 이제 예술 전반으로 넓혔던 논지를 좁혀, 작가들의 창작 환경은 과연 안녕하신지 요즘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으신지 구체적인 안부를 물어보자.


작가 생태계: ‘_업’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십 년 사이 변한 것은 강산뿐만이 아니다. 작가들의 창작 환경 역시 지난 십 년 동안 놀랄 만큼 변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역시 ‘웹-’이라는 이름의 외래종이 자리한다. 웹소설, 웹진[12] 등 작가들이 창작물을 공개할 수 있는 매체가 발달하고, 이를 지원하는 플랫폼들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문단은 기존의 엘리트주의에서 탈피하였다.[13] 등단을 통해서만 작가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작가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작가님’께서 탄생하신 것과는 별개로, 직업적인 의미의 작가로서 인정받고 대접받는 이들은 정말로 몇 되지 않는다. 이 무슨 ‘열림교회 닫힘’과 같은 시추에이션인가. 이 같은 물음은 오늘날의 작가 생태계를 들여다보면 해결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작가는 이미 직업이라는 전체 집합에 포함되는 하나의 부분 집합임에도 ‘전업 작가’ 그리고 ‘겸업 작가’ 내지는 ‘부업 작가’라는 어딘가 모순적인 용어가 당연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 현상이 바로 작가 생태계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강의라든지 외부 기고 등의 부수입 없이 오로지 자신의 책을 통해서만 먹고 살 수 있는 100% 전업 작가는 유니콘과 같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니 일단 차치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전업 작가’란 서류의 직업란에 쓸만한 또 다른 직업을 갖지 않은 채 책을 내는 것을 목표로 글 창작을 하지만, 원고나 추천사 등 청탁을 받기도 하고 간간이 창작 클래스 등을 열어 강사가 되기도 하는 이들을 지칭한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자.


‘전업’과 ‘작가’라는 일종의 동어반복이 지시하는 바는 아무래도 문단에서 웬만큼 유명세를 얻기 전까지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회사 일, 강의 등과 창작을 병행하는 작가들이 대다수라는 점일 것이다. 실제로 나름 베스트셀러를 썼다는 작가들로부터 어느 출판사의 편집자였다는 이력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며,[14] 오히려 글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편집자라든지 카피라이터, 교수자로서의 환경은 개중에서도 축복받은 케이스라는 말이 만연할 정도이다. 이처럼 전설 속 유니콘에 가까운 전업 작가들을 제외한 거개의 작가들은 어딘가로부터 퇴근한 후 책상에 앉아 다시 노동을 시작하는 처지에 놓였으니, 왜 이들이 창작을 유일한 생계 수단으로 두지 않았는지―혹은 못했는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창작에도 시급이 있나요

왜 전업 작가로 살지 않는지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작가 개개인마다 상이할테지만, 그럼에도 대답들에 깔린 공통된 기저는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소설가와 편집자. 그는 두 일을 병행한다. …… 이 둘을 오가는 건 어쨌든 쉽지 않은 일이고, 자주 고비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는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 그는 작가 일―글 쓰는 노동―로 돈을 버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안다. 솔직히 생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작가로서의 노동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 그 돈은 부수입에 불과하다. 약간의 자유로움을 보상할 뿐이다. 물론, 들어오는 일을 모두 받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 글 쓰는 일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는 것이다. 단편소설과 산문을 더 많이 쓰고, 리뷰도 쓰고, 추천사도 쓰고, 동시에 장편 연재도 하고, 그렇게 한다면 아마 부수입의 수준을 넘어서긴 할 것이다. (사실 내가 이와 비슷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단언한다. 부수입의 수준을 약간 넘어선 수준일 뿐이다. 그래서 나도 전업을 선택하지 못한다. 대부분 작가들이 그렇듯.) 그래서 그는 작가 일로 돈을 벌지 않기 위해 직장을 다닌다.[15]


