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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바위를 미는 일

[특집 '노동' 닫는 글] 편집위원 열음

웬만한 책들은 모두 갖춰 놓은 학교 도서관을 마다하고 굳이 동네 도서관을 찾게 되는 날이 있다. 대출할 책들은 대개 4층의 종합자료실에 구비되어 있지만, 그곳에서는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4층에 가기 전 나는 꼭 3층을 먼저 들러 한참을 앉았다가 다시 걸음을 떼곤 한다. 다급히 변명하자면 숨이 가빠서는 아니고, 그곳에는 내가 동네 도서관을 좋아하는 이유들이 복작복작하기 때문이다. 3층에는 ‘유아어린이자료실’의 이름을 단 작은 우주가 있다. 


바깥에는 더 번쩍이는 별천지들이 널려있을 텐데 한낱 종이 뭉치를 읽겠다고 도서관에 모여든 아이들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무례인 줄 알면서도 그들을 이곳으로 불러낸 그 대단한 책들이 무엇인지 힐끔 훔쳐보다가, 아이들의 품에서 나의 어린 날을 발견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도무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딱 그 아이들만큼 작고 짹짹거리던 때의 나를 매일 도서관에 출석하도록 했던 바로 그 책,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는 우리의 영원한 북극성이었던 것이다. 


신화, 그 안에는 이 세계의 모든 기원이 있었다. 낮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달이 뜨는 까닭에서부터 내 안을 채우는 온갖 감정들이 생겨난 이유까지, 읽어도 읽어도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기에 발음도 어려운 신과 요정들의 이름을 줄줄 욀 수 있을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다만 어린 내가 섬찟함을 느꼈던 점은 삶을 이루는 요소 중 많은 것들이 사실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벌로써 신이 우리에게 내린 것이기 때문에, 신화에 따르자면 우리는 아직까지도 매일 벌을 받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노동이라는 것도 그렇다. 우리가 매일을 일하며 살게 된 것은 어느 인간의 무모함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 코린토스의 왕 시시포스는 몇 차례나 신을 농락했다는 이유로 올림포스의 공분을 샀고, 결국 “바위가 늘 꼭대기에 있게 하라”는 제우스의 명령 하에 바위산 기슭의 큰 바위를 밀어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바위는 산꼭대기에 다다르면 다시 굴러떨어졌고 시시포스는 영겁의 시간 동안 바위를 밀어야 했다고, 인간이 감히 신의 권위에 도전한 것에 대한 형벌이 바로 노동의 기원이라며 신화는 말한다. 


시시포스의 그것처럼 어떠한 형태의 노동이든 노동은 육체와 정신의 고난을 동반하며, 이에 노동은 벌이라고 불러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정녕 신화 속 비극의 굴레에 갇혀 평생을 벌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프랑스의 작가 카뮈(Albert Camus)는 이미 산꼭대기를 뒤로 한 채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기 위해 평지로 내려오는 시시포스의 뒷모습에서 인간의 실존을 읽어낸 바 있다. 제우스가 내린 무한한 형벌로부터 도망하지 않고 묵묵하게 바위를 미는 시시포스의 모습은 운명에 맞서는 의지의 원형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매일과 다름없다. 일어나면 다시금 고된 일상을 살아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잠에 드는 일을 실체도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내려진 엄벌로만 치부할 때 노동의 의미와 그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자그마한 기쁨들은 매몰되고 만다.


그러니 우리는 바위틈 속 피어난 들꽃 한 송이를 눈에 담으며 각자의 바위를 산정에 올려놓아야 한다, 하고 생각을 마치려다가 문득 우리가 놓인, 무수히 많은 이들이 각자의 바위를 굴리는 산맥을 바라본다. 바위의 무게에 짓눌려 매일같이 사람이 지치는 이곳에서도 꽃이 피어날까.


설령 바위틈 어딘가에 꽃이 실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한 송이를 위해 자신의 언덕만을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는 들꽃은커녕 사람도 살 수가 없는데, 나는 지극히 당연한 순리를 잊고야 만다. 어쩌면 신이 내렸다는 형벌의 본의는 매일같이 굴러떨어지는 바위 자체라기보다는, 굴러떨어지는 돌덩이에 곧 사람이 치일 것을 알면서도 등을 돌리는 소홀함일지도 모른다. 당장 오늘 하루에만 몇 명의 사람이 그 바위에 치여 죽었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의 몫의 바위를 짊어지기 바빠 그를 등지는데, 우리의 일상은 과형이 아니니 어딘가 축복처럼 피어있을 꽃을 찾아보자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신이 인간을 어느 산맥에 내버려 두었다고 해도 인간마저 인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다시 3층의 아이들을 본다. 이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정숙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누비느라 이마에 땀이 송골 맺혀있는데, 이미 그네들 몫의 바위가 굴러떨어지고 있는 한 아마 앞으로도 그 이마에는 땀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몰래 닦아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하던 그때 어디에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아이의 책장은 넘어간다. 


그리하여 우리가 시시포스의 신화로부터 발견해야 할 것은 인간 노동의 의미가 아닌 바람 한 자락이었음을 깨닫는다. 지친 시시포스의 머리칼을 흩트려 잠시나마 그의 땀을 식히고,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뒤를 받쳐 줄 최소한의 쉼과 믿을 구석.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어 바위는 조금씩 깎이고, 시시포스는 그제서야 조금은 버거웠던 숨을 내쉴 것이다. 잠깐의 숨돌림은 시시포스를 계속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할 테고, 그 어느 날의 산정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물집 잡힌 손을, 험한 땅 구석에서도 봉오리를 드민 꽃을 기쁘게 눈에 담을 수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살포시 부는 바람을 맞으며 먼 미래의 아이들을 상상한다. 마침 며칠 전이 처서라더니, 어느새 가을이구나. 그렇다면 먼 훗날의 언젠가에도 바람은 내내 불어오겠지. 그러니 나는 기쁘게 오늘의 몫의 바위를 밀어야겠다, 는 생각을 하며 도서관을 나선다. 책 두 권을 빌려 조금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그러나 어쩐지 아주 조금은 가분해진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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