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개그를 위한 변명
얼마 전에 시를 썼다.
《얼죽아》
얼어 죽어도 아이스,
라는 말에
얼려 죽여도 아재개그,
라고 받아치니
정말 죽이려고 들더라
매순간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이
아재개그의 묘미
우스갯소리 직후에 말한 사람과 들은 사람 사이에서는 다양한 기류가 흐른다. 빵 터짐, 박수갈채, 흐뭇한 칭찬, 그저그런 호응, 썰렁하다는 타박, 조롱과 비난, 철저한 무관심……. 여러 가지 종류가 있겠지만 나 같은 중년 남성을 대표하는 농담은 단연코 아재개그다. 빵 터지든 살의를 느끼든 호불호가 있을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아재는 왜?’라는 관점에서 아재개그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아재개그는 수준이 낮은 유머 양식이다. 거의 몸개그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그 이하일 수도 있다(이제는 몸도 굳어 입만 살아 있다는 측면에서). 아, 아재들, 화내지 말고 조금만 더 들어 보셔라. 나도 아재개그를 즐기는 사람이라고요.
내 생각에 수준이 높은 유머는 상황과 맥락, 상대의 기대반응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된 것이다. 딱딱한 분위기를 바꿀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하는 데 기여하는 유머가 최고의 유머라 할 수 있다. 가령, 촌철살인 사회 풍자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아재개그는 그렇지 못하다. 맥락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이다. 가령, 오늘 아침의 이런 식.
직원 A : (내가 커피를 내리고 있자) 음~ 커피향이 좋아요.
직원 B : 커피향? 내 자리에서는 안 나.
나 : 나는 엘사.
이렇게 되면 커피향이라는 화제는 사라지고 만다. (냄새가) 안나 / 엘사는 앞의 대화 주제를 고려하지 않았고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라는 새 화두를 던진 것도 아니다. 그저 안나와 엘사 자매의 이름만 남을 뿐이다. 그러니 단순하고 수준이 낮은 것이다. 대화를 이어가려는 것도 아니고,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려는 의도도 없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게 힘들어요”라는 하소연에 “아침마당? 나 이금희 좋아하는데……”라고 반응했다면 십중팔구 아재다. 임플란트나 치과 치료 이야기 중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니다’라는 멘트를 날리며 합죽이 입모양을 한다면 (욕은 먹을지언정) 제법인데 하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단순함이 나쁜 거냐? 전혀 아니다. 아재개그의 단순함은 효율성을 높인다. 길어야 한 문장, 짧게는 한 단어로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부연 설명도 필요 없다(뭔가 더 설명해야 한다면 이미 실패다).
아재개그의 성공 조건을 정리해 보자. 우선 즉흥성이다. 미리 준비해 왔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한참 생각한 뒤 내뱉는 아재개그는 무조건 실패다. 순간순간 튀어나와야 성공적인 드립이 된다. 안나에서 엘사가 발화되는 반응속도가 0.5초 빠른가 느린가로 성공과 실패가 나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독창성이다. 한 번 구사했던 유머를 다시 쓰는 것은 실패를 넘어 치욕이다. 기억하는 것조차 불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의 반응이 성공, 실패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박장대소가 나오든 살기 어린 비난이 돌아오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부끄러움도 견뎌야 한다. 청자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진정한 아재개거의 자세가 아니다. 그 자리에서는 욕을 했지만 집에 가서 빵 터졌다는 사후 고백을 들으면 기분은 좋다. 그러나 그런 평판에도 영향받지 않는 것이 아재개그의 묘미이자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아재들은 욕을 먹어가면서도 아재개그를 치는가? 나는 ‘헛헛한 존재감’이 그 이유라고 생각한다. 주름과 뱃살은 늘고 팔다리는 가늘어지며 담은 결리고 몸은 쑤신다. 사프했던 청년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명실상부한, 빼박캔트 아저씨다. 예전만큼 주목도 덜 받는 것 같다. 일터에서나 집에서나 어느 모임에 가도 ‘내 존재’에 대한 자긍심은 줄어들었다. 이것을 만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바로 아재개그인 것이다.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을 쌓을 필요도 없고, 유행을 다 추적하지 않아도 된다.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좌중이 떠드는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가 적절한 한 단어만 찾아내 입 밖에 내면 그만인 것이다. 열화와 같은 반응이 따라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짧은 멘트 하나로 내 존재감을 내가 챙기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나 같은 중년 남성이 썰렁한 개그를 친다면 ‘아, 저 사람은 전성기를 떠나보내고 허전해서 저러는 거구나’라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