인용한 문단은 문예지 『자음과 모음』의 ‘작가-노동’을 주제로 한 2020 봄호에 실린 상호 인터뷰 중 일부로, 해당 부분은 둘 중 비교적 전업 작가에 가까운 강화길이 겸업 작가인 정영수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전업과 겸업, 부업 등 일상에서 글이 차지하는 물리적인 비중을 통해 작가의 생태계를 파악하고자 한 것은 이를 기준으로 격을 나누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보통의 삶―그러니까, 나인-투-식스 근무를 마치고 퇴근한 후에는 적당한 여가를 통해 휴식을 취하는 방식의 삶―이 아니라, 잔뜩 낡고 지친 상태로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아 또 다른 노동―심지어 손목과 허리에 큰 부담이 가며 골치도 아프다는 점에서 강도 높은 육체노동 및 정신노동―을 이어가야 하는 삶을 택한 것은 오히려 오롯하게 창작할 수 있는,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삶을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그들을 대신하여 힘주어 말하고자 먼 길을 돌아왔다.


대개들 작가들이 ‘겸업’ 혹은 ‘부업’의 타이틀을 다는 이유를 물질적인 것으로만 연관시킨다. 글만으로는 돈이 안 되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는 추측에 기반하여 말이다. 물론 부정 못할 이야기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영수 작가는 로또 당첨은 정말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로또가 되면 소설이 안 써질지도 모른다며, 그 돈이 진정으로 욕심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로또가 돼서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소설을 쓰게 되면 “너무너무 잘 쓰고 싶”은 마음을 배반해버리는, 그저 그런 소설이 써지게 될 것이 두려운 까닭이다. “그렇잖아. 아무 말이나 해서 채울 생각이면, 그런 글 쓸 거면 애초 소설 안 썼지.”


그러니 회사 생활은 정영수 작가에게 일종의 보험인 셈이다. 단순히 보험이라고 치기에는 생활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기에 납입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의 양이 어마어마한 생명보험이지만, 어찌됐든 그는 그 덕에 계속해서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글”을 쓸 수가 있는 환경에 놓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써낸 소설은 그를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만든다. 표면적으로야 고된 삶을 사는 듯 보여도, 글을 쓰기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사고하고 궁극에는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속에서 그의 삶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로 글만 써서 먹고 살 생각은 없다. …… 그래서 그는 글쓰기가 유일한 돈벌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돈으로 환산되지는 않아도,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글을 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가 원하는, 만족할 만한 글을 쓰기 위해 지금의 일(직장)을 하는 셈이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수입. 그 노동. 그 때문에 그는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창작에는 시급이 없다. 한 편의 글을 위해서는 명멸하는 커서와 기약 없는 독대를 이어나가야 하고, 그 시간을 견디는 건 오롯이 개인의 몫이며, 홀로 앉아 보낸 억겁의 시간은 돈으로 매길 수도 없다. 그 결과 작가의 51.4%는 자신의 직업 앞에 ‘겸업’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었지만,[16] 이를 통해 증명되는 것은 오직 고된 생활을 자처하면서까지도 쓰겠다는 마음이다. 글 한 편을 완성하는 데 대체 몇 시간, 며칠, 몇 달 심지어는 몇 년이 걸릴지, 그렇게 붙들고 있던 글이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독자들은 어떻게 반응해 올지, 그래서 나는 얼마만큼의 돈과 명예를 얻어낼 수 있을지 무엇 하나도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겸업이라는 이름의 낙하산을 착용한다. 그리고는 기꺼이 뛰어내린다. 이게 비행일지 혹여나 추락일지는 나조차도 모르지만, 아무렴 어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날고 있다는 사실 아니겠는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잘 쓰고 싶다는 일념으로 한데 뭉친 작가 생태계의 포식자는 다름 아닌 ‘관행’이다. 어떤 부조리한 요구도 앞에 관행이라는 말을 붙이게 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특히나 출판업계와 같이 상하 구조가 명확히 나누어져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출판문화협회(이하 출협)는 출판계의 발전, 그리고 책을 읽고 쓰는 사람들의 복리 증진을 위해 설립된 단체이다. 허나 실제 그들이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묵인 혹은 자행해오고 있는 것들을 살핀다면, 출협은 출판업자들의 울타리가 아닌 먹이사슬 속 포식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지난 5월에 발생한 장강명 작가와 출협의 갈등은 출협이 저자들의 편이 아님을 공공연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장 작가는 자신의 소설집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에 대한 출간 계약금이 늦게 지급된 것, 출간 이후에도 판매 부수 보고와 인세 지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유로 과학소설 전문 출판사 아작에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에 더해 출판사가 장 작가와의 협의 없이 오디오북을 제작·판매한 사실이 드러났고, 결국 아작출판사의 대표는 ‘그간의 관행을 바로 잡겠다’며 본인 명의의 사과문을 올리며 이와 같은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한 방안을 약속했다. 향후 저자들과의 계약 시에는 문체부의 ‘출판 분야 표준계약서’를 활용하는 한편, 출판유통통합전산망(이하 통합전산망)에도 가입해 발행된 책의 유통·판매 내역을 낱낱이 공개하겠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저자가 출판물에 대한 권리를 취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문제 상황이므로 이 과정에서 출협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출협은 아작출판사 대표의 사과문과 향후 개선 방안에 대해 “이번 사건은 아작출판사 한곳에서 벌어진 일이지 모든 출판사에서 관행처럼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라며 발끈했다.


