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노동'] 편집위원 해진
… 싶다.
… 싶다. 돈을 정말 많이 벌고 싶다. 얼마 전 엄마와 밥을 먹다 읊조렸다. 엄마, 돈이 많으면 삶이 심플해지더라. 그래서 돈을 정말 많이 벌고 싶어. 자취를 해서 그런가, 이런 생각을 요즘 해.
내게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냐 넌지시 묻는 아빠의 말에는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뭐 이것저것 찍고 쓰고 생각하고 만들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고 싶기도 하고… 그럼 좀 힘들긴 하겠죠.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긴 한데, 또 CPA 행시 로스쿨 이런 거 시험만 정해지면 열심히 할 자신은 있거든요. 뭔가 안정적으로 살고 싶달까요. 둘 사이에서 고민 중이에요. 잘 모르겠어요.
부동산 문제를 두고 싸운 것이, 그냥 먹고 살만큼의 돈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며 엄마에게 따지던 것이 작년이었다. 또 고등학생 시절 내게 수시 전형으로 한의대나 치대 같은 거 뭐라도 쓰자던 엄마의 말, 댁에 갈 때 마다 고시, 행시, 연봉을 말하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그저 자유로운 내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일뿐이었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지며 그들의 말이 점점 이해될 때, 무언가 두려워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일단 나만큼은 돈을 많이 버는 정규직 노동자, 또 될 수 있으면 유능하고 성실하며 안정적인 삶을 사는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닥뜨린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더 두렵게 했던 것은, 이것이 내가 사회를 티끌만큼이나마 더 알게 되었다 자부할 때 즈음의 인정이었다는 점이다. 작년의 나는, 적어도 고등학생 때의 나는 이담에 ‘어른이 되어’ 이런 생각을 할 줄 짐작이나 했을까.
어쩌면 그 당시의 나는 하고싶은 것 다 하며 살아도 소위 ‘평균의 사람들’보다는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유능한, 고소득의, 성실한 정규직 노동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당연히 내게 예정되어 있다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아마 내가 운 좋게도 크게 돈 걱정할 필요는 없는 가정에서 자라 그래도 우리 지역에선 알아주는 좋은 학군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자사고에 다닌 탓이 클 테다. 고등학교 시절 내 주변 아이들은 대부분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꽤나 ‘안락한’ 환경에서 인서울 명문대, 혹은 전문직의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는 대학 진학을 희망했었고, 이 한 가운데 놓인 나는 흡사 온실 속 화초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엘리베이터가 없던 학교 건물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힘들게 급식 카트를 옮기던 급식 아주머니, 화장실 옆 조그만 휴게실에서 쉬시던 청소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느끼던 이상한 울렁거림, 그러니까 나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순간의 자책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스스로의 욕망을 받아들이던 즈음, 지난 여름호 소특집 '노학연대' 속 글들[1]을 읽으며 뭐든 해보고 싶었던 마음 또한 가슴 한구석에 치워 둘 수 없었다. 그건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삶과는 상반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행복 또한 내가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었으며, 진심으로 그들과 연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둘이 양립 가능하다 주장하는 것은 내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기를 바라며 그들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에 지난 8월 10일부터 9월 5일까지 약 4주간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 설문조사에서는 크게 노동자, 노동, 사회에 대한 인식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질문을 던졌으며, 그 결과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이 나와 같은 대학생인 73명의 응답자들[2] 중 많은 이들이 “유능”하며 “성실한”, “전문직 혹은 사무직”, “높은 임금을 받는”, “정규직”의 노동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러면서도 그들 대부분은 자기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며 그 신념이 “인생의 수많은 선택들에 주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고 답하는 한편,[3] 여러 가치들 중 아래와 같은 가치들을 가장 중요히 여긴다고 응답하였다.
자유, 사랑, 정의, 자유와 정의, 행복, 평등, 믿음, 존중, 신뢰, 이타심, 올바름, 평화, 사랑과 연대, 신념, 스스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삶, 행복과 깨달음과 기여, 해방, 진리, 권력, 여유, 성취, 존중, 성장, 공정, 이 모든 가치들이 보장받을 수 있는 … 무위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 자유와 평등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믿는 것.
그들이 말하는 신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자유, 사랑, 이타심, 연대, 존중, 평등의 가치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바라는 나의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이 사랑하는 자유, 사랑, 연대, 이타심, 평등과 올바름의 가치들과 연결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저마다의 신념을 가진 그들도 나와 유사한 욕망을 품으며 산다는 걸 확인하니, 우습게도 마음이 편했다. 조금은 안주해도 되겠다는 부끄러운 안도감에서였는지, 아니면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그 순간, 작년 서문학사 수업에서 배운 희곡 『피의 혼례』가 머리를 스쳤다.
