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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리뷰] 편집위원 상민

* 본 리뷰는 영화 〈피닉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The Criterion Collection

기차가 역에 도착한다. 붉은 드레스 위에 검정 재킷을 걸친 여자가 망설이듯 주위를 살피며 열차에서 맨 마지막으로 내리자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반가워한다. 환대가 끝나고, 마침내 그녀와 남편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여자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남자의 어깨에 기댄다.


무척이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하지만 여자가 타고 온 기차가 아우슈비츠에서 온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이들의 재회는 단순히 아름답고 기쁜 것일 수만은 없으며 재회 이후의 이들은 아우슈비츠 이전의 이들과 같을 수가 없다.


넬리는 그럼에도 그들이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다만 재회의 외양이 그렇게 우아하고 세련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 어쨌거나 그 기차는 아우슈비츠에서 왔으니 말이다. 반면 넬리의 남편 조니는 그 세련된 재회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 기차가 어디서 왔는지는 애초부터 조니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피닉스〉(Phoenix, 2014)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첫 번째 도착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독일에서 넬리는 가수로, 조니는 피아니스트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리아인인 조니와 달리 유대인인 넬리에게는 점점 나치의 위협이 죄어오고 ― 동네 사람들이 이들 부부를 피하는 것 등을 통해 그 위협은 유무형으로 감각화 된다 ― 이에 조니는 동네 여관 주인의 도움을 받아 넬리를 보트에 숨긴 채 지내게 된다. 그러나 넬리를 쫓던 경찰이 조니를 체포하게 되고, 결국 그는 넬리를 숨긴 장소를 실토하고서야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계속해서 괄호를 넣으며 추측형 어미를 사용하는 것은 이것이 영화상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전쟁 이전 두 사람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영화가 진행되며 추측해볼 수만 있을 뿐.


영화의 시작 지점에서의 넬리는 조니의 이러한 배신을 전혀 모르고 있다. 관객이 처음 마주하는 넬리의 모습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얼굴 전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어느 차에 타고 있는 모습이다. 옆자리에는 그녀의 친구이자 유대인 협회 소속 조사관인 레네가 차를 몰고 있다. 전쟁은 끝났고, 이들은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고향인 독일 땅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넬리는 독일군이 그녀를 죽은 것으로 오해한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수용소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얼굴 전체에 큰 상처를 입어 성형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The Criterion Collection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넬리는 흉터 없는 얼굴을 가지게 된다. (처음에는 멍 자국 등이 남아있지만 극이 진행되며 차차 사라진다.) 레네는 바뀐 얼굴도 예쁘다며 위로해주지만, 넬리는 ‘얼마나 예쁘고 말고에 관계없이 이것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며 절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에도 넬리는 팔레스티나로 떠나자며 집을 고르라는 레네의 제안에는 시큰둥한 채 자신이 예전에 살던 집, 그리고 남편의 안부만을 묻는다. 그제야 레네는 (자신이 파악한) 진실의 일부를 넬리에게 들려주는데, 그것은 조니가 체포당한 이력이 있으며 그가 풀려난 지 이틀 뒤에 넬리가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심스러운 정황에도 넬리는 별다른 동요 없이 조니를 찾아 베를린의 밤거리를 배회하고 다닌다. 이런 넬리를 걱정한 레네는 권총 한 자루를 넬리의 손에 쥐여준다. (우리는 이 권총을 영화 후반부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남편을 찾아 헤매던 넬리는 어느 길거리 악사의 조언에 따라 미국인 클럽 ‘피닉스’를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는 조니를 발견한다. 넬리는 즉각 조니를 부르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조니는 넬리가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소리가 어디서 들려왔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넬리는 다음날 다시 ‘피닉스’를 찾아가 조니를 찾지만, 그는 일을 하고 싶으면 사장을 찾아가 보라는 말만 할 뿐이다. 다만 그녀가 자신의 (전)부인과 닮았다는 생각은 들었던 모양인지, 넬리가 밤이 될 때까지 클럽에서 서성거리자 일자리를 주겠다며 그녀를 자신의 반지하 방으로 데려간다. 그가 제안하는 일자리란 다름 아닌… 자신의 죽은 부인을 연기하는 것이다. 조니는 넬리가 죽었다고 (정확히는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 ‘넬리를 닮은 여자’를 넬리로 분장시켜 그녀의 유산을 받아내려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넬리는 이 제안을 수용한다. 관객의 의아함을 잠식시키는 것은 넬리를 연기한 배우 니나 호스의 눈빛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과 조금이라도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설사 나를 이용한다더라도 ― 이 이용은 이중의 이용이다 ― 기꺼이 이용당하겠다는 그 눈빛. 이 지점에서 〈피닉스〉는 본 게임으로 접어든다.


