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거꾸로 생각해 보기, 뒤집어 가늠해 보기

by 이지완

이른 봄에 '설움조절장애'란 제목의 시를 브런치에 올렸다가 누나인 연두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하이! 지완. 별 탈 없이 잘 지내지?

좀 아까 올린 설움조절장애 말야..

제목을 바꾸면 어떨까 싶어.

ㅇㅇ장애란 표현을 많이들 쓰는데 이게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차별을 내포한 말일 수 있어. 장애는 뭔가 부족하거나 잘못돼 있다는 의미로 쓰이거든. 고려해 봐 주길! ‘선량한 차별주의자’ 함 읽어보길.

참. 네 추천으로 ‘아버지의 해방일지’ 읽고 있어. 반쯤 읽었는데 벌써 두 번 울었어. 나도 설움이 조절이 안 되나 봐ㅋㅋ


망각과 게으름 탓에 한참이 지나서야 읽게 된 추천도서
부당함의 방조자로 몰리는 한 순간


시 제목을 다른 것으로 바꿨고 책은 몇 달 뒤에 읽었다. 머릿말을 보니 저자인 김지혜 씨도 나와 비슷한 '실수'를 했더라. 결정장애란 말을 썼던 것이다. 그것도 혐오표현에 관한 토론회에서.. 아무튼 의도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소수자를 비하하거나 차별하는 말과 행동이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집필 배경이다.


책에서 다룬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차별과 배제의 심리, 유머와 용어 속에 숨겨진 희화화의 정치학, 차별을 감추는 보편화의 역설, 평등을 위해 드러내야 하는 차이, 혐오 차별 조건의 복잡다층성, 능력주의의 함정과 차별금지법의 의미 등등. 사회학, 특히 장애나 여성, 성소수자, 난민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얼핏 어렵고 심각해 보이지만 몇 시간만에 읽힐 정도로 흥미롭다. 우리가 부딪혔던 사례와 그걸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론이 적절히 버무려져 있기 때문일 거다.


이 매거진, 긁어 부끄럼은 나라는 개체로 이해하는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삶과 생각이 주제다. 나는 남자고 비장애인에, 이성애자이며 고학력자다. 난민은 아니고 차별받는 이주민도 아니다. 한국사회 안에서 소위 주류라 할만하다. 권리 남용을 걱정해야지, 억울함을 호소하는 집단은 아닌 셈이다(내 처지와 관련해 유일한 사회적 억울함은 윤석열한테서 멀리 산다고 非수도권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는 점인데 자치분권운동에 힘쓰고 있는 이유다. 지역 차별과 서열화에 대해서는 나중에 쓰겠다).


책에 따르면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안 불편한 리스트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나도 따라해 본다.


1. 밤길을 걸어도 성폭력 당할 걱정이 없다

2. 버스 탈 때 어려움이 없다(저상만 타야 하는 등의)

3. 승진을 못한다면 성별 때문은 아니다

4. 성정체성이 같은 사람들끼리 축제를 벌여도(그러지도 않지만)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다

5. 다른 지역에 가도 "네 동네로 꺼져"라는 비난을 듣지 않는다(촌지방놈이란 비하는 있겠지만)

6. 노○○존에서 금지당한 일이 없다


차별이나 혐오를 드러낼 위험이 있다면 누구나 조심해야 한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임을 생각해야 하고 모든 백인은 잠재적 인종차주의자, 모든 이성애자는 잠재적 성소수자탄압자이다. 연대의 기본 정신이고 평등을 앞당기는 생각이다. 이 조심에서 파생되는 피곤함이 사회 전체적으로 혐오와 차별을 당하는 사람의 고통보다 크지 않기 때문에 장려된다.


하지만 책에 나온대로 차별의 메커니즘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미국에서 한인들을 차별하는 주된 인종은 흑인이거나 히스패닉이다. 성소수자들끼리도 혐오가 존재하고 장애인끼리 우열을 가르기도 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여자들이 한다. 그러니 잠재적 가해자 의식은 세상 모든 사람의 몫이다.


안 불편 리스트는 소수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몰랐던 그들의 애로를 알게 되고 인권 감수성이 느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계속 마음에 뭔가가 걸린다. 설움조절의 어려움을 표현하면서 설움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께림칙함의 정체는 뭔가?

말이 무슨 죄인가, 언제까지 도망다닐 것인가

아무래도 나는 언어학을 공부했으니 혐오 표현이나 용어 선택에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사전적 의미에서 장애는 어려움과 불편함인데 연두가 지적했듯이 뭔가 부족하고 잘못돼 있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여기서 나는 의문이 든다. 부정적 인식에 잠식당한 용어는 계속 폐기되어야 하는가?