『피의 혼례』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 결혼식 날 ‘신랑’과 마을 사람들을 피해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던 ‘레오나르도’와 ‘신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작품의 해제자는 희곡 속 인물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레오나르도와 신부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그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랑이라는 순수하고도 비극적인 힘의 희생자들이며, 그 맹목적인 힘에 이끌린 그들은 운명의 세계에 있기에 “설명할 잘못도 설명할 가치가 있는 …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해명”도 없다고 말이다.[4] 그들이 휩쓸렸던 사랑이라는 욕망은 본능적이었고, 자연적이었고, 진실된, 어쩔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싶다’고 말하던 나 또한 그 순간 맹세하건대 진실되었었다. " 어떤 힘에 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동안 머리를 맴돌던 상념이 내뱉어진 무엇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피의 혼례』 속 인물들처럼 운명처럼 정규직의, 고임금을 받는, 유능하고 성실한 노동자를 순수하게 욕망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욕망들이 순수하다는 사실은, 『피의 혼례』의 해제자가 레오나르도와 신부는 윤리의 영역 너머에 있다 말한 것처럼 우리 또한 윤리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해줄까.
( )는 … 싶다
73명의 응답자들은 “훗날 내가 전문직 혹은 사무직”의 노동자가 될 것 같냐는 문항을 제외하곤, “능력이 좋으면 일자리는 따라오는 것”, “그 능력은 개인이 스스로 기르는 것”이냐를 묻는 문항, 그리고 그들이 훗날 “정규직”의 “돈을 많이 버는” 노동자가 될 것 같냐는 문항에 관해서는 의견이 비교적 크게 갈렸다. “남들보다 우월해지고” 싶냐거나 “물질적인 부를 압도적으로 더 많이 누리고” 싶냐를 묻는 문항 또한 마찬가지였다.[5]
하지만 그럼에도 앞서 보았듯 ‘유능하고도 성실한, 돈을 많이 버는, 전문직 혹은 사무직의 정규직’ 노동자가 되고 싶은 욕망만큼은 유사했다. 이때, 나는 다른 욕망과 인식들에 비해 훨씬 단단하게 자리잡은 이러한 욕망들이 ‘레오나르도’와 ‘신부’의 것처럼 정말 진실되고 본능적인지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타인과 함께 하는 삶, 거창하게는 ‘윤리’를 되돌아볼 필요가 없겠다. 하지만 만약 그것들이 외부 환경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우선 윤리를 물을 가능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누군가는―내가 행복을 바랬던 그들의 삶과는 반대편 어디 즈음에 놓인―그 욕망들[6]을 조금은 내려 놓자 마음먹을 수 있고, 적어도 우리를 그렇게 만든 사회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유능하고 성실한 노동자
더 많은 능력을 갖추기 위한 자기 계발은 직장인들의 일상이며, 충분히 성실하지 않은 노동자는 노동자답지 않다는 인식은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출현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스며든 것이었다.
자유주의 노동시장은 간단히 말해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상품의 가격이 자연스럽게 정해진다는 시장 경쟁의 논리를 노동시장에 적용한 것이다. 이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은 상품이, 임금을 비롯한 노동조건은 가격이 되어, 노동자들 간의 경쟁은 당연시된다. 그러니까 자유주의 노동시장의 사람들은 스스로 ‘잘 팔리는’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길 위에 서있다. 그들은 ‘잘 팔리기’ 위해 경쟁력을 갖춰야 하고, 그를 위해선 스스로 노력할 수밖에 없다. 능력을 갖춰야 함은 물론, 고용주의 마음에 들게 성실하기까지 해야 한다. 미셸 푸코는 이러한 현대인들을 두고 ‘인간-기계’라 부른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기계이자 자본으로 여기고 최대의 경쟁력을 만들어 내려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자본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의 자본은 ‘자본’이 아니라 이들 자신의 몸(과 정신)이란 것뿐.[7] 만약 능력을 키울 환경에 있지 않다면, 성실하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기에 내가 행복을 바라는 그들도, 성실하다는 점에서는 우리의 욕망과 궤를 같이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놓인 현대인은 유능함과 발전 및 성실이라는 ‘가치’와 자신을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누더기를 걸친 자본가’가 되었다.
노동자의 유능과 성실은 또한 노동자로서의 자기 계발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지속적인 자기 경영 속에서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은 유능하고 성실한 노동자가 되고 싶어하기도 했지만,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 또한 욕망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노동자이기보단 그러한 사람이고 싶어 했다.[8] 이것은 경쟁 속에서 ‘괜찮은’ ‘노동자’가 되려는 노력이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노력으로 이어짐을 방증하는 한편, 점점 불안정해져 가는 노동 시장과 평생 직장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져 가는 현대 사회[9]에서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자기 관리의 늪에 놓인 현대인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노동 또한 이러한 경향에 기여했다. 자본주의 사회 초기의 공장 노동자들은 농업 중심 생활에 익숙했던 터라 출근 시간을 지키지 않거나 할당된 생산량을 채우지 않는 등 태만한 근무 태도를 보였다. 더군다나 이들에겐 공장에서 어떤 동작과 어떤 속도로 일을 해야 한다는 인식 또한 거의 없었다. 그러나 자본가는 이들에게서 최대의 효율을 이끌어내야 했다. 그는 곧 태만한 노동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개개인의 생산량, 근무 태도 등을 임금과 결부지어 노동자들이 정확히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끔 만들었다.[10] 예컨대 몇 건당 얼마 하며 그에게 제안하고,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1분에 몇 번 어떤 방식으로 삽질을 해야 한다는 식의― 움직임이 그에게 체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선 그가 있어야 하는 위치를 정확히 지정하고 그의 삶에 24마디로 분절된 시간 개념을 주입하여 분명한 출근 시간을 정하고 노동 시간과 쉬는 시간을 정확히 나누고 결국 그가 적절한 능력과 노동자로서 ‘알맞은’ 태도를 기르게끔 하였다. 테일러주의(Tailorism)로 불리는 이 과학적 관리 기법은 노동자의 일터에서의 움직임만을 규제하지는 않는다. 시간을 분절하고 신체를 통제해 총체적인 성장과 관리를 지속하려는 경향은 사람들의 몸가짐,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이어졌다. 우리 또한 학생 때부터 시간표·스케쥴러·투두(To-do)리스트 등으로 스스로를 관리하라 ‘제안’받지 않았던가.