ⓒThe Criterion Collection


〈현기증〉과 〈피닉스〉: 오인의 모티프

* 이 부분은 〈현기증〉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다음 소제목인 ‘두 번째 도착 – 나지막이 말해요’ 부분으로 넘어가 주세요.

많은 관객들은 여기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 1958)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1] 죽은 애인/부인을 닮은 여자를 발견하고 그녀의 육체를 통해 망자를 되살리려는 남자, 하지만 사실 그 닮은 여자가 진짜 애인/부인이라는 설정은 정확히 〈현기증〉의 그것과 일치한다.[2] 그러나 차이점 역시 많은데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현기증〉은 남자를 중심으로, 〈피닉스〉는 여자를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현기증〉의 경우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주디이지만, 주디는 그 진실을 꽁꽁 숨기기에만 바쁠 뿐 실제로 집요하게 그 진실을 요구하는 것은 스코티이다. 주디는 극 전반부에서나 후반부에서나 매들린을 연기할 것을 강요받을뿐더러 결국 진실을 밝히는 것 역시 자신의 의지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피닉스〉는 영화 자체가 넬리의 감정선을 따라갈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연극에 참여하는 것 역시 그녀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연극을 제안한 다음 날 아침, 조니는 계획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며 넬리를 돌려보내려 했지만 넬리의 고집으로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조니는 넬리에게 우선 필체를 따라 쓰는 연습을 하라고 하는데, 넬리는 별다른 연습 없이도 (사실 그것은 넬리 자신의 글씨체니까 당연한 일이다) 똑같이 필체를 재현해 조니를 놀라게 한다. 여기에서 가능성을 본 조니는 본격적으로 넬리의 물건들을 가져와서 그녀를 체포되기 이전의 넬리와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외출한 사이 넬리는 조니가 파리에서 사준 구두와 그가 새로 사 온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진하게 화장을 한 채 그를 맞이한다.


영화는 변신한 넬리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지 않고 조니가 길 건너편에서부터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까지를 넬리의 시점에서 찍은 쇼트만으로 이어 붙인다. 그리고 조니가 계단을 내려와서 넬리를 쳐다보는 순간 그는 얼어붙는다. 영화는 관객들이 처음 보는, 당황한 조니의 모습을 한참 동안 보여주다가 비로소 완벽하게 꾸민 넬리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카메라는 조니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모습을 패닝[3]을 통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찍는다. 이제까지 계속 눈물에 젖은 채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넬리는 “날 알아보겠어?”라고 말하며 조니에게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 대며 금방이라도 키스가 이루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지만 조니가 그만하면 충분하다며 뒤로 물러선다.


이 장면은 정확히 〈현기증〉의 한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영화의 후반부, 스코티는 주디를 만난 뒤 전혀 다른 머리색과 옷 스타일을 가진 그녀를 매들린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려고 든다. 은색 양복을 사주고,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게 한 스코티는 주디의 방에서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린다. 그리고 복도 저편에서 주디가 걸어오지만 어딘지 매들린과 다르다. 올림머리를 하지 않은 것이다. 계속해서 자신이 매들린이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하던 주디는 스코티의 간청으로 자신을 계속 매들린의 모습으로 맞춰갔지만, 끝끝내 올림머리는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스코티의 간청에 결국 그녀는 방에 들어가서 머리를 올리고 나온다. 〈현기증〉의 이 장면의 경우에도 압도당한 스코티의 모습을 찍은 쇼트가 먼저 나온 다음, 호텔 네온사인으로 인해 생겨난 녹색 연기 사이로 극 초반에 등장했던 매들린과 정확히 같은 모습을 한 주디가 천천히 걸어오는 쇼트가 나온다. 그리고 둘은… 처음으로 키스한다. (스코티는 주디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전까지 한 번도 키스하지 않았었다.)

