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진급을 했다. 남들보다 빠른 진급이었고, 또래에 비해 월급이 많아졌다. 변경된 연봉을 통지받았을 때 연봉계약서를 몇 번이고 들여다 보았다. 참 자랑하고 싶었다. 내가 돈을 많이 번다는 사실은 내 능력과 노력에 대한 반증이라 생각했다. 작년 한 해 동안 너무 많이 고생을 하고 한 승진이라 더 그랬다. 친구들에게 몇 번 자랑하고 밥을 샀다. 나를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해주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다. 돈에 관한 것은 예민한 문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웬만하면 나의 재정상황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서로의 재정상황을 모를 때 우리는 모두 평등해질 수 있다.
현금흐름이 많아진다는 것은 걱정을 한시름 더는 것과 같다. 자산을 갖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현금흐름이 많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대부분의 재무적인 문제에 대해서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왜 어르신들이 미래 가치 높은 자산보다 월세 따박따박 들어오는 오피스텔이나 빌라를 선호하시는 지 알겠다. 통장에는 대출빚이 여전히 쌓여있을지언정, 아무리 많이 써도 무리 없이 카드값을 갚아내는 나를 보며 마음이 편안했다. 어찌보면 이는 안일함이었다. 자연스레 소비가 늘었다. 고마운 이전상사에게 진급을 알리며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녀는 충고했다. 연봉이 한번에 많이 오르면 보상심리에 많이 쓰게 된다고, 나중에 후회할 일이니 경계하라고 했다. 본인의 경우는 명품으로 욕구를 충족했다고 했다. 나는 명품에는 관심이 없으니 괜찮을 줄 알았으나 그 대신 자잘하게 카드값이 늘어났다. 일상에서 구매하는 것들이 조금씩 더 좋은 걸로 바뀌어 갔다.
나는 원래 유지보수비용이 높은 인간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었다. 신선한 식재료를 사는데나 운동 강습을 받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약속이 없어도 매달 식재료비나 운동 수업 비용이 큰 단위로 나갔다. 월급이 늘어나다보니 이런 비용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자잘하게 비용이 늘어났다. 소비할 때 고민하는 시간이 줄었다. 이게 바로 돈의 맛이구나를 느꼈다. 일 년만에 나는 많이 여유로워졌고 소비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훨씬 줄었다. 큰 돈이 들어갈 때 조금 속이 쓰리기는 하지만 그것의 영향이 오래 가지는 않는다.
어느 새 연봉이 오른 지 일 년이 지났고 그 다음 연봉협상도 했다(올해는 미미했다). 되돌아보면 작년 일 년 동안은 오른 연봉이 나의 자부심이었던 것 같다. 괜히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했던 걸 보면 나도 참 자잘한 인간이다. 이제 이 정도의 벌이가 나에게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도 안다. 회사에서는 야근이 수반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시키고는 하는데, 이를 군말 않고 하게 된다. 회사에서도 주는 만큼 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이직처를 슬슬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특별한 전문지식이나 학력이 없으면서 지금 받는 연봉을 맞춰주는 곳을 찾으려니 내 능력을 두 배로 증명해야 한다. 사람들을 매니징할 수 있는 역량을 증명해야 하고 넓은 도메인 지식이 빠싹하거나 아니면 네트워킹을 잘 해서 좋은 인맥을 만들어 지인추천을 받아야 한다. 그 어느 것도 내가 가진 것이 아니므로 또 죽어라 노력해야 한다.
한번 맛보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이 맛, 평생 직장의 노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으로 MBA를 알아보기 시작했을 때 즈음 경각심이 들었다. 회사의 웬만한 디렉터들은 아이비리그의 MBA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화려한 그들의 스펙이 내심 부러웠고 디렉터까지 승진하려면 이런 스펙 하나쯤은 달고 있어야 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 애매하게 부족한 내 영어실력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플 책도 사고 강연도 예약하며 어느 정도 인생의 플랜도 세웠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안 하길 잘했다. 나는 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일이 내 인생 전반을 침범하게 두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MBA를 하면 나는 다시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 다시 열심히 일을 할 것이다. 물론 지금 상태로는 따내기 불가능해 보이는 자리를 스펙이 있다면 따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인가 고민했을 때 그건 아니었다. 내 마음 깊은 곳을 바라본다면 FIRE하고 작은 사업 하면서 살고 싶은 것 같다.
일에 빠져서 일 말고 아무 것에도 관심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최근 나는 일 말고는 얼을 빼놓고 사는 사람이라는 걸 얼마 전에 깨달았다. 요즘은 사람도 잘 만나지 않는데 아주 어쩌다가 누군가를 만나도 주제는 대부분 커리어에 관한 얘기다. 그러다 얼마 전 워니가 우리 집에 왔다. 워니랑 맛난 피자도 먹고 피크닉도 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상한 것은 내가 워니와 나눈 대화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겨울에 만났을 때 우리가 나눴던 얘기에 대해서 워니가 얘기하면 나는 정말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떤 음식점에 대해서 내가 했던 얘기,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대화 주제. 아무 것도 나는 기억나지 않았다. 회사에서 몇 달 전에 정리한 정책은 잘도 기억나는데 친구와 나눈 얘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모니터 속 삶을 온 정신를 팔고, 손에 만져지는 현실을 핸드폰으로 쇼츠를 보듯 살고 있었다. 일상을 휘발하게 두는 삶, 깨달은 돈의 끝맛은 씁쓸했다.