출협이 반발한 지점은 크게 두 곳으로, 첫째는 ‘관행’이며 둘째는 문체부의 개입이다. 전자를 살피기 위해서는 후자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사실 출협과 문체부는 올해 초부터 꾸준하게 갈등을 빚어 왔는데, 그 중심에는 출판 분야 표준 계약서와 통합전산망이 자리했다. 지난 1월, ‘출판권 및 배타적 발행권 설정 계약서’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출협의 자체 표준 계약서에 의하면 출판물의 2차 저작권은 출판사에 위임되며 출판권 존속기간은 10년이다. 쉽게 말해 소설이 흥행하여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영상화될 기회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 작품이 출협이 도입하겠다고 밝힌 계약서를 통해 계약되었을 경우 작가는 새로이 만들어질 콘텐츠로부터 발생할 수익에서 어떠한 지분도 차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작가 단체는 불공정 계약이라며 들고 일어섰고, 문체부가 개입하여 계약 기간은 공란, 2차 저작물 저작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명시해둔 개정안을 고시하였다. 또한 문체부는 9월부터 정식 운영될 통합전산망의 도입으로 출판물의 유통·판매 현황을 수월히 파악하여 보다 투명하게 정산할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출협은 통합전산망의 운영 주체인 문체부와 출판진흥원의 수행 능력을 문제 삼는 한편, 문체부가 통합전산망을 ‘만병통치약 취급’한다며[17]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작출판사가 내놓은 대안은 결국 문체부가 출협에 가하는 압박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라는 것이 출협의 입장인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막을 알고 나면 되레 출협의 “모든 출판사에서 관행처럼 벌어지는 일은 아니”라는 입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분명해진다. 계약금 및 인세 누락이나 유통 과정에서의 불투명성이 만연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출협과 문체부가 투명한 출판업계 조성을 위해 씨름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백번 양보하여 출협 입장에서는 정부 정책을 출판계에 강제하려는 듯한 문체부의 태도가 마땅치 않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9월부터 가동한다는 것치고는 통합전산망이 완전하게 구축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다수 존재했으며, 무엇보다 문체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세종도서[18]가 과거 블랙리스트에 악용된 사례도 존재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쯤에서 다시금 상기하건대 출협의 설립 목적은 출판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데 있다. 출협이 가진 보호의 목적을 고려한다면 출협은 더더욱 장 작가가 입은 피해에 대하여 “대단히 예외적으로 벌어진 일탈 행위”라고 규정하면 안 됐다. 실제 작가들이 빈번히 겪는 고충을 아주 특수한 것으로 치부하고는 이를 방관하는 순간부터 출협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 특히 출협의 문제제기문이 발표되기 하루 전, 출협의 간부와 장강명 작가가 주고 받은 이메일에서 장 작가가 인세 누락에 대해 “작가들끼리는 정말 흔한 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하며 자신이 겪은 추가 사례를 토로한 것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림 2〉 출협의 간부가 장강명 작가에게 보낸 이메일(좌측)과 그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답장(우측) 출처: 장강명 작가 © 뉴스1