물론 언어와 인식은 길항작용을 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몸이다. 잘못된 용어가 그릇된 인식을 만들고 그 반대로도 작용한다. 인식이 개선돼 잘못된 용어가 퇴출되기도 한다. 소쉬르 식으로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e가 서로 견인하며 변하는 셈이다.


만약 장애가 원래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이유로 대체돼야 한다면 여전히 남아 있는 부정적 인식 때문에 장애인이란 말도 사라져야 하는가?그렇다면 다음에 장애인은 뭐라고 지칭해야 하는가?


우리는 진보와 함께 숱한 무고한 용어를 희생시켰다. 특정어의 터부화로 이룬 성취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나는 책에서 든 퀴어(queer)의 예에 주목한다. 원래 기괴하다, 기묘하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성소수자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성소수자들은 이 말을 쓰지 말 것을 요구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택했다. 우리 괴상망측하다 그래서 어쩔 건데?전세계 방방곡곡에서 퀴어축제가 열린다.


건축양식으로 잘 알려진 고딕(gothic)도 원래 고트족의란 뜻이다. 고트족은 중세 유럽에서 민족 차별의 대상이었고 고딕은 멸시의 뜻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흑인의 종명(種名)인 니그로가 금기어인 것과 같다. 고딕은 세월이 지나 우뚝 솟은 멋진 첨탑을 연상시키는 긍정적인 말로 쓰인다. 말의 입장에서는 의도했든 아니든 터부를 극복해 낸 셈이다.


솔직히 나는 이 당당함이 좋다. 어떤 용어가 소수자에게 불쾌함을 유발하면 안 쓰는 것이 맞지만 언제까지 후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롱과 배척을 목적으로 새로 만들어진 멸칭은 당연히 반대다. 하지만 원래 있는 표현이 유사성, 근접성 때문에 의미 확장이 되어 멸칭으로 쓰인다면 못 쓰게 할 것이 아니라 '의미 차단'이 옳지 않을까?


피가 섞였다는 뜻의 혼혈(混血)이나 여러 문화가 공존한다는 다문화는 사실 가치중립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인종이나 국적이 다른 아이를 차별하는 데 쓰인다고 한다. 선택지는 두 개다.


1.이미 멸칭이 되어 버린 것을 인정하고 쓰지 않는 캠페인을 벌인다

2.뜻의 왜곡을 바로잡자는 캠페인을 벌인다


어떤 것이 혐오와 차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까? 선택장애라는 말을 듣고 선택에 어려움이 있구나 하고 이해하는 게 현명한가, 장애 상태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혐오용어로 규정해 터부시하는 게 옳은가?


감수성은 잠재적 가해의식 속에서 확대되어야지, 피해의식 안에서 증폭되어서는 안 된다. 나같은 사람이 무심코 뱉지 않아야 하는 말, 무심코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이 있지만 여성, 이주민, 성소수자, 이슬람 신도, 장애인 들에게 무심코 흘려 듣는 대범함이 있으면 좋겠다. 무조건 참으라는 말이 아니다. 부당함에 당당히 맞서되 무조건 힘들어하지는 않길 바란다. 퀴어의 정신도 필요하다.


너무 이상적인 얘기인 걸 안다. 닭과 알의 문제인 것도 안다. 눈에 쌍심지를 켜야 겨우 변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모든 진보주의에는 과격과 타협의 스펙트럼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운동이 교조화되는 순간 길을 잃는다. 선택장애를 쓰면 왜 안 되지?라는 내 물음도 허용되면 좋겠다.


날카로움의 증폭 시대


너그러움이 사라지는 시대가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가해자를 봐주자는 의미가 아니다. 역차별을 호소하는 남자와 백인과 이성애자가 끊이지 않는다. 전통적인 강자가 평등의 착시현상에 의해 사회적 약자라고 주장한다. 무슨 논리로 막을 것인가? 혐오와 차별은 주관적이다. 바로 그 이유로 중년남성인 아재가 탄압받는 약자라고 우긴다면? (얼마 전에도 노키즈존 때문에 다른 작가와 논쟁을 하기도 했다). 각박함과 날카로움 때문에 평등이 아니라 모든이가 피해자인 시대가 열리는 것 아닐까?


잘 모르겠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글을 다 쓴 지금도 잘 모르겠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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