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직장인의 로망은 퇴사다. 그리고 모든 구직자의 소망은 입사다. 이것은 인지상정이고 당연지사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몸이 머물지 않는 곳을 향하기 마련이다. 화장실행 전후의 마음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퇴약볕 아래서는 폭설이라도 좋고 동장군 앞에선 열대야도 참겠다고 맹세하는 법. 머무르면 떠나고 싶고 여행지에서는 집이 그리워진다.
시인을 참칭, 사칭하면서 생각의 찌꺼기들을 시라고 우기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다. 매월 특정일에 맞는 마약같은 월급으로 로망을 유예하는 어쩔 도리 없는 샐러리맨인 것이다. '지금, 여기'에 뿌려진 글감을 뒤져 얼토당토않은 글을 쓰면서도 생활인의 고통을 온전히 비껴가지는 못한다. '내일, 저쪽'에 가는 마음을제어하지 못한다.
각설하고, 이 나이에 배낭 여행이라니 기상천외하긴 하다. 퇴사 로망 실현까지는 아닌 점이 불행, 열흘 휴가라는 꿩 대신 닭은 다행이라 하겠다. 가만 보면 세상지사 모두가 행불행, 복불복, 호불호가 동전의 양면처럼 잇닿아 있는 것이리라. 어쨌든 행일지 불행일지 모르는 이 여행은 짜증의 소개로 스트레스와 권태가 만나짝짓기를 하여 수정시킨 뒤 무책임이라는 대리모가 낳고 과감함이라는 인큐베이터가 키운 불안정 신생아라 하겠다.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주 수요일에 시작되는 이번 여행은 '나 혼자'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돌아보니 꽤 많은 외국 여행을 했다. 연수, 출장, 인솔, 신혼여행, 가족여행 등등 모두 동반자가 있었다. 이번에는 오롯이 혼자다. 그리고 수학여행이다. 배움을 받는 여행. 스트레스가 결심의 원인이었지만 재충전하러 가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목적이라면 방전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정말 그게 가능해? 집에서 오케이가 떨어져? 회사 자리 보전은 되는겨?"
혼자 여행을 간다고 하니 사람들의 반응이 대부분 이렇다. 애 셋 다자녀 외벌이 집안의 가장이 어느날 혼자 유럽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이 우리사회에서 특수한 상황인 건 사실이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나몰라라의 태도는 그 기간 동안 업무를 옮겨 받아야 하는 다른 동료들에게 부담을 준다. 게다가 사유가 질병이나 사고도 아닌(심지어 그 흔한 가사도 아닌), 개인 여행이라니 질투까지 합세하면 눈총이 따가울 수 있는 법이다.
매우 다행이다. 집이든 직장이든 사람들이 흔쾌히 오케이~! 물론 동정심을 자극하는 내 전략도 한몫 했으리라. 명색이 프랑스어문학 전공인데 아직 불란서를 한번도 못 가봤다, 대학 시절 유학을 목표로 번 알바비를 가족의 사업비 대느라 못 가게 된 것, 직장생활 20년 동안 앞만 보고 달리며 지칠대로 지쳤다는 점 등을 과장하여 호소, 읍소, 참소하였다. 다녀와서 더 잘할게 약속도 잊지 않는다. 팔짱 끼고 청취한 뒤 종국에는 뭘 사와라, 다녀와서 술 사라 따위의 요구를 제시하면서 윤허를 내주는 것이다. 자기도 데려가라는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앞날이 창창한 늬들은 나중에 직접 돈 벌어서 가!"
프랑스의 문인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행이란 건 돌아옴을 전제로 한 떠남이라는 점에서 전당포에 맡겨지는 담보물과 비슷하다. 다시 되찾을 때의 안도감을 위해 여기를 잠시 버리는 셈이다. 저쪽에 가서 보는 이쪽은 어떨까. 여행자인 내가 보는 일상자로서의 나는 어떨까. 유럽에서 돌아보는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정말 다른 시야가 트일까. 그게 좋을까 나쁠까. 때늦은깨달음이 올까, 불필요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까. 이제, 궁금증을 풀러 날아갈 채비를 한다.
이 시리즈는 몇 편의 출발전 프롤로그와 여행중 실시간 작성글로 구성됩니다. 글쎄요, 읽으시는 분들께 대리만족(이 될런지는....)이라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확실한 것은 여행 정보를 세세히 쓸 것이 아니므로 여행 가이드가 될 리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