노동시장이나 고용주의 요구와 같은 외부적인 요인들만이 우리를 유능하고 성실한 노동자이자 인간으로 이끌었던 것도 아니다. 한 체제가 강요와 명령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듯이, 그것은 개개인의 자발적인 동참을 거쳐 하나의 헤게모니로 정착해왔다. 자유주의 이념의 부상은 인권·시민권·근대사회의 출현과 촘촘이 얽혀 있는데, 근대 이후의 통치는 이전처럼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그를 쓸모 있고 성실하게끔 만드는, 그것도 스스로 원해 그런 사람이 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죄수에게 가혹한 형벌을 주기보다는 그를 감옥에 수용하여 사회에 어떻게든 기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게끔 교정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시기에 함께 급속도로 정교해진 학교, 병원, 군대 등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이 운용된다.[11] 예컨대 학생들은 학교에서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들으며 정해진 자리에서 일정한 자세로 한 나절 이상을 보낸다. 또 심화된 내용을 ‘차근차근’ 가르치는 교육 과정에는 발전이라는 기제가, 또 발전이 ‘좋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성장과 관리는 일상이자 이상이 되어 왔다.[12]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를 자본 삼아 성장시키고 관리하는 자본가’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이라 하면 이미 ‘성장하며 관리하는’ 사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괜찮은’ ‘노동자’이기 이전에 ‘괜찮은’ ‘인간’이어야 하는/이고 싶어하는 우리는 ‘누더기를 걸친 자본가’가 되었다. 함께 들어서면 걸어야 하고 걷다 보면 뛰어야 하고 그러다 날아야 하는 길 위의 자본가, 자기 자신을 경영해야 하는 자본가. 유능하고 성실한 노동자, 적어도 그러한 인간이고 싶어하는 ( )들.
돈 많이 버는 노동자
우리가 고임금의 일자리를 욕망하게 된 배경에 대해선 사실 앞에서처럼 거창한 이론을 끌어올 필요도 없다. 계좌 잔액이 네 자리수를 맴돌 때는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만날 수도, 걸어다니는 것 외에는 혼자 밖에서 무언갈 자유로이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만약 누군가 이러한 상황에 지속적으로 놓인다면, 주변인이 식사와 기타 등등의 비용을 지불한다 해도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사람들과의 만남도 멀리 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열정도 자유도 갖지 못하리라. 더군다나 월세, 식비 등의 기본적인 지출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면, 그는 절대적인 제한과 불안 속에 있게 되지 않을까.
이렇듯 ‘제한’ 및 ‘불안’과 반대되는, ‘자유’와 ‘안정감’으로 요약 가능한 돈의 가치는 자본주의 사회 내 궁극적인 가치로서 정착한 화폐 및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관련되어 있다. 화폐는 상품과 교환될 수 있다는 ‘교환가치’를 가지는데, 화폐의 교환가치는 물건의 그것과는 다르게 개별 사물들의 모든 차이를 제거하고 그것들로 전환될 수 있으므로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토마토, 영화 티켓, 『자본론』이라는 책, 들판, 이 모두는 가격이라는 추상적 가치로 치환 가능한데, 화폐는 바로 그 추상적 가치를 매개 삼아 그 무엇으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폐를 많이 보유한 사람은 많은 ‘자유’와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부(富)와 부자(富者)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13]
사실 전(前)자본주의사회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여러 물자들을 부족 혹은 공동체 내에서 자급자족했다. 또한 원시사회에는 굶어 죽는 공동체는 있어도 굶어 죽는 개인은 없었다고 한다. 증여와 기부, 공동체 내에서 자원을 나누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출현 이후 필요한 자원들은 대부분 상품으로서 매매 행위를 통해 수급된다. 사람들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화폐가 필요했고, 생산수단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임금을 받아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14] 또, 화폐는 개인에게 자유를, 심지어는 가치와 정체성 및 권력을 부여하므로 이전 사회에서처럼 재화와 자원이 증여 혹은 기부의 방식으로 나눠질 수 없었다.[15] 현대 사회에서는 아주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증여가 이뤄지고, 기부 또한 주로 형식화된 경로를 통해서만 이뤄지지 않는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 살기 위해선 돈이, 돈을 위해선 노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다.