ⓒThe Criterion Collection
ⓒUniversal Pictures Home Entertainment


두 장면을, 두 영화를 가르는 차이는 여자의 변화에 대한 남자의 반응이다.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한 여자와 똑같은 모습에 놀란 것은 동일하지만 (편집의 순서 역시 동일하지만) 다른 것은 그 놀람에서 이어지는 반응이다. 스코티는 죽은 매들린을 욕망했기에 그 이미지를 그대로 되살려낸 후에야 비로소 주디를 사랑하게 되지만, 죽은 아내를 서류상으로만 필요로 하는 조니는 아내의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한 넬리를 거부한다.

ⓒUniversal Pictures Home Entertainment
ⓒThe Criterion Collection


주디의 ‘매들린-수행’은 스코티의 욕망에 의한 것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매들린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반면 넬리의 ‘넬리-수행’은 스스로가 욕망한 것이며 ― 그녀는 성형수술 전에 누구를 닮게 수술해줄지 묻는 의사의 질문에 이전의 자기 자신과 똑같이 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 그녀는 자신이 넬리라는 것을 제발 알아달라고 시위라도 하듯 조니의 예전 기억을 재현하려 든다.


이 지점에서 〈피닉스〉는 히치콕으로부터 그대로 계승한 것처럼 보이는 ‘오인의 모티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히치콕은 〈현기증〉을 각색하며 원작 소설과 달리 주디의 정체를 비교적 빠르게 (주디의 등장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지게 했다. 히치콕은 이에 대해 설명하며 그의 주변인들은 그 선택을 만류했지만, 자신은 놀라움보다도 서스펜스를 선택한 것이라 말한 바있다.[4] 이 선택으로 인해 관객들은 ‘언제 스코티가 주디의 정체를 알게 될까’ 하며 손에 땀을 쥔 채 나머지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피닉스〉에서 그런 서스펜스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첫째, 넬리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피해자이기 때문이고 ― 즉, 사실이 밝혀졌을 때 관객이 감정을 이입해서 보고 있는 넬리에게 일어날 일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 둘째, 조니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스코티나 조니 모두 황당할 정도로 자신의 예전 애인/부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스코티가 눈치를 챈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목걸이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겉모습이 달라졌다고 할지라도 목소리나 안았을 때의 촉감, 피부 냄새 등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상식적인데도 말이다. 이는 두 남자가 각자 다른 상념에만 몰두해있기 때문이다.

스코티에게 그것은 과거이다. 과거의 매들린을 되살려내려고 하는 그에게 주디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매들린을 되살릴 매개체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많은 연구자는 물론 히치콕 본인도 이 이야기를 “남자가 죽은 여자와 잠자리를 함께하고 싶어 하는, 일종의 시체 애호증(necrophilia)에 탐닉하는” 이야기라고 설명한다.[5] 주디는 과거는 뻔뻔하게 묻어버린 채 스코티와 행복한 미래를 만들고자 했지만 스코티가 가진 과거에의, 죽음에의 욕망이 모든 일을 망친다.


반면 〈피닉스〉의 조니가 몰두해 있는 것은 오직 미래이다. 그는 오직 넬리가 어떻게 도착해야 하고, 어떻게 친구들을 속여서 넬리의 유산을 차지할지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것이다. 조니는 사람들이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물으면 어떡하냐는 넬리의 걱정에도 시큰둥할 뿐 아니라 이어서 터져 나오는 넬리의 끔찍한 수용소 경험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진짜 경험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또 넬리는 계속해서 조니로 하여금 과거 둘의 관계를 떠올리도록 유도하지만 조니는 계속해서 그런 시도를 거부하며, 부인을 배신했냐는 넬리의 질문에도 뜬금없이 기차에서 내려서 만날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면 되는지만을 설명할 뿐이다.


