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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두부 Apr 30. 2023

해는 뜨고 지다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을 더듬어 볼 수야 있었겠지만 순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밀려온 감정들이 그녀에겐 꽤나 많이 쌓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영은 몇 년 전 남편과 헤어진 후 김밥을 마는 일부터 건물청소, 마트에 어린이 이유식을 채워놓는 일까지 여러 일을 거쳐 올 해에 들어서는 노인돌보미 일을 하게 되었다.  1938년 8월 1일생 임점례 씨가 그녀가 맡은 첫 번째 돌봄 대상이었다. 노인을 돌보는 일은 어떤 유형의 노인, 그리고 그 노인의 가족을 만나느냐에 따라 일의 난이도가 천차만별인데 은평 돌봄 센터장은 순영에게 조점례 할머니집은 오랫동안 자리가 나리 않을 정도로 일이 힘든 편이 아니며 가족도 좋은 사람들이라 말하며 순영이 운이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순영은 안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고 센터장의 말대로 조점례 할머니는 말수가 적고 깔끔하며 차분한 사람이었다. 순영의 일은 거동이 조금 불편한 할머니와 하루에 한 번씩 산책을 나가고 몇 가지 반찬을 같이 먹고 할머니와 저녁 티브이프로그램을 본 후 할머니가 잘 시간에 퇴근하는 것이었다. 주말에는 자녀들이 오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자녀들은 이런저런 일로 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조점례 할머니는 혼자 주말을 보내야 했다. 순영은 할머니가 가여워 주말에 가끔 들르곤 했지만 그때마다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편하게 쉬라며 그녀가 오는 것을 극구 말렸다. 한 달에 4번 정도 오던 자녀들은 어느샌가 한 달이 지나도 오지 않기 시작했다. 자녀들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마른 수건으로 닦는 할머니에게 자녀들이 괘씸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가도 순영은 둥그렇게 말린 할머니의 굽은 등을 보면 울대까지 차오른 말을 꾹꾹 눌러 저 밑까지 내려보내야 했다. 자녀들이 오지 않은지 3달 정도가 지나가자 순영은 점점 우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일요일 점심,  호박죽을 만들어 가져다 드린 후 간단히 같이 죽을 먹고 고구마를 몇 개 쪄드린 후에 집에 돌아온 순영 씨는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따뜻하지 않아야 할 집이 너무나 따뜻했고 부엌에서 밝은 빛이 나고 있었다. 순영은 신발장에 있는 단우산을 집어 들고 천천히 부엌으로 향했다. 낡고 둥그런 식탁에 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 앉아있었다. 식탁에는 순영이 꽂은 싸구려가 조화가 아닌 진짜 꽃이 피어있는 화분이 놓여있었다. 사람의 눈은 밝은 금빛 머리칼에 감춰져 있었지만 온화한 느낌을 풍겼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순영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자 아기피부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그의 입술은 속삭이듯 말했다.

"김순영, 당신을 데리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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