이렇듯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돈은 인간에게 안정적이고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으로, 엄청난 가치로서 존재했다. 노동자라면 ‘돈 많이 버는 노동자’가 되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은,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한 기반이자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돈에 제한시켜버린 사회 조건으로부터 구성되었던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
한편, 우리가 정규직 노동자이길 바라는 것은 이미 비정규직 노동자의 존재가 당연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비정규직으로 분류되는 임시직·일용직의 고용 형태는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해도 아주 예외적으로 존재했었다. 심지어 ‘비정규직’이란 단어는 2008년에서야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에 ‘정규직’과 함께 신조어로 등재되었었다.[16] 비정규직 노동자를 당연하게 여기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97-1998년의 경제위기를 거치며 많은 국내 기업들은 부도를 겪었는데, 경기가 회복되며 고용이 다시 활성화된 이후 그들은 노동자를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대거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대신, 그들이 요구했던 각 기업의 구조조정, “상품시장과 금융시장 개방, 공공 부문 민영화, 노동시장 규제 완화” 등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였다. 당시 구조조정으로 인해 대량해고 되었던 노동자들은, 이후 기업친화적으로 유연해진 노동 시장 속에서 이전과 달리 비정규직의 지위로 재고용된다. 기업들은 나아가 정규직 채용이 아닌 비정규직 채용의 비율을 지속적으로 늘려갔고, 그 결과 20여 년이 지난 현재 '비정규직'의 존재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기업들은 신규 채용을 줄이고 비정규직 고용을 늘리는 동시에 공채 시험 통과의 여부, 직무의 중요도 등을 기준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어, 연차 수당에서부터 시작해 주차비 공제, 명찰에 있는 줄의 개수, 재직 증명서 발급 등등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를 노골적으로 차별한다.[17] 이는 노동자들을 갈라치기 해 그들이 고용·소득·사회보장 불안정 등의 문제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끔 하려는 ‘노동통제’의 시도이다. 노동통제란 노동자를 유순하게 만들기 위한 기업의 전략 전반을 말하는데, 현대의 노동통제는 그들을 단순히 억압하기 보다는 갈수록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경쟁키시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18] 기업이 부과한 지위, 직위를 통해 분류된 노동자들은 그들 내부의 경쟁 혹은 정규직 대 비정규직 노동자간의 경쟁을 우선순위에 두거나, 각자의 이해관계가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 분열된다. 이렇게 소위 ‘안정적인’ 일자리, 정규직으로의 관문이 점점 좁아지며 노동자들이 위계화되고 그들 각각에 대한 다른 처우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19] 우리들이 정규직을 희망하게 된 것은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 )는 어떡해야 하나.
이제 알게 되었다. … 싶은 우리의 욕망은 역사적으로 구성되었을 수 있고, 우리는 운명의 세계 아닌 어디멘가 있다. 이제 윤리를 말해볼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다. 내 욕망(이자 이상)과 배치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우리의 욕망으로 지탱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쩌면 이미 속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 ‘싶다’들을 조금은 내려 놓아, 지금의 체제에 조그마한 균열이라도 내는 것.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인류가 밟아온 역사에 의해 그들과 우리가 같은 배에 올라있음을 상기해야 할 듯했다. ‘그들을 돕는 것이 우리를 돕는 것’이라는 식의 사고 자체가 일종의 기만이긴 하지만, 이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우선,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을 보장하고 노동자 간 위계를 줄이는 것은 정규직 노동자에게도 큰 이익을 준다. 교통약자들을 위한 대중교통 환경 개선이 일반인들에게도 큰 편의를 주듯이 말이다.[20] 비정규직이 부담하는 위험은 결국 기업이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정규직 또한 얼마든지 마주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기업은 재정이 악화될 때마다 비교적 자르기 쉬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먼저 해고하고, 원래 본사에서 담당하던 업무를 하청 업체에 맡기거나 회사를 분사와 자회사로 쪼개 외주화한다. 이렇게 책임질 필요 없이 자신들의 편의에 맞게 다룰 수 있는 노동자를 늘리려는 경향은 결국 기업의 ‘사정’에 따라 정규직에게도 공식적인 정리해고를 비롯한 권고사직이나 희망·명예 퇴직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혹은 외주화로 인해 정규직이 담당하던 업무가 아예 사라질 수도 있겠다. 비정규직의 고용 불안정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혹여 비정규직의 문제가 정규직의 그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더라도 시험, 능력 등으로 둘 사이의 위계를 나누는 것은 같은 기업 내, 나아가 같은 사회 내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일상적인 경쟁과 성장, 성과라는 의무를 떠안긴다.[21] 그리고 그것들만이 강요되는 일터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더군다나 고용되는 노동자와 고용하는 회사라는 관계에서 노동자는,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들의 노동 환경에 대해 제대로 항의할 수 없다. 그들의 생계는 일자리와 직결되는데, 비정규직 노동자는 언제라도 해고될 수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규직 노동자들이 부조리한 노동 조건에 대해 항의해야 할 때, 기업이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많은 일자리가 비정규직으로 대체된 순간이 온다면, 그 목소리는 사방이 막힌 작은 방에서 맴돌테다.[22] 그러니 둘은 서로의 목소리를 도와야 한다.
