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게 살아가기 위한 근간
인생은 항상 우선순위와 에너지 용량의 배분이라고 생각한다. 30여년 삶을 살아오며 시간과 에너지의 유한함을 끝없이 느꼈다.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우리는 갖고 있는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할지를 우선순위에 따라서 결정한다. 도파민에 따라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기저핵과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전두엽이 활발하게 싸우는 작업이다. 순간의 즐거움이 이긴다면 모든 우선순위 중 순간의 즐거움이 가장 우선시될 것이고 전두엽이 이긴다면 보다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행동에 우선순위가 매겨질 것이다. 순간의 즐거움에 항복하지 않더라도 해야할 일들 중 우선순위의 싸움은 계속된다.
예를 들어 바쁜 프로젝트 기간에는 운동과 청소를 놓고 프로젝트에 집중하며, 최근 결혼을 앞두고는 일보다 결혼준비를 더 우선시한다. 너무 졸릴 때는 샤워를 가뿐히 스킵하기도 한다. 매번 우선순위를 재조정함으로써 나는 프로젝트의 할 일을 무리 없이 해 내고 결혼준비를 큰 무리 없이 가뿐히 할 수 있었다. 우선순위에 따라 언제든 일상을 희생했기 때문에 굵직한 업적은 많다.
하지만 일상은 무너진다. 바쁠 때와 바쁘지 않을 때의 집 청결상태는 하늘과 땅 차이다. 언제든 쉬었다가 다시 시작했다가 하는 요가는 결코 늘지 않으며 어떤 운동도 자신 있게 잘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루틴을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 치고는 루틴을 무너뜨리는 일에 합리화가 너무 잘 된다. 요즘은 운동을 안 한 지가 한 달은 되었다. 이사하고 정리하고 정신 없이 지내면서 운동의 우선순위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반면 남자친구는 나와 다르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매일의 할일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큰 면접이 있는 날 아침에도 청소를 하고 화분에 물을 줬고, 몸살이 걸려 아픈 날에도 샤워 후 유리를 닦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일상은 그에게는 우선순위 변경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차분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우선순위에 따라 휙휙 바뀌는 내가 성취하는 일은 더 많을 것이지만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과 안정감은 그에게 더 많을 것이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루틴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일을 과감히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 러닝을 하는 사람이 아침에 중요한 약속이 생긴다면 평소보다 한 두 시간 더 일찍 일어나서 러닝을 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나의 이런 부분이 빠르게 달려가는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것과 비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몸 담고 있는 회사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일한다. 중요한 일이 생기면 모든 팀의 리소스를 투입해서 급한 일부터 해결했다. CEO는 all hands on deck 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렇게 모든 리소스가 급한 일을 해결하고나면 눈에 보이는 메트릭은 나아지지만 매번 돌봐야 할 안정적인 시스템은 사라진다. 메트릭이 나아지니까 겉보기에는 성취가 크지만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더 힘들어지는 상황의 반복인 것이다.
반면 남편이 삶을 운영하는 방식은 안정적인 대기업의 운영방식과 비슷하다. 대기업에서는 각 팀에 할당된 리소스를 유기적으로 조정하는 일이 드물다. 각 팀은 각자의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굴려가면서 그 안에서 우선순위를 조금씩 조정해 나간다. 답답한 방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안정적이고 무리 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스타트업 같은 내 삶을 조금은 안정적으로 꾸릴 필요가 있다. 내가 우선순위에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되, 꾸준하고 소소한 일상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일상에 할당된 우선순위를 마음대로 거두어가지 않아야 한다.
올해 봤던 유투브 중 인상 깊었던 것은 배우 진서연님이 다음 날 운동을 하기 싫을 것 같을 때는 운동복을 입고 잠에 든다는 것이었다.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본인의 의지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었다. 나도 아무리 바쁘거나 피곤해도 운동과 일상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면 한다. 루틴을 일상생활에 빼먹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순간의 선택보다 장기적인 성취를 쉽게 택할 수 있도록 장치를 여기저기 마련해두어야 한다. 겨울 아침 추워서 일찍 일어나기가 싫다면 따뜻한 곳에 일을 할 수 있는 테이블을 둔다거나 아침에 먹음직스러운 밥을 준비해둔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선순위들의 순서를 잘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더 많은 우선순위를 커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많은 일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가용에너지(capacity), 즉 체력과 집중력과 시간을 키우는 일이 있다. 체력은 여유 있는 태도의 가장 밑거름이다. 내 에너지가 없을 때는 인내심이 바닥이 되어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나고 생각하지 않고 말하게 된다. 체력이 있어야만 집중력도 유지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삶을 잘 꾸려나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역량들이다. 가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키우는 것은 우선순위를 잘 세우는 것 못잖게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유산소 운동이 필수적이다. 일전에 어떤 과학자들이 유산소와 스트레칭 중 어떤 것이 더 건강에 도움이 될 지를 실험한 적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산소가 훨씬 더 체력과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유산소는 지구력과 심폐력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이는 집중력을 키우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같은 일이라도 집중해서 하면 빠르고 좋은 퀄리티를 내게 된다. 유재석님은 아무리 늦어도 매일 러닝머신에서 꾸준히 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기업의 CEO들도 새벽에 일어나 꾸준히 러닝을 한다.
한편 할 수 있다면 시간을 돈으로 사는 것도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올 초 남자친구는 본인은 돈이 된다면 청소하는 분을 매주 부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 때 나는 공감하지 못했고 작은 언쟁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해야지' 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말인 지금 나의 생각은 또 달라졌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쓰게 되면 다른 일을 할 나의 에너지가 고갈된다. 다른 일을 하는 내 에너지가 청소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에 쓰인다면 그것은 중요한 일이다. 어느 일요일 오전, 화장실에서 패딩 손빨래를 하고 진이 빠져 다른 중요한 일을 할 수 없었던 때 나는 이것을 깨달았다.
몇 년 전에 우석 작가가 쓴 부의 인문학 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인상 깊은 문구가 있다. 그는 본인의 딸에게 외주주는 법을 가르친다고 했다. 집을 인테리어하는 일을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 에너지로 본인은 본인의 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 때 나는 양가적인 감정을 가졌다.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반셀프로 인테리어를 했었다. 시간과 에너지를 갈아넣어서 돈을 벌었다. 항상 같은 월급을 받는 직장인에게는 돈을 아끼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딸에게 그보다 본인에게 중요한 일을 하라고 가르쳤다. 그의 딸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은 부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대학가 고깃집에서 카페에서 알바를 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알바하던 학생시절의 나와 그의 말을 겹쳐 떠올리고는 했다.
하지만 살아보니 그의 말이 맞아지는 시점이 왔다. 나에게 주어진 가용에너지는 한정적이고 그 중 나에게 소중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 때가 왔다. 예전만큼 돈이 내 삶의 우선순위에 있지 않다. 돈보다 내 에너지가 더 중요한 시점이 왔다. 젊은 시절 비행기값을 아끼기 위해서 공항에서 노숙을 결정하던 때를 지나, 이제는 장거리는 비즈니스를 선택하는 때가 왔다. 내 시간과 에너지의 가치가 돈보다 더 소중해지는 때다.
이제는 내가 무엇에 에너지를 쓸지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그 우선순위 안에 일상을 단단히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도록 나의 용량을 키우는 것. 때로는 현명하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소소한 일상을 누리면서도 큰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