여기까지 읽었다면 사실상 출판업계에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휘두르는 폭력이 실재함을 알 수 있을 테다. 안타까운 점은, 출협의 작태를 통해 살폈던 인세 누락 및 유통 구조의 불투명을 제외―해서는 절대 안 되지만 일단은―하더라도 각종 ‘관행’은 아주 쌔고 쌨다는 것이다.


그중 작가 개개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바로 원고료와 관련된 사항이다. 어디선가 등장해 이제는 하나의 단어로 굳어진 듯한 ‘열정 페이’라는 신조어는 작가들에게도 남 일이 아닌데, 노동을 제공했으면 대가를 지불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소리가 무색하게도 원고를 청탁할 때 고료를 적확히 기재하지 않는 일은 역시나 ‘관행’이다. 심지어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면을 얻을 기회가 거의 없는 신인들에게는 아예 고료를 지급하지 않고 글을 요청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 이 얼마나 시정잡배도 울고 갈만한 일이던가.


돈 문제만큼이나 골치 아픈 게 바로 법 문제인데, 저작권과 관련한 ‘관행’에 대해서는 지난해 이상문학상을 둘러싼 논란과 보이콧을 들 수 있을 듯하다. 당시 작가와 독자들을 성토하게 만든 이상문학상의 ‘관행’은 저작권이다.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출판사인 ‘문학사상’은 수상작들을 한데 묶어 매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출간하는데, 이때 대상 및 우수상 수상작품에 대해 ‘저작권 3년 양도’ 및 ‘수상작을 다른 작품집의 표제작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조항이 포함된 동의서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에 2020년 우수상 수상자인 김금희, 이기호, 최은영 작가 등이 권리 침해 사실에 부당함을 표하며 수상을 거부하였고, 2019년 대상 수상자인 윤이형 작가는 원고지 27매 분량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입장문을 통해 윤 작가는 “제가 받은 이상문학상을 돌려드리고 싶다. 부당함과 불공정함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돌려드릴 방법이 없다. 저는 이미 상금을 받았고 그 상에 따라오는 부수적 이익들을 모두 받아 누렸다. 더불어 저작권 개념에 대한 인식 미비로 양도 문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에 제 작품을 그 일에서 떼어낼 수도 없게 됐다. 그래서 그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절필을 선언하였다. 윤 작가는 입장문의 말미에 윗세대 문학인들을 통해 만들어진 제도와 관행으로 인하여 젊은 작가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더 이상 자신이 무엇에 일조하는지 모르는 채 계속해서 글을 쓰는 것보다는 작품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 자신의 작품을 지키는 일일 것 같다며 천명하였다. 윤이형 작가의 절필 선언 이후, 2019년 우수상 수상자이자 2020년 우수상 수상 예정자였던 최은영 작가 역시 문학사상사에 사과를 요청하였고, 동료 작가들은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문학사상사 원고 청탁 거부의 뜻을 밝히는 한편 독자들은 문학사상사 출판물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그림 3〉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의 해시태그를 달고 전개되었던 청탁 거부 운동 ©경향신문


관행은 피해자를 다시 가해자의 위치에 놓는다는 점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과도 같다.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 출판사가 내민 계약서에 도장 찍었을 수많은 작가 전부가 ‘관행’을 가장한 권리 침해에 동의했다는 뜻은 당연히 아닐 테다. 그러나 계약이 체결된 순간부터 작가는 출판사와 공생 관계를 맺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는 관행을 더욱 공고히 한다. 물론 이상문학상 사태, 장강명 작가의 인세 누락 논란 등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며 출판계의 권리 침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졌고, 출판사도 이를 의식한 듯 황급히 외양간을 고치고는 있다. 그러나 수리했답시고 내놓은 외양간의 빗장마저 헐거운 지금,[19] 작가들은 어디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하나.



