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잔함을 미연에 방지하자
여행을 즐겁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 가지다. 동행과 돈.언젠간 사람과 날씨만 좋으면 돈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점점 날씨보다도 돈이 더 중요했다. 비가 와도 돈이 있다면 좋은 호텔방을 잡아 쉬면 되고 쇼핑이나 쾌적한 실내 활동을 하면 된다. 돈은 모든 고민을 줄여주는 마법이다. 오늘 예약하는 호텔은 일주일 전보다 1.5배는 비싸지만 고민 없이 결제할 수 있는 마법. 즉흥적인 여행을 즐겁게 해 주는 핵심은 돈이었다. 하와이 여행을 준비할수록 내 경험에 인색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비쌀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일단 비행기표를 끊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비싼 숙소비에 1차 기함하고 두 번째로 입장료를 찾아보며 2차 기함했다.
비싸지는 숙소비가 아까워서 한 달 동안 제주도보다 작은 메인 섬 오아후에서만 머물기로 했다. 30일 이상 한 곳에서 머물면 가격이 훨씬 저렴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법이 숙박이 아닌 주거로 적용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오아후에서의 경험에도 박해졌다. 폴리네시아 문화에 부쩍 관심이 생긴 나는 폴리네시안 문화 센터와 박물관을 가 보고 싶었는데 입장료만 무려 10만 원 돈. 문화센터도 박물관도 입장권이 비싸서 포기했다. 음식조차 밥 한 끼 먹으면 그냥 5만 원이니까 도착하기도 전에 외식이 망설여졌다.
이런 식으로라면 하와이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집 안에만 있을 판이었다. 내 쪼잔함은 하와이에서만큼은 묻어둬야하는데 말이다. 부담에 마음이 불편해지자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왕 즐기기로 다짐한 거, 돈 나올 구석을 뒤지고 뒤졌다. 코로나 전 사놓았다가 엄청난 마이너스가 보기 싫어 묻어두었던 주식을 기억해 냈다. 오랜만에 비밀번호를 찾아 접속하니 아니나 다를까, 무려 마이너스 57% 의 손실을 보고 있었다. 눈을 꼭 감고 전량매도 버튼을 누른다. 시원섭섭하다. 4년 전 나의 실수가 그래도 지금 나에게 조금의 경비라도 보태주었으니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모자라다. 머릿속을 굴리다가 연말에 차를 사기로 했던 다짐을 조금 변경했다. 새 차 대신 중고차로. 하이브리드로 조용하고 멋있게 도심을 달리는 상상 속 내 모습이 아쉽긴 하지만 포기다. 오래된 가솔린 차를 몰 수밖에 다. 괜찮다. 이 돈이 나를 미래의 궁상에서 구해줄 테다.
나를 구원해 줄 마지막 투수는 음식. '해외여행 갈 때 무슨 라면 고추장을 싸가?'라고 하는 사람 바로 나다. 하지만 살인적인 하와이 물가와 치솟는 환율에 굴복하고 말았다. 하와이의 마트물가는 그나마 저렴하기 때문에 최대한 요리를 해 먹기로 했다. 맛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에 바리바리 음식을 싸가다니.. 하지만 남부럽지 않게 끝내주게 맛있는 무스비를 해 먹을 거다. 햇반뿐만 아니라 볶음조미, 고추참치, 올리브오일도 차곡차곡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이소에서 무스비 틀을 사고 할머니가 볶아준 고소한 통깨를 봉지에 꽁꽁 묶어 캐리어에 넣었다. 화룡정점은 가스버너! 숙소에 전기스토브가 있긴 하지만 딱 봐도 답답스러울 정도로 화력이 약해 보였다. 한 달간 나의 불을 책임져 줄 가스버너까지 고이 캐리어 한편에 자리했다.
이럴 거면 왜 가냐고?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떠난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