한편으로 능력이나 근면·성실을 기준 삼아 개인의 노력과 성장만을 요구하는 현실을 그대로 수용했을 때의 문제점 또한 생각해야 한다. 사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개개인이 정말 유능하고 성실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혹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업 친화적인 자유주의 노동 시장이라는 조건, 즉 자연화된 노동자들 간의 경쟁 속에서 차별적인 임금과 노동조건을 전제로 하면서도, 점점 불안정한 일자리가 늘어가는 상황에 기인한다.[23] 이러한 구조를 내버려두고 고용불안정과 실업의 문제를 개개인의 책임만으로 돌리는 것은 결국 또다시 사람들을 자기 계발과 성장의 늪으로, 불안이라는 늪으로 몰아넣는다. 그러한 와중 능력을 개발하거나 성실할 수 있는 정신적·신체적·경제적 조건에 있지 않은 이들은 표면적으로 ‘공정하게’ 뒤떨어진다.[24]
이뿐만이 아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유능함을 잣대 삼아 사람들을 위계화 하고 발전을 삶의 기본적인 기제로 삼는다면, 능력 없고 성장하지 못하는 듯한 사람들 ―예컨대 노약자, 장애인, 어린이, 신체·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성인―이 사회에서 점점 소외될 것은 예상 가능한 수순이다. 우리가 만약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노동자이자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선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설 수도 있는 먼 미래에는 인류 대부분의 가치를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고, 심지어 이러한 가치들을 일상화하고 신격화시키는 풍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아예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먼 미래를 보아 욕망을 덜어내자는 주장은 여러 이유에서 부족한 것 같았다. 그저 내가 능력 있는 인간이라면 상관하지 않아도 될 문제라고, 혹은 내가 그들과 같은 처지에 서는 것은 먼 미래라 생각한다면 이 모든 협박 같은 말들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유능과 성실, 발전과 성장 등의 문제는 차치해두고 도무지 화폐에 부여되는 가치와 고임금을 바라는 욕망만큼은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되지 않는 한 건재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 아래 자유주의 노동시장이 유지되는 이상, 노동자들의 경쟁 속에서 능력에 대한 숭배 또한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가 붕괴하리라 예견했던 자본주의가 공고해져가는 지금, 유능과 성장이라는 가치는 일상적인 자기 계발, 자기 PR, 시간 관리 등 유무형의 교묘한 형태로 현대인의 일상에 단단하게 자리잡았고, 숭배는 일상에 스며있지 않은가.
이에 스스로의 욕망이 구성되었음을 인지하고 이를 덜어내보려는 시도가 정말 가능할지, 가능하다면 과연 지속가능할지, 혹은 그러한 노력이 이상적인 노동 환경으로 정말 이어질지는 모두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 붐은 온다’는 슬로건만을 중얼거리며 그 날만을 바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우선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우리의 욕망을 끌어안은 채 사회 변혁을 소망할 가능성을 찾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나는 철학자들의 책을 더듬었다. 그리고 곧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에서 그 일말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는 말한다. 연대와 윤리의 가능성이 우리의 조건으로서 내포되어 있다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니, 선택은 ( )의 몫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25]는 죽음과 유사하다. 우리가 통제할 수도, 피할 수도 없으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한편, 언제나 세상과 타자들 속에서 자신만을 발견하고 투영하는 우리는 지독하게 외롭다. 언제나 우리의 인식기관과 인식틀로 바깥을 만난다면,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과도 같은 타자는 오직 나만 발견할 수 있고 나의 인식으로만 구성된 세계에 제동을 걺으로써 그 고독을 깬다. 세상을 스스로에게 동화시켜 포섭하려는 시도를 중단시키며 세계에 관한 우리의 총체적인 이해와 ‘전체’로서의 세계 인식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때 타자는 ‘나’라는 존재를 가능케 한다. 내가 세계에서 독립적이며 고유한 무언가임을 밝히려면 총체적 인식이자 하나의 세계인 ‘전체성’을 깨야 하는데, 타자가 균열을 일으키며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타자가 자아와 화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아는 존재한다.”[26]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의 지점들이다. 첫째, 타자가 나라는 자아를 가능케 함은 내 세계를 깸으로써 이뤄진다는 점. 그리고 둘째, 그것은 또한 내 세계에 대한 타자의 침범이 아닌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27]
레비나스는 그리하여 타자의 얼굴과 나의 만남은 ‘나’의 근본 조건이면서도 무한한 윤리이자 요청이라 말한다. 이것은 타자가 내게 “세계가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세계에 대한 “나의 권력과 자유”가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리며 내 자유를 조건 지으면서도 그것이 독선적이어선 안됨을, 타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아무것도 명령하지 않으면서도 고요히 소리치기에 우리의 자유와 선택을 더 진정한 것으로 만들면서도, 그것들에 더 큰 윤리성을 부여한다.[28]
레비나스의 철학을 읽고 난 후, 특정한 형태의 노동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인정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모든 것은 나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체 속의 우리 혹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일상적인 구절들을 불러오는 대신, 타자와 내가 절대적으로 묶여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윤리는 다른 모든 상황과 조건에 우선하는 우리의 존재 조건이자 하나의 근본이므로 우리가 무엇을 욕망[29]하는지, 혹은 그것이 자연적인지 구성 되었는지의 여부 등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한 타자는 결국 그 존재만으로도 내게 다음의 질문을 영원히 남겨둔다.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느냐 혹은 그를 무화(無化)시키느냐’하는 물음. 순전한 나의 소유이나 그렇기에 더욱 윤리적인 그 선택. 결국 결론적으로 내가 기득권층에 가까운 노동자가 되길 원하면서도 그와는 상반된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의 행복을 바란다면, 그 소망은 ‘가능하다’. 연대와 지지의 가능성은 이미 우리의 존재조건으로 있기 때문이다.