정글에서 살아남기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자성의 목소리는 분명 출판계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지만, 사실 몇십 년에 걸쳐서 쌓아온 관행을 한 번에 타파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 코로나19로 인해 공연 및 전시 등의 규모가 축소되며 예술계 전반이 주춤하게 된 상황은 작가들로 하여금 돌파구를 고안하도록 했다. 누구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고, 무엇보다 나의 권리와 생활을 지켜가면서 지속적으로 예술할 수 있는 시스템 바깥의 방법이 절실해졌다.



플랫폼-되기

작가들이 찾은 해답 중 하나는 스스로 플랫폼이 되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급속도로 성장한 ‘메일링’이 그 예시인데, 신문사나 잡지사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구독 시스템은 이제 작가들이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창구로써 활용되고 있다.


문학계로 메일링을 끌고 들어온 최초의 인물은 바로 ‘헤엄출판사’의 대표 이슬아 작가이다. 이슬아 작가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월 구독료 1만 원의 가격에 매일 자신의 수필을 보내주겠다는, 그 포스터마저 당돌한 제안을 하기에 이르는데, 문단 메일링 서비스의 시초이자 그 이름도 유명한 〈일간 이슬아〉의 시작이다.


〈그림 4〉 〈일간 이슬아〉 2018년 4월호 포스터

〈일간 이슬아〉의 대성공은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출판사나 언론사로부터 자유로운 게, 그리하여 등단 장사[20]나 위탁 판매에 놀아나지 않으면서도 고료는 온전히 나에게 떨어지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다니! 이슬아 작가가 개척한 이 길은 특히 원고를 선보일 기회가 적은, 혹은 기존의 당선 모음집에 작품을 게재하기를 거부하는[21] 신인들이 날아오를 활로가 되었다. 2020년 한국일보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차도하 시인은 자신의 시, 그리고 그 시를 낭독한 음성 파일을 보내는 자작시 낭독 메일링 서비스 〈목소리〉를, 같은 해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당선한 이원석 시인 역시도 일주일에 한두 통씩 총 100통의 편지를 보내는 메일링 서비스 〈편지 100통을 보냅니다〉를 시작했다.


메일링 서비스 이외에도 작가들이 스스로 되어보고자 한 플랫폼은 다양하다. 주제 의식도, 필진의 성격도 가지각색인 웹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출판에 필요한 초기 자금을 해결할 수 있게 되면서 문예지, 에세이, 시집, 소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독립’을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플랫폼-되기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뿐더러, 기존에는 편집자, 마케팅 부, 그 외 (내가 모르는) 출판사 내의 여러 부서가 나누어 담당하던 업무를 작가 개인이 모두 부담해야 한다는 점에서 작가가 창작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요인이 된다. 결국 메일링이나 웹진 등의 수단은 부가 되어야지, 창작 활동의 주가 되기에는 명확한 한계점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플랫폼-되기를 포기한 작가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결국 기성 출판업계이다. 그러나 출판업계는 작가들이 스스로 플랫폼이 되는 일의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뛰쳐나오고자 했던 곳이니 무턱대고 그들에게 다시 출판사로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영원히 출판업계의 관행과 플랫폼-되기의 굴레 속에서 빙빙 돌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약육강식의 전복

길 잃은 작가들을 인도해줄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하고 싶지만, 결국 이들이 계속해서 책을 내고, 그 책을 통해 수입을 내며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이들을 끌어내리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쌓아온 관행이니 이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더 센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할 것이며 작가 집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인세 누락이나 저작권 권리 침해와 같은 밥벌이와 직결된 문제부터, 2016년 해시태그 ‘#문단_내_성폭력’을 통해 전개된 부재한 윤리 의식의 고발까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가능한 한 모든 일에 말이다.