ⓒThe Criterion Collection


두 번째 도착 - 나지막이 말해요

그렇게 해서 글의 서두에 나온, 계획했던 재회가 드디어 이루어지고, 친구들과 넬리-조니 부부는 친구 중 누군가의 집 바깥의 어느 볕 좋은 정원에서 재회의 기쁨을 나눈다. 정확히는 ‘나누는 척’ 한다. 이들은 모두 넬리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넬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당할 때 이들은 무사히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조니 역시 크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큰 불안감과 죄책감 내지는 수치심을 안고 있었을 것이고, 그가 자꾸만 과거를 돌이켜보려는 넬리의 시도를 외면한 것도 그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넬리가 조니의 계획에 동참한 것은 그가 꿈꾸는 미래에서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넬리의 욕망은 점차 사그라든다. 거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동하는데, 레네가 자살한 것 그리고 과거 조니의 배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이 그것이다. 레네는 수용소에 간 적은 없지만 아우슈비츠의 진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같은 유대인들의 끔찍한 죽음을 마주하며 우울증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넬리에게 팔레스티나에서 살 아파트를 보여주던 그녀였지만 정작 유서에서 레네는 자신이 “죽음을 삶보다 더 가깝게 느낀다”고 말한다. 아무리 미래를 꿈꾸어 보려 해도 너무나 잔혹한 과거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넬리에게는 자기 자신을 지키라며 권총을 주었었지만, 정작 레네 자신의 총구는 자기 자신을 향했다.

그리고 레네는 유서와 함께 그전까지는 차마 넬리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서류 하나를 남기는데, 바로 조니가 넬리와 이혼했다는 공식 문서이다. 그동안은 심증으로만 존재했던[6] 조니의 배신이 물질화된 그 서류를 지닌 채 넬리는 베를린 행 기차에 탄다.


그리고… 그녀는 친구들을 앞에 둔 정원에서 영원히 자신과 함께할 것을 맹세하는 조니와 마주 보고 서 있게 된다. 친구들은 박수를 치고, 어딘가 멍한 표정의 넬리는 갑자기 조니와 친구들을 실내로 이끈다. 피아노 앞에 선 넬리는 베를린에서 조니의 연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을 항상 바라왔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기억하겠지만 넬리는 가수였다) 조니는 넬리가 요청한 대로 〈Speak Low〉의 반주를 하기 시작한다.


〈Speak Low〉.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영화의 초반 막 수술을 마친 넬리가 레네와 식사를 할 때 나오던 이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레네는 잠시 멈췄던 이 노래를 다시 틀어달라는 넬리의 요청에 웃으며 그녀에게 “언제 한 번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었다. 그러면서 “더 이상 독일어 노래를 못 듣겠다”고도 말했었는데, 그때 넬리가 고개를 끄덕이기를 머뭇거렸던 것은 그녀는 여전히 독일에서의 과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네는 죽었고, 재-귀환한 넬리는 이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상태이다.


감정을 추스르느라 반주를 두 번이나 놓치고 나서야 넬리는 노래를 시작한다. 목소리는 떨리고 음정, 박자도 겨우 맞춘다. 이 모든 것이 가짜인 것이 들킬까봐 조니의 표정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그의 표정이 바뀌는 것은 2절에서부터다. 비로소 넬리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조니의 눈시울이 갈수록 붉어지다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다가, 고개를 들어 넬리의 팔을 본다. 그리고 연주를 멈춘다. 넬리는 반주도 없지만 편안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조니의 시점 쇼트에는 넬리의 팔이 보이는데, 거기에는 검은색 숫자가 새겨져 있다. 나치가 새겨놓은 수감번호 ‘20285’. 조니는 눈동자만이 빠르게 흔들리는 채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반면 넬리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The Criterion Collection



늦었어 그대여 늦었어 It’s late, darling, it’s late
커튼이 내려오고 모든 것이 끝나네 The curtain descends, everything ends
너무 빠르게 너무 빠르게 too soon, too soon
난 기다리는데… I wait…


넬리는 노래를 중간에 멈추고 조니를 쳐다보지만 조니는 차마 그녀와 눈을 맞추지 못한다. 친구들 역시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넬리는 벗어두었던 검정 재킷을 손에 든 채, 건물 밖으로 나간다. 근거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카메라는 멀어져가는 넬리에게로 초점을 옮기지 않고, 그저 흐린 형상으로, 넬리가 사라지게 둔다. 그리고 화면은 암전된다.