와중, 누군가 어떤 철학을 말한다면 그건 그가 어떻게든 자신의 상황과 마음을 합리화하는 중이리란 엄마의 말이 떠올라 한편으로 씁쓸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들에 고개 숙여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 모두를 포기한 채 주저앉아 있기 보단, 한 명의 사람으로서 내 욕망과 소망을 받아들이고 얼굴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게 옳지 않은가 싶었다. 이 글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부끄러운 발버둥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래서 아직 (노동시장에 제대로 진입하지 않은) 학생인 우리가 여러 노동자의 행복을 바랄 때 할 수 있는 일들부터 해봐야겠다 싶었다. 우리 바로 옆의 사소해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가 어떤지, 어떤 이야기들이 나오는지, 중앙 광장 위편의 천막은 왜 있었던지를 궁금해하고, 서울대학교 청소 노동자 사망 사건을 보며 우리 주변의 노동자를 떠올려보는 것 말이다. 그리고선 노동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와 그들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여볼 수 있겠다. 중앙 광장 위편 천막 속 그들이 무엇을 요구했었는지 궁금하다면 《고대문화》 여름 144호에 실린 「고려대학교 직원 노조 농성」을, 우리 학교 청소노동자 분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본호 24쪽에 실린「고려대학교 청소노동자 아카이빙」을 읽어 보자. 혹은 노동 및 노동자 관련한 이슈를 다루는 뉴스도 좋다.[30]
또 노동자들의 요구나 그들의 노동 조건은 제도 및 법률과도 맞닿아 있으니, 이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보는 것도 좋겠다. 어떤 법 조항이 하청 업체 직원의 죽음을 원청 회사의 책임 밖의 것으로 만들었는지, 무엇이 택배회사 배달 직원을 자영업자로 만드는지 등을. 가볍게는 ‘노동자’와 ‘근로자’라는 단어가 가지는 다른 의미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겠다. 이렇게 공부하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했거나 두루뭉술하게만 동의하고 있던 것들을 정확히 알게 될 수도 있다. 예컨대 노동조합이 그들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 환경을 위해 파업하는 경우 그들이 이기적이라 매도하는 목소리가 있으나, 사실 법률상으로 정당한 파업은 애초부터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한 노사 간의 자치적 교섭을 조성하는”[31] 목적으로 제한된다는 것. 그리고 파업은 상대적 약자인 노동자가 그들의 목소리를 가장 크게 울려 퍼지게 할 수 있는 통로로서, 기업 혹은 국가가 시민의 편의를 위한답시고 대체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그 소리가 울리지 않게 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는 것.[32] 그렇기에 헌법은 그를 제33조 아래 단체행동권 중 하나로 명시해두었다는 것[33] 등을 말이다.
그리고 될 수 있다면 관심에서 나아가 그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보자. 노동조합 측에서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 글에 ‘동의합니다’를 누르거나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방법에서부터[34] 노동조합 활동을 위축시키려는 기업들을 불매하거나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의견을 전달하는 방법, 혹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직접 참여해보는 방법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걸 학내 단체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곳에서 진행하는 노동 관련 세미나, 간담회, 집회 관련 아카이빙 자료를 살펴보고 나아가서는 직접 참여할 수도 있다. 자신이 속한 학과의 학회 활동 또한 살펴보고 동참해보자. 이 모든 것들이 얼굴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방법일 테니.
( )는 ‘레오나르도’와 ‘신부’가 아니오.
『피의 혼례』 속 ‘레오나르도’와 ‘신부’의 욕망은 순수했고 그들은 운명의 세계에 있었기에, 그들에게 도덕과 윤리적인 해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성된 우리의 욕망은 ‘레오나르도’와 ‘신부’의 것처럼 순수하지 않고 우리는 그들처럼 운명의 세계에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이 시점의 우리는 안다. 나아가 윤리는 우리의 욕망 이전에, 우리의 존재 자체와 함께 존재해왔다는 것을. 그래서 어떻게 ‘그들’같던 노동자와 연대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찾아보고, ‘레오나르도’와 ‘신부’에겐 필요 없었던 윤리를 기록해두었다.