출판계의 관행을 타파하기 위한 내부의 목소리는 작가 집단뿐만이 아닌, 출판업 종사자들에게서도 들려오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출판노조협회는 2020년 정부가 발표한 정부포상 대상자에 포함된 ‘갑질’ 출판사에 유감을 표하며 출판업계의 노동환경이 심하게 저해되어 있음을 폭로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들춰낸 출판사의 ‘갑질’은 작가들의 권리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출판노조는 출판사 ‘한솔교육’에 대해 “한솔교육과 한솔수북이 『구름빵』 저작권을 두고 벌인 일은 갑질의 전형적 형태였다”며 “당시 신인이었던 백희나 작가의 지위를 악용한 이 회사는 저자의 계약서 수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작품은 회사 입맛에 맞춰 저작자 의도와 다르게 변형됐다”고 지적했다. 즉 출판사가 계속해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한 생태계의 밑바닥에 자리하는 이들은 점점 불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때 작가들과 출판 노동자들은 물론, 출판사가 발행한 책을 구매해 읽는 독자들까지도 이 악순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게 된다. 이미 한 차례 언급했듯, 관행은 설령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할지언정 그를 묵인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새 관행에 가담하게 된다는 생존 방식을 통해 여태 살아남아 왔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전략은 한편으로는 피라미드의 최하위층이 순순히 그들의 먹이감으로만 남아있지 않는 이상 포식자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태계의 진리를 내포하기도 한다. 현재의 먹이사슬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피식자들의 연대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피라미드 위에서 자성의 외침이 들려오길 기대하기보다는, 차라리 ‘쓰고 읽는다’라는 테제 안에서 나 역시도 생태계의 밑바닥에 위치하는 하나의 개체임을 깨닫는 것이 우선일 테다. 수많은 개체들이 모이고, 이들이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무리를 형성하는 순간 약육강식의 사슬은 끊어지고 심지어는 견고해 보이던 피라미드의 구조마저 전복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적는 자, 그리고 생존

글을 쓰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작가들은 바보 멍청이가 분명하다. 뜬금없이 이 무슨 유치한 언행이냐며 놀라셨을 와중에 죄송하지만 더 유치한 말장난 하나만 보태자면, 아마 그들은 초등학생(혹은 국민학생)일 적 교과서에서 봤던 ‘적자생존’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단단히 오해한 나머지 진짜 적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줄 알고 먼 길을 떠나게 된 게 아닐ㄲ… 그만하겠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웃지 않으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웃었다면 그때부터 이 글은 ‘21 가을호’ 폴더 속 한낱 파일이 아닌, 무한한 정동의 분수가 된다. 눈치보지 않고 ―사실 좀 봤다― 내 할말을 했다는 데에서, 심지어 당신이 웃었다는 데에서 오는 이 카타르시스! 이 후련함이야말로 작고 소중한 문인들을 험한 우림으로 꾀어내는 꽃노래일테지만, 세상에는 알면서도 기꺼이 속아주는 것들이 있다. 오랜 시간 마음 속 말들을 뒤지고 뒤지다가 파밧- 하고 무언가 튀어오른 순간, 그 찰나의 황홀함을 경험해본 자라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든지 간에 숲으로 향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쓴다는 일은 자아를 실현하고 있다는 만족감으로 해내는 것이 맞을 테지만, 그리고 나 역시도 자아실현 그게 대체 뭐라고 굳이 먼 길을 떠나려 하고 있지만, 정말로 자아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단계가 필요하다고 웬 삼각형은 주장한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에서 ‘자아실현의 욕구’는 가장 상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본능적인 신체 기능이 무사해야 하고, 안전해야 하며, 상호작용을 통한 타인으로부터의 존중까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작가들의 삼각형은 종종 무너지고 마는데, 그들에게는 여전히 창작의 영역 바깥에서 가해지는 압박이 너무나도 많으며 요새 뭐하고 사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몇 초간의 망설임과 멋쩍음을 견뎌내야 한다는 여전한 고충이,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들로부터 오는 모든 상념을 애써 무마하려는 습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차차 숲을 잃어갈 세계에서 살기란 정말이지 숨차는 일이 될 텐데. 매일을 꽃노래만 부르며 살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꽃노래는 계속되어야 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허밍에 귀 기울일 때, 그제야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무시무시한 포식자가 아닌 향기를 좇아 날아온 나비 한 마리가 빙빙 돌 것이다.


