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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다리담 Sep 03. 2023

최고의 선택, 행복에는 독일까?

Maximizer와 Satisficer, 선택의 역설


어제 친구와 MBA 얘기를 했다. 알고 보니 우리 팀에 새로 들어온 디렉터급 팀원들이 모두 미국의 MBA를 갖고 있었다. 디렉터 자리 정도 이직하려면 MBA는 필수로 갖고 있어야 하는구나 싶다. 하긴 우리 직군에서 MBA를 다녀오면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나는 디렉터 자리는 싫어!라고 했지만 MBA에 대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이왕 하는 거 더 배워서 더 좋은 자리에 가면 좋지 않은가, 내 링크드인에 MBA 하나 정도는 달면 멋지지 않을까, 삐까뻔쩍한 그들의 링크드인 프로필과 비교하니 내 스펙이 갑자기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러다 아차차, 하며 Maximizer가 되려는 내 마음을 꾹꾹 눌렀다. 맥시마이저는 최근에 깨달은 내 성향이다.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려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로, 더 좋고 더 나은 선택지를 부지런히 추구한다. 스웨터 하나를 사더라도 A부터 Z까지의 옵션을 모두 돌아본 후 가장 좋은 가격에 가장 마음에 드는 품질과 디자인을 고르는 사람이다. 이와 반대되는 사람들은 Satisficer, 선택의 순간에 최선의 선택보다는 적당한 선택지에 만족하는 사람을 뜻한다. 몇 개의 가게를 둘러보고 적당히 마음에 드는 스웨터를 사는 사람이다. 당연하겠지만 맥시마이저가 고른 스웨터가 더 합리적인 상품일 가능성이 높다. 맥시마이저의 삶 또한 더 많고 더 높은 성과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래서 맥시마이저가 되는 게 좋냐고?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려는 맥시마이저는 더 나은 것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어 있다. 선택의 역설이라고 아시는지? 수많은 선택지가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은 적은 선택지가 있을 때보다 덜 만족한다. 최선의 선택처럼 보이는 것을 고르더라도 필연적으로 다른 선택지가 더 낫진 않았을지 되돌아보고 후회하기 때문이다. 다른 옵션을 고른 사람과 본인의 선택을 초조하게 재어보며 어떤 것이 더 나았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그것이 바로 나의 성향이기도 하다.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봐 불안한 나. 선택을 한 후에도 끊임없이 비교하고 곱씹으며 내가 잘 선택한 것이라고 위안하는 나.


반면 새티스파이서는 적당한 선택에 만족하기 때문에 뚜렷한 성취는 하지 않아도 마음은 편안하다. 적절한 선에서 만족할 줄 알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항상 새티스파이서였다. 그들은 적당히 만족할 뿐만 아니라 과감히 성취적인 선택지를 버릴 줄도 알았다. 사회초년생 시절 그런 친구들의 선택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다. 서울에 내로라하는 대기업을 다 뿌리치고 부모님 계신 지방에서 살기 위해서 지방 지사가 있는 기업을 선택한 친구, 그리고 6개월 만에 덜컥 붙어버린 9급 공무원시험에 만족하고 7급 시험은 보지도 않은 친구. 나는 그들의 과감한 선택이 부러웠지만 나는 절대 그들처럼 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애살 있는 타입이라 그런가봐, 라고 얘기를 하고는 했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선택의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할까봐 불안했다. 중간의 선택을 하는 그들이 여유롭게 느껴지는 동시에 나는 항상 조급했다. 때와 운이 맞아 온 기회, 한 번 뿐인 이 기회에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기회를 잘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거의 항상 내 선택에 만족하지 못했다.


여행지에서도 내가 고르지 않았던 다른 옵션을 아쉬워하며 불만족하곤 했다. 음식이 그저 그럴 때면 구글맵 평점이 더 높은 저 옆 음식점에 갈걸 하며 한 끼 밖에 없는 오늘의 점심을 최대한으로 쓰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는 했다. 더 나은 직업을 위해서 아등바등 고군분투했고 기회가 왔을 때 무리해서 잡았다. 직장에 안착해서도 한 번 밖에 없는 프로젝트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나의 그릇보다 더 많은 역할을 꾸역꾸역 해 내며 일상을 희생하기도 했다. 나는 항상 기회를 최대한으로 쓰지 못할까 불안했고 더 좋지 않은 선택을 할까 안절부절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매 선택의 순간을 기회라 생각했고 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새티스파이서 친구들처럼 살 수 없을까? 행복은 능력이라 했다. 지금의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능력. 즉 과감히 포기하는 능력이다. 이 개념을 진심으로 이해하기 전의 나는 단순히 나는 그런 성격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새티스파이서의 비법을 알지 않는가. 선택의 순간에 선택으로부터 최대한의 효용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방법이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


유튜브에서 한 외신기자가 한 말을 기억한다.([한국인들의 이상한 행복]이라는 책을 쓴 기자였다) 인생의 끝없는 선택의 연속에서 한국인들은 본인은 행복하지 않게 하는 선택을 한다고 했다. 더 높은 순위의 집, 회사, 대학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말에 공감한다.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선택지와 성공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후자를 선택한다. 한국은 그런 사람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빠르게 성장해 왔지만 자살률이 가장 높기도 하다.


유투브에 옥수수밭 소개팅 이라는 콘텐츠가 있다. 과거 남미 어딘가의 배우자 의식에서 따온 소개팅이다. 그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결혼적령기의 아이들은 옥수수밭에서 단 하나의 옥수수를 고를 수 있다. 얼마나 좋은 옥수수를 골랐는지에 따라 배우자를 배정하는 의식이다. 다만 한 번 고른 옥수수는 절대로 바꿀 수 없다. 실제로 그들이 따간 옥수수의 품질은 그리 좋은 옥수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더 좋은 옥수수가 나오지 않을까 선택을 선뜻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의식에서 차용한 유투브의 컨텐츠는 한 시간 동안 한 명씩 소개팅을 하며 마음에 들면 멈춘다. 다만 멈췄을 때 더 뒤에 사람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맥시마이저로서의 나는 아마 이 소개팅에서 나간다면 끝내 결정을 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남는 것 없이 모든 대안을 다 봤다는 만족만 남은 채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더 나은 대안이 나올 것만 같은 조급한 마음에 계속 다음을 외칠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몰라서일수도 있고 FOMO(fear of missing out) 때문일수도 있다. 영상에서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적당한 선택을 하는 이들을 보며 쾌감을 느꼈다. 나는 30년 남짓한 인생을 이미 맥시마이저로 살아왔다.  그렇지만 선택의 순간에 이 선택이 내 행복을 위한 것인지 아님 그저 기회를 최대로 쓰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인지 한번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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