〈현기증〉의 주디와 달리 넬리는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진실을 폭로했으며 조니를 권총으로 쏴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복수로, 진실이라는 총알을 그의 가슴 깊숙이 박아넣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서스펜스

앞서 〈피닉스〉에서 서스펜스가 불가능한 이유로 두 가지가 제시됐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유는 넬리가 아우슈비츠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인 일이다”라는 말을 상기해보자. 아우슈비츠 생존자와 그 생존자를 나치에 팔아넘긴 남편 사이에서 벌어지는 연극을 서스펜스로 연출하는 것은 ‘야만적’이고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영화는 그런 서스펜스 대신 현재의 넬리가 과거의 넬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여기서의 미래는 조니가 상상한, 즉 아우슈비츠와는 무관한 미래가 아니다.) 죽었지만 살아있는[7] 현재의 넬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과정에서, 조니의 오인은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장치가 아니라 그녀가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과정을 통해 진실을 알아내고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그러고는 버려지는) 것에 불과하다.


넬리가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언제일까. 조니 렌츠는 넬리 렌츠와 이혼했다는 서류를 보았을 때? 아니다. 넬리는 여전히 무슨 사연이 있었을 거라고, 그것은 조니의 진심이 아니었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 넬리가 더 이상 연극을 하지 못하게 되리라 직감한 것은 조니가 그녀에게 칼과 수건을 들이밀었을 때였다. 친구들 앞에서 재회 연극을 하기 전날 밤, 조니는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팔에 수감번호가 있어야 하니 그 부분의 살을 도려내라고 말한다. 넬리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의 정체성을 아예 제거할지 말지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과거의 넬리였다면 기꺼이 자신의 팔에 새겨진 그 숫자들을 도려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넬리는 그렇지 않다. 넬리는 분개한 듯 조니를 밀치고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반투명한 문 바깥에서 넬리가 꺼내든 총의 실루엣을 본 조니는 어쩔 줄 모르고 물러선다.


ⓒThe Criterion Collection


결과적으로 이 권총은 영화상에서 한 번도 발사되지 않는다. 하지만 넬리가 한밤중에 레네를 찾아갔을 때 레네가 한 말(“난 네가 조니를 쏘고 와서 도와달라는 줄 알았어. 솔직히 그러기를 바랐지”)과 넬리가 기차에 타기 직전 장면이 권총을 쳐다보는 장면이었다는 점에서 관객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재회 이후의 장면들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권총은 단순한 맥거핀(MacGuffin)[8]에 불과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맥거핀의 유용성은 자칫 긴장감이 없을 수도 있는 부분에서도 관객들이 집중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넬리의 권총은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아우슈비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살 수 있다고 믿었을 때 넬리는 권총에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권총을 꺼내든 것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이다. (사실 이는 성형 전의 넬리가 과거의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의사가 했던, 이전과 완전히 똑같아지는 것은 불가능하니 아예 새로운 얼굴을 가지는 게 낫다는 조언에서 이미 암시된 바 있다.) 팔에 있는 수감번호를 도려내지 않기로 한 그녀에겐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아있는 듯하다. 남편에게 복수하는 것 혹은 더 이상의 삶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권총은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영화의 끝까지 권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은 권총이 맥거핀이라서가 아니다. 넬리가 끝내 권총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니의 오인이 서스펜스가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증거를 눈앞에 두고도 인식하지 못하는 비겁자들의 무능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었듯, 권총은 단순한 맥거핀이 아닌 넬리의 실존적 결단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이다. 만일 넬리의 권총이 발사되었다면 (그것이 겨눈 쪽이 어느 쪽이든) 그녀는 과거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미래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현재에 갇혀 영원히 부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슬프게도 그것이 바로 레네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나 넬리는, 우아하고 당당하게 미래로 나아가려 한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찍을 수 있을까. 이제 〈피닉스〉의 마지막 쇼트에 대해 말해볼 차례다.