 

 

後: 바다와 나비

그렇기에 모두가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주어도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나비는 바다에서도 훨훨 날 수 있는가 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고 나는 어렸을 적 보았던 열흘 나비가 되어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친다. 더 이상 어릴 수 없는 어느 날, 내 날개가 이내 물결에 절고, 어쩌면 나비는 바다를 날 수 없음을 깨달아 공주처럼 울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무렴 어때. 한 번 본 너를 붙잡기 위하여 나는 찰나를 산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날고 있다는 사실, 그뿐이다.




편집위원 열음 / yeoleumse@gmail.com




[1] “2009년 10월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문화‧예술산업 근로실태조사 및 근로자 보호방안’ 보고서에서는 크게 ‘애니메이터’를 비롯한 애니메이션 영역 종사자, 만화가나 어시스턴트를 비롯한 만화 영역 종사자, 편집자 등을 포함한 출판 산업 종사자를 대상으로 노동자성 인식 여부에 대한 조사가 나온다. 각 영역마다 조금씩 차이는 발생하지만, 특정 회사와 근로계약을 맺지 않은 ‘프리랜서’나 ‘임시, 일용직’일수록 자신을 노동자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 자신을 예술인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상당했다(성상민, 2020.05.02.).”

[2] 2010년 있었던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이진원)의 죽음과, 2011년 있었던 최고은 작가의 죽음은 예술인 노조와 「예술인 복지법」이 만들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두 죽음 모두 가난이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었지만, 고인들이 생전 생활고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특히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의 경우 인디 씬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SNS 음원 판매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했음이 밝혀져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3] 브라이언 윌슨은 예술 노동자라는 말 안에 우리 시대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모순을 대변해주는 특별한 의미가 담겼다는 점에서 ‘예술 노동자’라는 명칭으로 예술업 종사자들을 호명하고자 했다.

[4] 「예술인 복지법」은 2012년 11월 18일부터 시행되었으며, “예술인이 가진 직업으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보호하고 복지 지원을 통해 예술인의 창작활동을 증진시키기 위한” 법안이다.

[5] 2009년 발의되었던 법안에서는 예술인을 근로자로 의제(擬制)하여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방안이 규정되어 있었으나, 노동법상 ‘근로자’ 지위가 지나치게 확대된다는 점, 대상 예술인의 범위와 기준 설정이 어렵고, 다른 집단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 등이 반대 의견으로 제기되었고, 최종적으로 예술인의 근로자 의제 조항과 고용보험 관련 조항이 삭제되고 산재보험 관련 조항만 남게 되었다. 또한 발의 법안에 들어 있던 ‘예술인복지기금’ 설치 관련 조항이 제정된 「예술인 복지법」에서는 삭제되었고, 대신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내에 ‘예술인복지금고’를 설치·운용한다는 규정이 포함되었다.

[6] 문체부는 문학, 미술, 건축, 사진, 음악, 국악, 무용, 연극, 영화, 대중예술 등의 10개 분야에 종사 중인 2,000명의 문화예술인들을 대상으로 「2012 문화예술인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4대 보험 중 ‘건강보험(의료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에 가입한 응답자 비율은 각각 97.8%, 66.7%, 27.9%, 30.5%로,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에 대한 가입률이 절대적으로 낮았다.

[7]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프랑스의 사례를 참고하여 예술인을 고용보험 대상에 편입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많은 예술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실제 개정안은 높은 수급조건 때문에 극히 일부가 아니면 가입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심지어 이때의 고용보험제도안은 지난 정권의 조훈현 의원이 발의한 「예술인 복지법」 개정안에 근거하였다는 점에서 과거의 낡은 정책으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제정이었다.

[8] 문화예술노동연대는 게임개발자연대, 공연예술인노동조합, 무용인희망연대오롯, 뮤지션유니온, 어린이청소년책작가연대,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여성노조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전국예술강사노동조합,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등으로 결성된 문화예술단체의 연대체이다.