하지만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들을 휘감고 있던 사회 조건들을 운명이라 볼 수 있지 않은지, 그래서 … 싶다를 말하는 우리들의 욕망이 진정 순수한 것 아닌지 불쑥불쑥 묻고 싶어질 때도 분명히 찾아올 테다. 엄마 아빠 앞에서 읊조리듯 뱉었던 말들이 나에겐 진정 순수한 욕망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사랑하는 자유, 평등, 사랑, 올바름, 존중 등의 가치와 신념을 지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사실 나는 ‘레오나르도’와 ‘신부’와 다르고 싶다는 그 생각에서 비롯한 것 아닐까.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세계가 어떠한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며 말이다. 타인들의 얼굴 또한 그것을 고요히 외친다.
그리하여 이렇게 ( )에게 말해본다. ‘그들 노동자만의 일’ 같던 것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심을 기울이고, 참여하고, 행동해보자. 이것이 … 싶은 ( )가 스스로 사랑하는 가치와 신념을 지켜 나가는 작은 방법일지 몰라.
전체 응답자 중 57명의 응답자들은 노동의 가치로 다음의 것들을 말하였다.[35]
자아 실현 및 표출, 개인 능력의 실질적 발현, 자기 만족, 개인의 효용을 찾아줌,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 중 하나, 노동자인 “내가 여기 있다”를 알리고 사회가 그의 존엄을 고려하게끔 만듦, 사회에 이바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심리적 만족감, 성취감과 보람,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함, 삶을 더 풍요롭게 함, 삶의 목표,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력, 삶의 필수적인 일부,
물질적 정신적 보상, 노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돈과 행복, 생활 영위의 수단, 미래에 많은 돈을 벌기 위한 발판, 타자 혹은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함, 개인적 사회적 가치 창출, 사회적 메시지의 창출, 사회를 구성하는 기반, 생산성,
자본을 마련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가치관이 반영될 수 있다는 점, 자본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방안인 동시에 나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안,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개인이 원하는 소비를 할 수 있게 함,
내 신념을 노동 활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실현하거나, 안정적인 공동체를 꾸림으로써 간접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 하는 수단으로서, 삶이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을 실체적으로 드러냄,
서로 다른 인간들을 관계하게 만드는 물질적 정신적 행위로서 사회를 움직이게 만드는 기반이자 개인의 자아 성취를 가능하게 만듦, 타인의 삶에 도움을 주면서 자기 삶의 지속에 필요한 물적 대가를 받아 공동체적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함,
노동 자체, 노동 자체의 기쁨, 노동을 위해 흘린 땀방울 그 자체.
편집위원 해진 / jnnnterm@gmail.com
[1] 《고대문화》 2021 여름 144호에 실린 「내가 모르는 것들을 향해」와 「고려대학교 직원 노조 농성」. 각각 신라대학교 청소노동자 및 KEC 구미공장 지부 노조의 투쟁, 그리고 고려대학교 노조 농성 이야기를 담았다.
[2] 총 응답자 73명 중 64명(87.7%)이 재학, 휴학 상태의 대학생이다.
[3] 전체 응답자 73명 중 ‘유능’하고 ‘성실한’, ‘전문직 혹은 사무직’, ‘높은 임금을 받는’, ‘정규직’의 노동자가 되고 싶다고 응답한 비율은 각각 98.7%(72명), 80.82%(59명), 87.67%(64명), 95.89%(70명), 84.93%(62명)였다. 또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98.7%(72명),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수많은 선택들에 주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고 답한 비율 또한 98.7%(72명)였다.
[4]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까 (2001). 피의 혼례. 17-19.
[5] “훗날 내가 전문직 혹은 사무직에 종사하리라 생각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80.82%였다. 그에 반해 “능력이 좋으면 일자리는 따라오는 것”, “그 능력은 개인이 스스로 기르는 것”이냐를 묻는 문항, 그리고 그들이 훗날 “정규직”의 “돈을 많이 버는” 노동자가 될 것 같냐는 문항, 그리고 “남들보다 우월해지고” 싶냐는 문항과 “물질적인 부를 압도적으로 많이 누리고 싶냐”는 문항에 대해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대개 5-60% 대로 응답자들 간에 비교적 큰 편차를 보였다.
[6] 다만 그들도 성실하다는 점에서만큼은 우리의 욕망과 궤를 함께하며, 이후 나오는 “우리의 욕망(이자 이상)과 배치되는 삶을 사는 그들”등의 서술에서도 ‘성실’은 “우리의 욕망”에 해당하지 않는다.
[7] 신지영 (2020). 211-213.
[8] 유능하고 성실한 노동자가 되고 싶다 응답한 비율은 각각 98.63%(72명)과 80.81%(59명),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응답한 비율은 각각 100%(100명), 90.4%(66명)이었다. 전체 설문조사 중 ‘그렇다’는 답변이 100%인 문항은 “유능한 사람이고 싶다”가 유일하다.
[9] 한국경제연구원이 20대 청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일자리 인식 설문조사’에서, ‘평생직장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65.2%였다. (출처: ‘좋은 일자리’ 최소 연봉 “3천만~4천만원” (2021.09.12). 한겨레.)