몸이 말한다

넬리가 조니에게 다른 사람들이 수용소의 경험에 관해 물어보면 어쩌냐고 물어봤었던 것을 떠올려 보자. 그런데 넬리는 정말로 수용소에서 돌아오지 않았는가?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녀가 자신의 증언을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봐 걱정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 순간 넬리는 분명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지 간에, 너희와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 거야. 너희 중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테니까. 혹시 누군가 살아나간다 하더라도 세상이 그를 믿어주지 않을걸. (…) 왜냐하면 우리가 그 증거들을 너희와 함께 없애버릴 테니까. 그리고 설령 몇 가지 증거가 남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너희 중 누군가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너희가 얘기하는 사실들이 믿기에는 너무도 끔찍하다고 할 거야.”[9]


이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시몬 비젠탈이 증언한, 당시 나치 친위대(SS)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했던 말이다. 실제로 넬리가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의도치 않게) 생생하게 증언했을 때 조니는 어디서 들은 것인지만을 묻고는 (어디선가 읽었다고 넬리가 답하자) 방금처럼만 답하면 될 거라고 한다. 조니는 그것이 ‘그럴싸하다’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이 ‘진실’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생존자의 증언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그들의 경험이나 기억의 재현은 “파편화되어 있고 부분적이며, 말할 수 없음과 듣는 자에 대한 의심, 그리고 경험을 설명할 언어의 부족(김은실, 2016: 320)”이란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객관적인 증거와 그 증언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소위 ‘수정주의자’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 그들을 물어뜯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공격을 무력하게 만드는 증거가 하나 있다.


바로 생존자의 몸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나오는 붕대로 칭칭 얼굴을 감은 넬리의 얼굴은 갈수록 상처를 회복하지만, 결코 아우슈비츠 이전의 얼굴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그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넬리의 팔뚝에 새겨진 다섯 자리의 숫자는 조니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숫자를 도려내기는커녕 있는 그대로 조니에게 보여준 것은 넬리 자신의 선택이었다.) 다른 여느 예술과도 달리 영화는, 카메라는 그 몸을 직접 보여줄 수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 –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5)의 마지막 장면에서 변영주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상반 나신을 천천히 카메라로 응시한다. 그 모든 상흔과 시간을 품고 있는 몸. 그 몸이 증인이며, 증거이며 역사이다.


좋다, 영화는 거기까지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고통을 담지한 몸으로 넬리가 살아갈 미래를 영화는 찍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클로드 란즈만의 〈쇼아〉(Shoah, 1985)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란즈만은 이 8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단 한 번도 당시 촬영된 푸티지[10]를 사용하지 않았고, 당시 상황을 재연하지도 않았다. 대신 란즈만은 열심히 증언을 모으고, 풀숲이 무성한 아우슈비츠를 찾아가 그 증언이 말하는 내용을 따라 카메라를 움직였을 뿐이다. 고요한 적막만이 남은 아우슈비츠의 정경에 나레이션이 얹어짐으로써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절멸’(히브리어 ‘쇼아’의 뜻)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영화는 영화가 보여줄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가까스로 보여준다. 물론 이는 정말 가까스로, 어렴풋이, 언제나 부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보여주는 것도 이렇듯 불가능에 가까운데, 그 이후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미래를 찍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거짓말이고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 문밖을 나서는 넬리에게 카메라가 초점을 맞추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The Criterion Collection


편집위원 상민 / poursoi0911@gmail.com



[1] 〈현기증〉은 영국 영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10년에 한 번 선정하는 ‘역대 최고의 영화’에서 50년간 부동의 1위를 차지해온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을 밀어내고 2012년도에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이견의 여지가 없는, 세계 영화사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현기증〉의 위대함 같은 것에는 그리 초점을 맞추지 않을 예정이다. 이 글에서는 〈현기증〉이 아주 유명하며,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나 〈아사코〉(2018) 등과 같이 한 배우가 극 중간에 다른 배역으로 (재)등장하는 영화는 언제나 이 영화의 자장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만이 중요하다.

[2] 〈현기증〉의 줄거리를 잘 요약해놓은 『히치콕과의 대화』 314쪽의 각주 4를 일부 수정하여 인용한다: 고소 공포증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경찰에서 은퇴한 존 “스코티” 퍼거슨은 옛 친구 개빈 앨스터로부터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신경증 환자인 아내 매들린을 감시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 전직 형사는 점점 그가 미행하는 여인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그는 바다에 뛰어든 그녀를 구하지만, 얼마 후 그녀가 교회의 종루에서 몸을 던질 때 자신의 고소 공포증 때문에 그녀의 죽음을 저지하지 못한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그는 신경 쇠약에 걸린다.