[9] 개선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기존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던 노동자와 자영업자 외에, 용역계약을 통해 일하는 프리랜서 예술인을 대상으로 당연 적용한다. 보험료는 예술인과 사용자가 공동 부담하며 임금노동자와 유사한 수준으로 부담한다. 우선은 실업급여와 출산전후휴가급여 지급부터 시작하고, 고용안정이나 직업능력개발 사업은 추후 적용을 검토한다. 실업급여는 이직 전 24개월 동안 9개월 이상 보험료를 납부한 비자발적 이직자 및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감소로 이직한 자에게 지급한다.(이근선, 2019.09.04.).”

[10] 2020년 12월 10일 이후 시행된 예술인 고용보험제도 기준, 근로자이거나 65세 이후 문화예술용역 계약을 체결한 예술인, 계약 건별 소득 50만 원 미만 예술인은 가입 대상에서 제외된다.

[11] 유계영 (2019).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12] 웹(web)과 매거진(magazine)의 합성어로, 지면으로 출판되지 않고 인터넷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기획된 잡지 형태를 의미한다.

[13]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같은 문단의 범주에서 묶을 수 있는지의 논의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도록 한다. 이 글에서 지칭하는 ‘작가’는 쓰는 사람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임을 염두에 두고 글을 읽어주신다면 감사하겠다.

[14] 현재 문단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정세랑, 김금희, 구병모 작가는 모두 편집자로 일하며 소설 창작을 병행했다. 이 중 정세랑 작가의 경우 대학 시절엔 광고마케팅 업계에서 인턴을 했다고도 한다.

[15] 강화길·정영수 외 (2020). 20-21

[16] 문체부에서 실시한 「2018 문화예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예술인의 42.6%가 겸직하고 있으므로, 겸업 작가의 비율은 겸업 예술인을 통틀어서도 높은 편이다.

[17] [뉴스+]문체부-출판계, 출판유통통합전산망 놓고 갈등 빚는 이유는 (2021.05.21.). 이데일리.

[18] 세종도서는 2005년부터 국내 문학 활성화를 위하여 국내 우수 창작도서를 선정하여 보급화하는 사업이다.

[19] 지난 2020년,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출판사 ‘문학사상’은 이상문학상 불공정 논란을 의식한듯 ‘저작권 3년 양도’ 조항을 정정하고, 예정되어 있던 제44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발표를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2021년 8월, 임지현 문학사상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2019년 출간된 ‘이상문학상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의 일본어판 도서를 2020년에 발행했다” “일본어판 도서를 일본 출판사와 계약하는 과정에서 작가분들께 번역 출간에 대한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얼마 전 알게 됐다”며 권리침해를 인정하고 사과를 구했다.

[20] 등단 장사란 출판사가 자회사의 문예지를 통해 신인을 데뷔시키며 그에게 도서 구입, 문예지 구입 및 평생 구독 등을 권하는 일을 말한다.

[21] 그해의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을 모은 『신춘문예 당선 시집』은 1999년부터 ‘문학세계사’에서 매년 펴 내고 있는데, 201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성다영 시인이 트위터를 통해 “문학세계사는 ‘#문단_내_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김요일 시인이 기획이사로 있던 출판사”라며 자신의 작품을 게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후 이원석, 조용우, 차도하 등의 시인 역시도 『신춘문예 당선 시집』에 당선작을 싣자는 문학세계사의 원고 청탁을 거절하며 뜻을 같이 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철식 외 8인 (2021). 모두를 위한 노동 교과서. 오월의봄.

이동연 (2018). 예술@사회. 학고재.


논문 및 저널

강화길·정영수 외 (2020). 자음과 모음 2020.봄(44호). 자음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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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주간지 공감 (2021. 06. 29.). "예술도 노동으로 인정해주는 과정이라 반갑죠" 예술인이 말하는 예술인 고용보험은? [온라인 블로그]. 접속일 2021. 09. 12. Retrieved from https://blog.naver.com/mcst_pr/22241435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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