[10] 노명우 (2008). 180-207.
[11] 미셸 푸코는 이러한 방식으로 개인을 통치하는 근대 권력을 ‘규율 권력’이라 규정한다.
[12] 새벽 기상해 자기계발..2030은 왜 ‘미라클 모닝’에 열광하나. (2021.01.18). 경향신문.
[13] 이종영 (2001). 49-54.
[14] 김철식 외 8인 (2021). 23-25.
[15] 이종영 (2001). 53-55.
[16] 408-노동시장의 권리 없는 시민 비정규직 노동자 (2006.12.15). 노동과 세계.
[17] 민철 (2021.07.). 고려대학교 직원 노조 농성. 169. 물론 학교가 기업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자를 고용한 사용자라는 점에서는 기업과 같다.
[18] 김철식 외 8인 (2021). 86-87, 92-93.
[19] 같은 책. 49-50, 61-64.
[20] 예를 들어 지하철 역의 엘리베이터는 장애인·노약자 등 교통약자를 위해 (추가로) 설치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교통 약자가 아닌 이들이 무거운 짐을 옮길 때 혹은 일상에서도 흔히 이용되며 그들에게 큰 편의를 준다.
[21] 김철식 외 8인 (2021). 모두를 위한 노동 교과서. 50-59.
[22] 같은 책, 82-84.
[23] 같은 책, 45-53.
[24] 능력주의를 보는 좀 다른 시각 (2021.07.21.). 경향신문.
[25] 이 타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타자와는 다른 ‘나’와 대비되는 절대적인 타자이다. (본문 상에서 타자는 ‘타인’으로도 언급되었다.) 그러나 일상의 타자는 ‘얼굴’을 가진 존재로서 타자의 흔적을 보여준다. (조연희, 2010) ‘얼굴’에 관한 설명으로는 각주25를 참고하라.
[26] 콜린 데이비스 (2001).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욕망. 61-68, 83-89.
[27] 레비나스 철학의 한 용어로서의 ‘얼굴’은 우리가 감각하는 타인의 실제 신체이기도 하지만 그를 초월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얼굴’은 그저 인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본래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데이비스, 2001)” 무언가이다. 이에 타자의 얼굴이 나와 만나는 방식은 ‘현현’이다. ‘현현’은 바로 앞서 언급한 ‘얼굴’의 존재방식과 연관되어 주체 중심적 인지의 의미를 내포한 ‘현상’과는 구분되어 절대적으로 다른 무언가 그저 그렇게 존재할 뿐임을 흔적으로써 드러낸다.
[28] 콜린 데이비스 (2001). 95-108.
[29] 레비나스의 철학에도 ‘욕망’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안정적인 직장, 많은 돈 등을 원할 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욕망’과는 다르다. 그의 욕망은 신적이고 절대적인 선이나 진리를 원하는 욕망이다. (데이비스, 2001)
[30] 〈노동과 세계〉, 〈매일노동뉴스〉, 〈비마이너〉, 〈닷페이스〉, 〈참세상〉의 기사 등.
[31] 김철식 외 8인 (2021). 315.
[32] 다만 공중의 생명·건강·안전·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대중교통, 병원 등의 업종은 ‘필수 유지 업무’로 지정되어 있다. 필수 유지 업무에 해당하는 업종은 노동조합법상 쟁의행위가 제한되어 필수 근무 인력을 제외한 인원만 파업에 참여할 수 있다.
[33] 같은 책. 228, 314-316.
[34]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홈페이지(http://nodong.org/)와 전국공공노동조합연맹 홈페이지(http://public.inochong.org/main/main.php)에는 여러 노동조합의 연대 요청 글과 노동 이슈 관련 성명 및 보도·법률 및 제도 등이 정리되어 있다.
[35] 본문에 실린 응답자의 답변은 답변 그대로 혹은 적정 수준의 수정을 거쳐 옮겼음을 밝힙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철식 외 8인 (2021). 모두를 위한 노동 교과서. 오월의봄.
노명우 (2008).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노동의 윤리를 묻다. 사계절.
미셸 푸코 (2020).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오생근 (번역). 나남출판.
이종영 (1998). 욕망에서 연대성으로. 백의.
콜린 데이비스 (2001).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욕망. 김성효 (번역). 다산 글방.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까 (2011). 피의 혼례. 안영옥 (번역). 지식을만드는지식.
논문 및 저널
신지영 (2020). (신)자유주의 및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비판을 준비하며- 들뢰즈와 푸코의 분석 비교 연구. 철학연구, 199-225.
기사 및 온라인 자료
강준만 (2021.07.21.). 능력주의를 보는 좀 다른 시각. 경향신문. Retrieved from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7210300045#c2b
김영배 (2021.09.12). ‘좋은 일자리’ 최소 연봉 “3천만~4천만원”. 한겨레. Retrieved from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011342.html
최민지 (2021.01.18.). 새벽 기상해 자기계발..2030은 왜 ‘미라클 모닝’에 열광하나. 경항신문. Retrieved from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101180600015#c2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