어느 날 그는 길에서 죽은 연인과 똑같은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은 주디 바턴이며 그를 본 적도, 매들린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스코티는 적극적인 구애를 펼치고 주디는 결국 그것을 승낙하게 된다. 실은 주디와 매들린은 동일 인물로 그녀는 그들이 앞서 만났을 때 엘스터의 부인이 아닌 정부였다. 그녀가 죽은 것으로 위장한 것은 실제 아내를 제거하려고 치밀하게 꾸민 계획의 일환이었다. 두 공범은 고소 공포증이 있는 전직 형사가 엘스터 부인의 자살을 목격했다고 증언하도록 계획을 꾸밈으로써 살인을 은폐했던 것이다.

주디를 매들린과 똑같은 외양으로 만든 스코티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주디를 강제로 종루 꼭대기까지 끌고 올라가 사실을 고백하게 한다. 진실을 알게 된 스코티의 고소 공포증은 사라지나 이번엔 주디가 실제로 떨어져 죽고 스코티가 종루 아래를 허망하게 바라보며 영화는 끝난다.

[3] 카메라의 위치를 고정한 상태에서 왼쪽에서 오른쪽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리는 촬영기법.

[4] 프랑수아 트뤼포 (1994). 315. ‘서스펜스’란 어원 그대로 ‘suspend’ 즉 지연을 통해 관객의 궁금증과 긴장감을 유발하는 전략이다. 히치콕은 같은 책에서 놀라움(surprise)과 서스펜스의 차이를 예시를 들며 설명하는데 만약 네 사람이 포커를 치는 장면에서 아무런 예고 없이 폭탄이 터지면 그것은 단순한 놀라움만을 발생시키지만, 먼저 네 명 중 한 명이 식탁 밑에 폭탄을 설치하는 모습과 제한 시간을 보여준다면 폭탄이 터지기 전까지 관객들은 내내 애를 태우게 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

[5] 같은 책. 315.

[6] 오히려 넬리는 조니가 풀려난 다음 미행을 당해서 자신의 은닉처가 노출된 것이라는 대체 현실까지 스스로 만들어낸 상황이었다.

[7] 실제로 조니는 넬리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으나, 넬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도 죽었다는 증거도 없기에 재산 상속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상속을 위해서는 하나가 더 필요했는데 바로 이혼 서류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혼 서류를 훔치려다가 실패하는 조니의 모습을 레네가 목격하는 것이 복선으로 영화 초반 등장한다.

[8] 맥거핀이란 역시 히치콕이 만들어낸 개념으로, 결과적으로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지만 서스펜스를 위해 마치 중요한 대상인 것처럼 영화가 강조하는 사물이나 사건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히치콕의 〈싸이코〉(Psycho, 1960)를 보는 관객들은 초반에 등장하는 돈 가방이 사건의 핵심이 되리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끝까지 보고 나왔을 때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때 그 돈 가방과 같은 것을 맥거핀이라고 부른다.

[9] 프리모 레비 (2014). 9-10.

[10] 영화 및 영상 제작 시 미편집 혹은 미사용한 원본 영상.



참고자료

단행본

김애령 (2020). 듣기의 윤리. 봄날의박씨

윤종욱 (2021). 2000년 이후의 독일영화. 산지니.

프랑수아 트뤼포 (1994). 히치콕과의 대화. 곽한주, 이채훈 (번역). 한나래.

프리모 레비 (2014).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소영 (번역). 돌베개.


논문 및 저널

김은실 (2016). 4ㆍ3 홀어멍의 “말하기”와 몸의 정치. 한국문화인류학 49(3), 313-359.


기사 및 온라인 자료

안시환 (2021.08.04.). '피닉스'에서 보여준 페촐트의 역사 인식. 씨네21. Retrieved from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8290

 

영상자료

Hitchcock, Alfred (1958). Vertigo. Alfred J. Hitchcock Productions.

Petzold, Christian (2014). Phoenix. Schramm Film Koerner & We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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