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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리 피디 Apr 03. 2023

프랑스다움을 뒤져 가늠하는 나다움

실시간 유럽 수학여행기 3


우리 세대에게 프랑스란 참고서 완전정복 표지의 나폴레옹이었다. 알프스의 설산을 배경으로 백마는 두 앞발을 든 채 포효하고 있고 그 위의 나폴레옹은 무언가 지휘하듯 팔을 휘젓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이니 유럽 정복이니 하는 것의 의미는 몰랐지만 그 진취성만큼은 책상 위 우리에게 고스란히 각인되었다. 왜 표지 모델이 그였을까? 모든 수험생을 투사, 전사로 만들어 끝내 이기라는 뜻이었겠지. 그런데 조금만 역사에 관심 있는 학생이라면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안다. 러시아 원정 실패로 엘바섬에, 워털루전투 패배로 세인트 헬레나섬에, 두 번이나 쫓겨났다.  끝에 포기한 셈이다.


프랑스인들은 알까? 200년 전 자기네 조상이 지구 반대편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도전정신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일그러진 미완의 혁명가라는 사실을, 순진한 학생들은 그것도 모르고 도전과 진취만 흡수했다는 사실을(이번에 기회가 된다면 알려줘야겠다)... 암기 알레르기가 있던 나 역시 역사라면 치를 떨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내막도 알 길이 없었다(스토리 없는 암기식 역사 교육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만약 프랑스의 참고서 표지 모델이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어떤 느낌일까? 


논점일탈이지만 나폴레옹 얘기가 나왔으니 일화 하나만... 그가 공화파의 핵심으로 프랑스혁명을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처음에는 왕당파에 붙었다고 한다. 혁명전쟁을 이끌 지휘관을 찾던 시민들은 유능한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을 섭외하려고 한다. 그때 그는 왕당파와 협상 중이었고 얘기가 잘 되지 않아 내팽개치고 애인과 극장에 갔다고 한다. 곧 공화파에 스카우트되고 승승장구하여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그러니까 민주주의에 대한 소신이 있었던 건 아닌 셈이다. 철학이 아니라 조건이 맞아 이룬 성공이다. 역사는 가끔 이렇게 어이없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소 뒷걸음이 쥐 잡는 행운의 의미를...


당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프랑스는 진취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흥선대원군 시절의 쇄국정책 같다. 국경을 닫는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사적 흐름에 역행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는 이윤에 대한 도전을 강조한다. 물질적 풍요를 최고의 가치로, 대량생산과 과시소비, 자유무역을 우쭈쭈 하는 것이 대세다. 미중의 대립도 뜯어보면 경제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거다. 이렇게 가치와 이념의 시대가 끝난 것 같지만 프랑스가 무심하고 시크하게 버티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오래된 걸 좋아한다. 건물이든 물건이든 친구든 와인이든... 새것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듯하다. 스마트폰 보급율은 유럽에서 가장 낮고 자동차 교체주기는 가장 길다. 웬만하면 고쳐서 쓴다고 한다. 사람들이 불안해야 보험이 팔리고 불편해야 새 가전제품이 팔리고 시샘해야 명품이 팔리는데 프랑스에서는 이게 안 먹힌다(세계적인 명품을 만든 나라가 그걸 안 산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부를 축적하지 않고 순간을 즐기는 데 돈을 쓴다. 일 년 벌어 한 달 휴가에 다 쓴다. 욕망에 기반한 세계 경제의 궤도에서 이 나라, 완전히 탈선한 게 분명하다. 어쩌면 몇 나라만 빼고 우리를 포함한 나머지가 탈선한 것일지도...


우리나라는 어떤가? 미국식 소비경제를 받아들여 미국보다 더 발전시켰다. 돈이 곧 행복이다. 아이에게 큰돈을 들여 돈 냄새나는 쪽으로 키운다. 연봉, 집 평수, 통장 잔고, 자동차 배기량, 주식 수익률, 아파트 시세, 자녀 등수, 학원비, 대학 순위, 팔로어와 좋아요 수, 먹은 나이, 골프 스코어 따위를 빼면 서로 나눌 얘기가 별로 없다(숫자로 환산 가능해야 화제에 오른다는 점이 흥미롭다. 수포자는 그렇게 많으면서). 자랑과 푸념과 시샘 대신 자기만의 유니크함을 최고로 생각하는 파리지엥들의 시크한 태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려서부터 내가 누군지, 인생은 어떤 건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프랑스인들에게서 배울 점은 없을까?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면서 대부분 정복에 실패하는 우리 사회의 어리석음을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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